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그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게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 얘기는 그의 태어남과 죽음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대략 18세기 초반에 태어나서 후반쯤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도화서 소속으로 국가의 녹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그가 어디서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솜씨만큼은 일품이었는지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뛰어난 그림솜씨는 그의 삶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살기로 마음만 먹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세상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이름인 북(北)을 나눠서 칠칠(七七)이라고 스스로 불렀고, 호생자(毫生館), 즉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자조적인 뜻을 지닌 호를 지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렀다.
최북의 기행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했다. 금강산의 구룡연을 구경하고 잔뜩 술을 마시고는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며 연못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함께 있던 일행이 구해주어서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밖에도 어느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을 거절한 후, 협박을 당하자 남이 손대기 전에 내가 스스로 손을 대야겠다며 자신의 한쪽 눈을 스스로 찌른 일화도 잘 알려졌다. 늘 술에 취해있어서 하루에도 대여섯 되의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아예 술을 파는 사람이 집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럼 최북은 책과 종이들로 술값을 치렀다. 이렇게 술을 마시느라 가산을 탕진하자 전국을 떠돌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가는 곳마다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때에도 괴팍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림 값이 적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찢어버렸다. 반대로 비싼 값을 주면 오히려 그림을 볼 줄 모른다고 타박을 주었다. 그의 그림을 사려고 했던 이들이 대부분 양반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대단히 무례하고 오만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나 술주정뱅이로 여겼다. 하지만, 시를 잘 지었으며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성호 이익이 송별시를 지어주었다는 점을 봐서는 미친 화가라는 당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옥죄는 현실을 잊고자 술과 광기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며 학문을 숭상했던 조선에서는 최북같이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화가는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그의 예술은 당대의 그 어떤 양반들보다 오래 기억되고 있다. 붓이 아닌 손가락 혹은 손톱으로 그린 풍설야귀인도를 보면 헝클어지고 불타오르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두운 밤,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옆을 지나 깊은 계곡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은 작게 그려져 있고, 초가집과 싸리담장은 물론 길옆의 마른 나무들 모두 뒤틀리고 기울어져 있다. 조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최북의 비명이 들린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활기를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웠다. 새로운 문화는 양반들의 사랑방이 아니라 여항(閭巷), 즉 백성이 사는 골목길에서 피어났다. 그 중심에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과 백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여전히 낡은 유교 이념을 내세워서 새로운 문화를 외면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최북은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도 다르니 마땅히 조선의 화가는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쩌면 그의 광기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상에 대한 외침이자 경고였을 수도 있다.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알려 지지 않는다. 일설에는 추운 겨울날, 술에 취해서 길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그대로 얼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광기에 찬 불우한 삶이 멈춘 것이다.
정명섭(소설가)
케이팝(K-POP)으로 대표되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어땠을까?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춤과 노래로 대표되는 유흥이 억압당했다. 시장 바닥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전기수 부터 시와 붓글씨로 양반과 어깨를 나란히 한 기생까지 조선시대의 예술가들은 모두 천하고 손가락질 받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재미와 흥미를 찾는 인간의 마음은 이런저런 억압을 뚫고 가지를 뻗었다. 조선의 엔터테이너들은 대부분 불행하고 손가락질 받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가던 일반 민중들은 그나마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그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게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 얘기는 그의 태어남과 죽음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대략 18세기 초반에 태어나서 후반쯤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도화서 소속으로 국가의 녹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그가 어디서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솜씨만큼은 일품이었는지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뛰어난 그림솜씨는 그의 삶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살기로 마음만 먹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세상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이름인 북(北)을 나눠서 칠칠(七七)이라고 스스로 불렀고, 호생자(毫生館), 즉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자조적인 뜻을 지닌 호를 지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렀다.
최북의 기행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했다. 금강산의 구룡연을 구경하고 잔뜩 술을 마시고는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며 연못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함께 있던 일행이 구해주어서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밖에도 어느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을 거절한 후, 협박을 당하자 남이 손대기 전에 내가 스스로 손을 대야겠다며 자신의 한쪽 눈을 스스로 찌른 일화도 잘 알려졌다. 늘 술에 취해있어서 하루에도 대여섯 되의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아예 술을 파는 사람이 집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럼 최북은 책과 종이들로 술값을 치렀다. 이렇게 술을 마시느라 가산을 탕진하자 전국을 떠돌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가는 곳마다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때에도 괴팍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림 값이 적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찢어버렸다. 반대로 비싼 값을 주면 오히려 그림을 볼 줄 모른다고 타박을 주었다. 그의 그림을 사려고 했던 이들이 대부분 양반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대단히 무례하고 오만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나 술주정뱅이로 여겼다. 하지만, 시를 잘 지었으며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성호 이익이 송별시를 지어주었다는 점을 봐서는 미친 화가라는 당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옥죄는 현실을 잊고자 술과 광기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며 학문을 숭상했던 조선에서는 최북같이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화가는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그의 예술은 당대의 그 어떤 양반들보다 오래 기억되고 있다. 붓이 아닌 손가락 혹은 손톱으로 그린 풍설야귀인도를 보면 헝클어지고 불타오르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두운 밤,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옆을 지나 깊은 계곡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은 작게 그려져 있고, 초가집과 싸리담장은 물론 길옆의 마른 나무들 모두 뒤틀리고 기울어져 있다. 조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최북의 비명이 들린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활기를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웠다. 새로운 문화는 양반들의 사랑방이 아니라 여항(閭巷), 즉 백성이 사는 골목길에서 피어났다. 그 중심에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과 백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여전히 낡은 유교 이념을 내세워서 새로운 문화를 외면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최북은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도 다르니 마땅히 조선의 화가는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쩌면 그의 광기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상에 대한 외침이자 경고였을 수도 있다.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알려 지지 않는다. 일설에는 추운 겨울날, 술에 취해서 길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그대로 얼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광기에 찬 불우한 삶이 멈춘 것이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