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박정선 기자] 10살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돌 가수냐, 트로트 가수냐. 한 가지 더하자면 아이돌이라 함은 국내 3대 기획사 중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에서의 제안이다. 이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트로트가수를 택했다. 사실 어린 나이인지라 나의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트로트가수 양지원. 그는 유치원도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할아버지의 모임에 따라가 밥상을 무대삼아 노래를 불러댔다. 그 어린 나이에 뭘 알겠냐마는 그저 과자 하나 사먹을 수 있는 천 원짜리 한 장의 맛을 알게 된 이후 온갖 끼를 부렸다고. 이후 다양한 축제에 따라다니며 노래를 하던 차에 SM 관계자의 눈에 들어 오디션 제의를 받았고, 그의 가수 인생이 시작됐다.
SM에서 오디션을 보고 최종 발탁이 됐어요.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태였죠. 그런데 그걸 제쳐두고 ‘남가람 가요제에 나가 청소년부 최우수상을 받았고, 정의송 선생님의 제안을 받고 트로트에 입문하게 됐어요. 10살의 나이에 나훈아 선생님의 콘서트 DVD를 보고, 장윤정 누나의 ‘짠짜라를 듣고 트로트의 매력에 빠진 거죠.”
물론 아쉬움은 있었다. 당시 SM과 계약을 했다면 한류아이돌 슈퍼주니어의 멤버로서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나이에 맞는 음악들을 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 트로트를 하길 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유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벽을 허물 통로를 만들자는 원대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란다.
2007년 인우 소속가수로 앨범을 발매한 그는 일본 레코드사의 제안으로 일본활동에 돌입했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떠나게 된 일본에서의 3년은 순탄치 않았다. 가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3년간 일본어 공부에 몰두했고, 마이크 하나만 들고 지하철 역 등지에서 노래를 하고, 자신을 직접 홍보하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들긴 했지만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렇게 했는데 일본에서 안 되면 한국에서도 안 될 거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첫 방송이 잡히고 사람들이 조금씩 인정을 해주시더라고요. 2011년 앨범 냈을 때도 5000장이 팔렸어요.”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반한류 역풍으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은 모두 취소됐다. 결국 그는 트로트계의 문익점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국내 대중들에게 양지원은 ‘트로트 신동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수련에 나섰다.
지리산 폭포 밑에서 판소리를 배웠어요. 그렇게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두 달여를 보내고, 목이 트인 상태에서 꺾기창법을 위해 민요도 배웠어요. 또 국악 장단과 악기도 배웠죠. 그렇게 하다 보니 한국식 발성이 조금씩 돌아오더라고요.”
엄청난 노력 끝에 그가 내놓은 곡은 슈가트로트라는 장르의 곡 ‘아야야(A-Ya-Ya)였다. ‘가요무대뿐만 아니라 아이돌이 대거 출연하는 KBS2 ‘뮤직뱅크 등 지상파 순위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그는 방송에서 1위를 해보자”는 강한 의지를 내비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반응이 좋아요. 의도한 대로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귀여운 안무가 섞여있어서 특히 유치원 선생님들이 좋아하더라고요. 팬층이 넓어졌어요.”
그는 트로트를 젊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큰 목표를 가지고 가요계의 문을 두드렸다. 달콤한 음식 같은 느낌으로 세대 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양지원은 올해의 목표로 신인상을 받고 싶다고 당차게 말하더니, 하나의 산을 넘어 훗날 연말대상까지 노려보고 싶다고 했다. 음악 이야기에 있어서 시종일관 진중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갑자기 이 말은 꼭 하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근데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이런 귀여운 춤 때문인지 사람들이 오해를 하더라고요. 저 여자 좋아해요(웃음).”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올해로 스무 살이 된 트로트가수 양지원. 그는 유치원도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할아버지의 모임에 따라가 밥상을 무대삼아 노래를 불러댔다. 그 어린 나이에 뭘 알겠냐마는 그저 과자 하나 사먹을 수 있는 천 원짜리 한 장의 맛을 알게 된 이후 온갖 끼를 부렸다고. 이후 다양한 축제에 따라다니며 노래를 하던 차에 SM 관계자의 눈에 들어 오디션 제의를 받았고, 그의 가수 인생이 시작됐다.
SM에서 오디션을 보고 최종 발탁이 됐어요.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태였죠. 그런데 그걸 제쳐두고 ‘남가람 가요제에 나가 청소년부 최우수상을 받았고, 정의송 선생님의 제안을 받고 트로트에 입문하게 됐어요. 10살의 나이에 나훈아 선생님의 콘서트 DVD를 보고, 장윤정 누나의 ‘짠짜라를 듣고 트로트의 매력에 빠진 거죠.”
물론 아쉬움은 있었다. 당시 SM과 계약을 했다면 한류아이돌 슈퍼주니어의 멤버로서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나이에 맞는 음악들을 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 트로트를 하길 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유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벽을 허물 통로를 만들자는 원대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란다.
2007년 인우 소속가수로 앨범을 발매한 그는 일본 레코드사의 제안으로 일본활동에 돌입했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떠나게 된 일본에서의 3년은 순탄치 않았다. 가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3년간 일본어 공부에 몰두했고, 마이크 하나만 들고 지하철 역 등지에서 노래를 하고, 자신을 직접 홍보하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들긴 했지만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렇게 했는데 일본에서 안 되면 한국에서도 안 될 거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첫 방송이 잡히고 사람들이 조금씩 인정을 해주시더라고요. 2011년 앨범 냈을 때도 5000장이 팔렸어요.”
사진=이현지 기자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반한류 역풍으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은 모두 취소됐다. 결국 그는 트로트계의 문익점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국내 대중들에게 양지원은 ‘트로트 신동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수련에 나섰다.
지리산 폭포 밑에서 판소리를 배웠어요. 그렇게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두 달여를 보내고, 목이 트인 상태에서 꺾기창법을 위해 민요도 배웠어요. 또 국악 장단과 악기도 배웠죠. 그렇게 하다 보니 한국식 발성이 조금씩 돌아오더라고요.”
엄청난 노력 끝에 그가 내놓은 곡은 슈가트로트라는 장르의 곡 ‘아야야(A-Ya-Ya)였다. ‘가요무대뿐만 아니라 아이돌이 대거 출연하는 KBS2 ‘뮤직뱅크 등 지상파 순위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그는 방송에서 1위를 해보자”는 강한 의지를 내비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반응이 좋아요. 의도한 대로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귀여운 안무가 섞여있어서 특히 유치원 선생님들이 좋아하더라고요. 팬층이 넓어졌어요.”
그는 트로트를 젊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큰 목표를 가지고 가요계의 문을 두드렸다. 달콤한 음식 같은 느낌으로 세대 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양지원은 올해의 목표로 신인상을 받고 싶다고 당차게 말하더니, 하나의 산을 넘어 훗날 연말대상까지 노려보고 싶다고 했다. 음악 이야기에 있어서 시종일관 진중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갑자기 이 말은 꼭 하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근데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이런 귀여운 춤 때문인지 사람들이 오해를 하더라고요. 저 여자 좋아해요(웃음).”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