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정완진의 The CEO] "국내뿐 만 아니라 해외에도 우리 문화를 알리고 싶습니다." (주)질경이우리옷 이기연 대표를 만나다.
입력 2014-04-30 15:26 
[정완진의 The CEO](주)질경이우리옷 이기연 대표 / 사진=MBN
[정완진의 The CEO] "국내뿐 만 아니라 해외에도 우리 문화를 알리고 싶습니다."
(주)질경이우리옷 이기연 대표를 만나다.

(주)질경이우리옷 이기연 대표는 우리 문화가 설 곳을 찾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우리문화 수호자' 입니다. 그녀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며 이를 후대까지 계승해 (주)질경이우리옷를 진짜 명품 브랜드로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그녀의 큰 꿈을 위한 노력의 발자취를 MBN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직접 만나서 들어봤습니다.



Q.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제가 예체능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창시절 무용과 연극을 배웠어요. 특히 한국 무용 등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이런 것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무척 괴로웠습니다. 학교에서는 서양 미술만을 높이 평가하고 가르쳤습니다. 학생들도 사대주의적인 사고로 서양 문화에 심취해 알 수 없는 단어의, 심지어는 민망한 영어 단어가 쓰여 있는 티셔츠도 멋 인양 당당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나름대로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연극 동아리에 들어 우리 문화에 대한 공연을 하고, 탈춤 동아리를 만들어서 탈춤을 공연하고 연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84년 이런 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대중들에게 우리 미술에 대한 우수성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두렁'이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민중미술운동에 뛰어들었죠. 거기서 우리 옷 입기 운동과 같은 활동을 했어요.

Q. '우리 옷 입기 운동'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요?

알 수 없는 영어 문구가 잔뜩 쓰여 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괴기한 영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아름다운 우리 그림과 글을 넣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움직이는 그림 전시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즉시 동대문으로 가 무늬 없는 흰색 티셔츠를 구입해 판화에 우리 그림과, 글을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우리의 것을 잃어가고 있는 계층이 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대학로에 가서 그 티셔츠를 판매했어요. 사실 판매라고 표현했기만 티셔츠 값만 받고 진행했어요. 당시 우리 옷 알리는 목적 외에 수익 사업에는 관심이 없으니 홍보 자금은 항상 부족했어요. 그래서 강연이며 원고 작성, 삽화 그리기... 많은 부수적인 일들을 해야 했죠.

Q.그렇게 우리 옷 입기 운동을 하다가, 생활 한복을 사업화 하게 된 이야기도 궁금해요.

우리 옷을 계속 연구하다가 진정한 우리 옷을 만들려면 재료 또한 우리 것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방으로 천연 염색을 전공하는 교수님들을 찾아보다가, 징광에 있는 교수님을 발견하고 곧장 징광으로 내려갔죠. 그분은 천연 염색뿐만 아니라 한복디자인의 대가이기도 하셨어요. 그 분께 그 두 가지를 배우니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든 우리 옷을 탄생시킬 수 있었어요. 그때마침 산업자원부에서 전통 의상 연구 프로젝트를 함께할 기업을 모집했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자세히 알아보니 참여 조건이 '주식회사'여야 하더군요. 그래서 '민족생활문화연구소'를 법인화 해 (주)질경이우리옷으로 탄생시켰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한복 입는 날' 지정을 하고 이런 흐름에 각종 언론에서는 우리 옷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옷에 관한 관심도 커졌고요. 그야말로 제가 만들자고 결심한 '생활한복'의 전성기였어요. 여러 곳에서의 강연 제의 백화점의 입점 문의 등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죠.


Q.'생활한복'의 유행으로 자연스럽게 경쟁업체도 생겨났을 텐데.

네. 우후죽순처럼 여러 자영업자들, 기업들이 생활한복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옷을 많이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과는 달리 생활 한복을 돈 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업체들이 많았습니다. 옷의 질을 떨어뜨려 이익을 남기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생활한복이 굉장히 저급한 옷인 것처럼 대중들에게 보여 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제가한 디자인을 베껴 옷을 생산하고, 저의 특허를 취소해 달라며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만든 생활한복이 사실은 우리 전통 옷이 아니라 '빨갱이 옷'이라는 소문을 퍼트리기도 하고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저희 생활한복을 평가받고 질을 입증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해외에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Q. 해외시장에서 당시 생활한복에 대한 반응이 어땠나요.

여러 의류업체들이 참가한 박람회에서 한 독일 업체가 큰 관심을 보였어요. 그들이 추구하는 천연주의와 저희 (주)질경이우리옷과 비슷하다며 반가워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옷을 자신들이 팔아 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 주변국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신문 1면에 실리는 등 해외 언론에서도 (주)질경이우리옷을 소개했습니다. 많은 관심을 덕분에 3년 연속으로 세계적인 패션쇼인 '쁘레따뽀르테'에 참여 할 수 있었어요. 처음에 저와 같이 박람회에 참여했던 국내 기업들은 저의 이런 행보에 무척 놀라워했죠. 전 자신감을 갖고 이제 다시 국내 시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Q. 그때 한국 시장에서 (주)질경이우리옷의 상황은 어땠나요?

한국에서의 영업은 일반적인 회사의 영업을 했던 사람들에게 맡겼었습니다. 그들은 대리점을 늘리고, 많은 옷을 판매해 이익을 남기는 것을 성공한 영업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닌데 말이죠. 전문성 없는 대리점들이 전국에 세워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주)질경이우리옷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리점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원성에 마음은 아팠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견디면 진정한 우리 옷의 가치를 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인내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대리점 정리를 하니 47개의 매장에서 7개의 매장만 남게 되었더라고요. 그렇게 사업 재정비를 한 뒤 새로운 위한 홍보 방법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문화생활에 우리 옷을 접목하여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연극이었는데요. 제가 의상 협찬을 해준 연극들이 성공했고, 많은 사람들이 (주)질경이우리옷의 공이 컸다는 말에 그간 힘든 시간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Q. 무봉헌을 세우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우리 것을 알리는데 가장 힘쓴 부분은 의식주 중에 '의'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과 '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의식주를 모두 우리의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곳을 꿈꿨는데, 그 이상적인 공간을 무봉헌으로 실현시켰습니다. 무봉헌에서는 우리 전통 옷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 음식, 전통 한옥 등을 사람들이 직접 체험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또 지금까지 저희 브랜드를 사랑해준 고객들에게 바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곳에서 (주)질경이우리옷 사진 콘테스트를 열어 시상을 진행하기도 하고 고객 감사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Q. 앞으로의 꿈이 있으시다면.

저는 예술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그 생명을 더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문화와 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배경과 가치, 철학이 배제된 것은 진정한 명품이라고 할 수 없죠. (주)질경이우리옷이 이 진정한 명품을 선도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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