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대한민국 커피업계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커피 올림픽'이라 불리는 전 세계 바리스타들의 축제의 장,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orld Barista Championship, WBC)에서 (주)커피명가 안명규 대표가 한국인 처음으로 기조연설자로 나선 것. 이는 커피시장에서 대한민국의 위상과 역할이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1980년대 후반부터 커피에 대한 연구를 이어온 (주)커피명가 안명규 대표의 커피 이야기를 듣기 위해 MBN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직접 그의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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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WBC,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이야기부터 여쭙고 싶어요. 여기서 기조연설을 하신 게 국내 커피업계에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요?
올림픽은 스포츠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커피에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WBC(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World Barista Championship)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 대회는 세계 바리스타들의 축제의 장으로 바리스타로서의 역량을 겨루는 대회입니다. 당시 제가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SCAK)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WBC에서 기조연설을 맡게 된 것은 정말 커피업계에서도 획을 그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과거만 하더라도 커피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거든요. 한국 커피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Q.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커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이 노력해오셨기 때문인데... 창업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기호품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전 세계 어디보다 유별나죠. 하지만 제가 커피를 처음 시작하게 된 1980년대 말만 하더라도 원두커피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의 음용실태라고 하자면, 대부분 인스턴트커피를 많이 마셨고 원두커피를 마신다고 하더라도 신선하지 않은 것을 마셨습니다. 저는 그게 참 안타까웠어요. 저걸 어떻게 바꿀 수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된 것이 창업의 계기입니다.
또한 그 당시 커피를 바라보는 시각도 굉장히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산업, 커피문화라는 것이 별로 내세울 게 없었죠. 제가 커피전문점을 한다고 하니 ‘사내자식이 할 게 없어서 그런 거나 하냐.라는 비아냥거림도 참 많이 들었어야 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커피숍이라고 하면 어두침침한, 지하의 다방을 많이 떠올리던 때거든요. 제가 만들고 싶었던 커피 매장은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잘 인정해주려 하거나, 알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선입견이 무서운 것이죠.
커피도 스포츠나 예술만큼이나 귀한 소재이고,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올려놓을 수 있는 소재인데 왜 그러지 못할까. 여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를 비롯해 커피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요. 기존의 커피 전문점의 인식을 완전히 깨어버리는 그런 공간을 만들자, 이 마음이 어쨌든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Q. 창업 처음 하신 게 1990년. 당시 차별화 전략은?
커피의 실질적 가치는 맛과 향에 있습니다. 커피의 맛과 향이 제대로 나게 하려면 볶아야 하는데,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커피를 볶는다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커피를 볶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매장을 방문한 손님께 가장 신선한 커피를 만들어드리기 위해 ‘주문 즉시 커피를 갈고, 한 잔씩 추출한다.는 원칙을 꼭 지켰습니다. 세 사람이 와서 세 잔을 주문해도 한 잔씩 따로따로 만들었죠. 누군가는 ‘커피를 꼭 그렇게까지 만들 필요가 있냐.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몫이고 저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외에도 공간의 측면에서는 실내금연 조치도 취하고, 실내에 연못도 만드는 등 밝고 환한, 휴식의 공간으로서 커피 전문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매장 내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문화를 심기 위한 노력도 했고요. 이런 노력들 덕분에 커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많이 개선되기 시작했죠.
Q. 로스팅 기계도 직접 만드셨다고?
말씀드렸다시피, 당시만 하더라도 커피를 볶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커피를 가르쳐주는 곳도 없었고, 커피를 가공할 수 있는 기계조차 없었죠. 당시만 하더라도 프라이팬으로 간간이 커피를 볶아서 사용했는데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로스팅 기계를 일본, 유럽 등 당시 커피 선진국으로부터 수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국내에 그럴 듯한 로스팅 기계가 없다는 것이 제 도전의식을 자극했습니다. 국내 커피시장을 발전시키려면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시작의 물꼬를 제가 텄죠. 그렇게 로스팅 기계를 만드는데 들인 시간만 무려 7년이었습니다. 정말 많이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그만큼 뿌듯함도 컸습니다.
Q. 남들이 안하던 것들을 최초로 시도를 해오시면서 커피 시장을 개척해오셨는데요. 화려한 이력, 성과 뒤엔 항상 보이지 않는 노력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잖아요? 대표님은 어떠셨어요?
개척을 한다는 것은 짜릿함도 있지만 남다른 고통도 있습니다. 바리스타라는 개념이 지금이야 워낙 누구나 잘 알고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시절 ‘커피업에 종사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거든요. 인정도 잘 안 해주고, 멸시하려 하고.. 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커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는다는 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또한 커피 ‘생두를 직접 원산지에서 구해오기 위해 전 세계 농장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는데요.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농장에 가서 커피를 구매하겠다고 하면 사기꾼 취급도 많이 받았죠. 그럴 때마다 찾아가고, 찾아가고, 또 찾아가서 불신을 해소하려 노력했습니다. 로스팅 기계를 만들면서 제가 신문에도 나고 그랬는데, 그런 것들을 스크랩해서 가져가서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믿어도 됩니다.라고 설득하기도 했었죠.
Q. 그래서 지금은 전 세계 1등 농장과 독점 계약까지 따내셨죠?
세계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과테말라 엘 인헤르또 농장과 케냐 게뜸브위니 농장과의 계약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최근에 독점계약한 과테말라 엘 인헤르또 농장은 과테말라 북쪽 지방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커피쟁이라면 누구든지 그 커피를 맛보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는 커피입니다. 국내외 유수한 커피 회사들이 그곳과 계약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요. 저는 1990년대부터 전 세계 커피 농장들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한 5년 정도 그 농장에 끈질긴 구애를 한 끝에 독점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커피쟁이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결국 좋은 커피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저는 고객들에게 전 세계 1등 커피를 맛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죠.
Q. 이렇게 커피에 열정을 쏟아오신 게 벌써 30년 가까이 되셨는데... 프랜차이즈는 약 30여개 정도죠? 적다면 또 적은 수인데, 프랜차이즈 운영에도 남다른 원칙이 있으신가요?
저는 양적 확장보다는 질적 확장을 중요시 여깁니다. 점포 하나가 100개, 1000개 같은 에너지 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제가 프랜차이즈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맛 때문이었습니다. 전 세계 커피농장과 계약을 하려면 꽤 많은 물량을 들여와야 계약이 가능하거든요. 결국 자체 소비를 늘려야겠다는 생각에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프랜차이즈 운영 원칙에 남다른 것이 있다면, 저는 복사기에서 찍어낸 듯한 매장은 절대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공간마다 각각 고유의 특성과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매장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상권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려 하죠. 예를 들어 병원 주변에 있는 매장이라면 디카페인 메뉴를 더 많이 늘리고, 인테리어도 거기에 맞게 최대한 편하고 아늑하게 꾸미는.. 그런 식으로요.
Q. 지금 대한민국의 커피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커피시장이 굉장히 발전되었는데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아요?
네, 현재 한국만큼 커피 문화 산업이 발전된 곳이 없습니다. 또 이젠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 커피문화는 인정을 받고 있고요. 그런 부분에서 참 뿌듯합니다. 커피를 하려는 후배들도 많이 생겨났고, 이제는 누구나 커피업에 종사하고 싶어 하니까요. 한 우물을 파니, 제가 원하는 바를 결국엔 이루게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커피의 위상을 높게 세워줄 많은 후배들이 나왔으면 좋겠고, 저 또한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