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직장人직장忍]자꾸 제 볼펜 빌려가는 부장님 이제는 제발…
입력 2014-06-09 11:31 

물산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송지연(28·여· 이하 가명)씨는 직장생활 1년 반만에 특이한 버릇이 생겼다. 자리에 앉을 때마다는 물론 일하는 도중에도 수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리를 하는 것이다. 그는 서랍이 잘 닫혀 있는지 포스트잇, 가위, 커터칼 등은 제 자리에 있는지 업무 중간중간 확인한다. 선임에게서 딴 짓을 한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일할 때는 너무 자주 서랍을 여닫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사이사이 최대한 눈알을 굴리며 책상 위를 살핀다. 송씨는 "긴장을 풀면 늘 사라지는 물건 때문"이라면서 "회사 물건인데 몇 번이나 사라져 상사에게 칠칠치 못해 보일까봐 무척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내가 물건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물건이 없어지는 거라니까요"
송씨는 기자를 향해 "내가 물건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고, 물건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송씨의 자리를 지나가던 부장이, 송씨의 업무를 봐주기 위해 온 대리가, 잠깐씩 빌려쓰는 볼펜과 가위 등은 누가 가져갔다고 할 수 없게 어느 새 사라져 버린다. 스탬플러 등의 사무실 용품은 회사가 지급하기 때문에 없어질 때마다 새로 신청해서 받아야 한다. 신입에겐 여간 눈치가 보이는 일이 아니다.
송씨는 "개인 물품이면 다시 사서 채워넣겠는데 회사 물품이어서 서류에 기재해야 하고 기록에도 남아 곤혹스럽다"면서 "부서 내 막내이기 때문에 선임이 종종 '가위 좀 빌려줘', '커터칼 있어?'라고 묻고 빌려가거나 말도 없이 자리에서 꺼내가다보니 주변에 묻고 찾아봐도 누가 가져갔는 지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그는 몇 번 회사 내 사무용품 전문점에 들러 자비를 들여 용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사무용품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회사로 향하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송씨는 "이제 일은 어느정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막내이기 때문에 사무실 눈치가 보인다"며 "내가 실수한 게 아닌 거 같은데 하소연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전했다.
◆"범인은 청소요정…이름 써놓기 했더니"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는 최자연(31·여) 대리의 부서는 자주 없어지는 물품에 결국 결단을 내렸다. 부장의 지시 아래 A4 용지를 제외한 사무용품 구입에 부서가 일정 금액을 지원하고 이후 분실에 대해서는 개인이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회사 용품이 있지만 아기자기한 사무용품을 좋아해 개인이 사서 모으던 최 대리는 박수를 쳤다. '청소 요청'탓만 하던 사무실 분위기도 많이 바꼈다.
최 대리는 "개인적으로 키티 용품을 좋아해 키보드며 키패드 등을 자비로 바꿨는데 회사에서 사무용품 지급을 현금으로 준다고 해서 기뻤다"며 "나뿐만 아니고 부서 내 동료들이 마음에 드는 사무용품을 구입한 뒤 이름을 써놓는 게 자연스러워 졌다"고 말했다.
우스운 사건도 발생했다. 자신의 이름을 영자로 적어놓다 보니 "CEO", "PMI", "MEN" 등 평소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동료의 영자가 눈에 띈 것이다. 'CEO 것은 건드리면 안 돼', 'MEN이라고 써져 있는데 왜 여자가 써?' 등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도 생겼다.
바뀐 점은 또 있다. 개인의 취향이 있다보니 사무용품만 보고서도 '아 이게 누구 물건이겠다'는 유추가 가능해진 것이다. 회의실이나 탕비실 등에 개인 용품이 있으면 서로 가져다 주고 챙긴다.
최대리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사무실이고 그런 만큼 개인 물품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면서 "그런데도 몇몇 물품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개인 용품을 신경써서 관리해야 하는 게 불편한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공동 물품이라고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고 지원을 해주되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고 설명했다.
해당 부서의 박영호(45·남) 부장은 "우리 부서에서 사무용품 신청건이 많을 때 지적을 하는 정도였는데 이와 관련해 불만이 많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며 "누가 내 물건을 갖다 쓴다는 것은 입장바꿔 생각해 보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어서 회사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정화 신경정신외과 전문의는 "사무실 용품에 민감하게 반응할 경우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고, 그저 일상적인 일로 치부하기에는 누군가 꼭 피해보는 일이 생기는 것이 개인 용품의 문제"라면서 "위의 사례처럼 일정 금액을 지원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부과하거나 공동 사무용품은 특정 장소에서만 사용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피해사례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상사나 동료가 물건을 빌려가서 잃어버리거나 무신경하게 대응하는 게 지속될 경우 속앓이만 하지 말고 분명하게 얘기하거나 상대가 빌려갈 때 '저도 사용해야 하니 언제까지는 꼭 갖다 주세요'라고 말해 돌려받는 시간을 특정받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매경닷컴 배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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