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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그때 그 가수] ‘이별 아닌 이별’ 이범학, 여전히 현재 진행형
입력 2014-08-13 13:40 
이 가수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내 사랑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이범학 ‘이별 아닌 이별 中

90년대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던 가수 이범학을 아십니까? 요즘 젊은 세대들이야 이름이 낯설 수도 있지만 그의 히트곡인 ‘이별 아닌 이별의 한 부분을 불러주면 누구나 아, 그 노래”라는 반응을 보일 거다. 이 곡은 이범학의 데뷔곡이자 지금까지 사랑받는 오랜 생명력을 가졌다.

가수들이 설 무대가 점점 줄어드는 탓에 지금도 방송에서 얼굴을 쉽게 볼 수 없지만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음악을 하고, 또 대중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최근에도 tvN 예능프로그램 ‘그 시절 톱10의 여름 특집 ‘웰컴 투 두메산골 촬영을 위해 오지 여행을 다녀왔다.



◇ 폴 메카트니 보고,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가 음악을 처음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스쿨 밴드에서 노래하며 작은 꿈을 키워 온 것이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가볍게 시작한 밴드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어요. 한 시간 연습하는데 1000원씩 내고, 딱 지금만큼 더운 날씨에도 선풍기 하나 덜렁 틀어놓고 연습했죠. 땀이 얼마나 났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연습을 마치고 나와서 느끼는 바람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상쾌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는데 그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하죠.”

무엇보다 그에게 진짜 가수의 꿈을 꾸게 해준 사람은 영상을 토해 만난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다. 그가 홀로 기타를 치며 ‘예스터데이(Yesterday)를 부르고, 객석에 나이 지긋한 팬들이 앉아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그 영상은 그에게 꿈이 됐다.

너무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20년이 지났는데 기억해주고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축복받은 인생이잖아요. 저도 저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느낌이 확 들었어요.”

오로지 가수가 되기 위해 대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당시 이범학은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가 지름길이라는 생각에 대학 가길 결심했다고. 법관이 되길 바라신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고 택한 과는 철학과였다. 조금 의외의 결정이었다.

원래 영문과 등에 지원했는데, 경쟁률이 센 과를 선택하다가 삼수까지 하게 됐죠(웃음). 그러다가 깊이 있고 심도 있는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조금 낮은 과를 생각하다가 철학과를 가게 되었어요. 가수가 되고 싶어서 철학과에 오고 싶다고 하니 다들 놀라긴 하더라고요.”


◇ 자의반 타의반으로 낸 ‘이별 아닌 이별의 대 흥행

한 학기를 마치고 군입대를 하게 된 그는 틈틈이 노래 연습을 하고 피아노를 연습하며 한시도 음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대 후 고등학교 때 같이 밴드를 했던 친구에게 연락을 받고 이미 마련된 인천의 한 밴드에 리드보컬 자리에 서게 됐다. 그 밴드가 바로 이색지대다.


내가 꿈꿨던 것은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였는데 결국 오디션으로 가수를 하게 된 거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1집을 내고 두어 달 만에 팀이 깨졌어요. 저는 붕 뜬 상태였는데 멤버들이 그 고생한 앨범을 사장시키기에 아깝다고 의견을 모아서 저에게 줬어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의 1집이 된 거죠.”

1991년 ‘이별 아닌 이별은 발표하자마자 큰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시 음악 순위 프로그램인 KBS ‘가요톱텐에서 1위 후보에 오르는 것도 모자라 5주 연속 1위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가요톱텐 규정상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 더 이상 순위에 집계되지 않는 시스템이 도입된 후라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지 사실상 음악의 힘은 더욱 거셌다.

벼락스타라고 하잖아요. 자고 일어나니까 1위가 되어 있더라고요. 당시 최고 인기를 끄는 스타들이 나오는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도 나오고 있었고. 한 번은 경주에 있는 대학교 축제를 갔는데 공연이 끝나고 2시간 동안 그 학교를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어서요. 또 과거 한 방송에서 옛날 팬들을 만나 김장을 담그는 등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방송 끝나고 절 찾아와서 학 1000마리 접은 걸 건네주더라고요. ‘20년 만에 주인을 찾는다는 말과 함께요.”

데뷔 전 그가 꿈꾸던 폴 매카트니의 영상과 어딘가 겹쳐 보였다. 그 영상을 보고 꿈을 키웠던 이범학이 영상 속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 ‘왕년에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이범학은 이듬해 2집 앨범을 내고 여러 가지 문제로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 다시 앨범을 들고 나온 것은 무려 20년 후인 지난 2012년이다. 여러 방송을 통해 그의 힘들었던 과거는 많이 언급되었다. 때문에 그는 그때 힘들었던 얘기는 그만하고 싶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당시에 정말 힘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진 않잖아요. 그런 일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나에게는 이제 불필요한 ‘과거 이야기가 된 거예요. 그래서 ‘왕년에 ‘재기라는 말을 싫어해요. 내 일상은 늘 똑같이 활동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그런데 20년간 앨범 활동 없이 준비만 했던 그 기간은 사실 바보 같기도 해요. 그것 역시 지금의 가수 활동을 하는 데에는 힘이 되는 시간이었지만요.”

이범학은 20년 만에 낸 앨범으로 트로트라는 장르를 소화했다. 의외의 장르 변화화에 그는 아직도 내 꿈은 -ing다”라는 대답을 건넸다. 지금까지 해왔던 록, 발라드에 트로트라는 것을 더했을 뿐 한 가지 장르에만 치우지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도전에 불과한 거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 늘어난 것뿐이죠. 투수로 따지면 직구만 던지다가, 커브란 구종이 추가됐다고나 할까요?(웃음) ‘먹고 살기 힘드냐 ‘왜 트로트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 생각을 제가 안 했을까요? 당연히 했죠. 그럼에도 결정한 이유는 도전이라는 거예요.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다시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도 계속해서 앨범 작업을 하고 있고, 이미 만들어 놓은 곡들도 수두룩하다. 그는 이미 자신 만의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준비해 놓은 앨범을 세상에 내놓고 가수로서 이를 맛깔나게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보다 그는 과거 ‘가수라는 꿈을 이루고 요즘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며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보통 행사에 가게 되면 가수가 3곡을 부르는데 그걸 다 저의 곡으로 부를 수가 없어요. 가수로서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로망일 수도 있는데. 제 작은 목표가 있다면 3곡을 모두 저의 노래로 부르는 거예요. 노력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아요.”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 트위터 @mk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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