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비상구열 자리는 넓어서 더 비쌉니다" 안전불감증 논란
입력 2014-07-04 07:02 

# 1985년 8월 22일 이륙을 위해 맨체스터 공항 활주로를 달리고 있던 브리티시 에어투어즈 소속 보잉 737-236 항공기의 왼쪽 날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 붙은 엔진을 본 승객들은 반사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비상구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륙을 포기하고 활주로에 멈춰선 항공기 내부는 서로 먼저 나가려는 승객들로 아수라장이 됐고 곳곳에서 복도나 의자 사이에 승객들이 끼였다. 결국 비교적 빠른 초기 대응에도 불구하고 131명의 승객 가운데 53명이 사망했다. 원래 이 항공기는 130명이 하나의 비상구로 90초만에 탈출할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4명의 객실 승무원이 공황 상태에 놓인 130명의 승객을 통제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최근 국내 저가 항공사들도 비상구열 좌석에 대한 추가 과금에 나서면서 적절성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자리는 항공 사고가 발생하면 승무원과 함께 다른 승객의 탈출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좌석인데 이런 취지를 무시하고 단순히 넓고 편한 자리로만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고시 승객들의 탈출을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해 넓게 만들어 놓은 자리를 상술로 이용한다는 지적이다.
3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제주항공은 지난 4월부터 항공기 맨 앞좌석(Bulk Seat)과 비상구열 좌석(Emergency Exit Seat)에 대해 5000원에서 2만원의 추가 요금을 받고 있다.

진에어 등 일부 저가 항공사들도 제주항공처럼 고객 선호도가 높은 이 좌석에 대해 추가 요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이미 에어아시아, 피치, 세부퍼시픽 등은 이같은 요금 체계를 갖추고 있다.
비상구열 좌석은 다른 좌석에 비해 앞뒤 간격이 넓어 다리를 쭉 펴고 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승객들이 비상구를 통해 기내에서 탈출해야 하는 상황을 대비해 다른 자리보다 더 넓게 만들어 둔 것이다. 이 때문에 비상구열 좌석은 여행객들에게 최고의 명당이다. 반면 비상구를 가릴까봐 시트를 뒤로 젖히지 못하게 해둔 비상구열 앞 좌석은 가장 안 좋은 자리로 꼽힌다.
문제는 이 자리에 앉는 승객들에게는 항공 사고시에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승객 대피를 도와야 할 무거운 의무가 생긴다는 점이다.
비상구열 좌석에 앉은 승객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자세한 규정은 항공사마다 다소 상이하지만 일반적으로 ▲승무원이 비상구를 완전히 개방하기 전까지 다른 승객들을 제지할 것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기체의 외부가 안전한 것을 확인한 후 비상구를 조작하여 개방할 것 ▲탈출 슬라이드가 펼쳐진 후 다른 승객들을 신속하게 탈출시킬 것 ▲탈출 후에는 승객들이 신속하게 기체에서 멀리 피난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다. 결국 비상구열 좌석에 앉은 승객은 가장 마지막에 탈출하는 승객이 된다.
제주항공도 비상구열 좌석을 15세 이상에게만 판매하고 한국어나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 또는 임산부에게 판매하지 않고 있다.
대형 항공사들은 사전 예약 때는 이 자리를 비워두었다가 현장에서 건장한 20~30대 남성에게 안내사항을 설명하고 비상구열 좌석으로 옮기게 한다.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규정도 까다로운 편이어서 건장한 젊은 남성이라 하더라도 자녀나 부인, 고령자 등 유사시에 챙겨야 할 다른 동반인이 있는 경우 이 좌석에 앉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승객 전체의 안전과 직결되는 비상구열 좌석을 단지 넓다는 이유로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은 저가항공사의 안전 불감증 탓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비상구열 좌석에 더 높은 요금을 매기는 것 자체가 승객의 안전의식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여행 관련 커뮤니티에는 '다리가 불편한데 비상구열 좌석을 어떻게 예약할 수 있느냐' 등 비상구열 좌석을 단순히 넓은 좌석으로 오해하는 글도 자주 올라온다.
또 사고시 자기 희생을 전제로 좌석에 앉는 승객에게 요금을 더 받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비판도 있다.
한 대형 항공사 관계자는 "탈출시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비상구열 좌석 승객은 의자 밑이라도 바닥에 짐을 놓아두면 안 되는데, 돈을 더 내고 탄 승객에게 승무원이 짐을 치워달라고 하면 당연히 컴플레인이 들어오지 않겠느냐"라며 "저가항공사의 경우 선착순으로 좌석을 배정하다보니 그 자리에 여자나 노인이 앉아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설마 사고가 나겠어'라는 안전의식 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매경닷컴 고득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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