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운동권 동료의 자살을 부추긴 '배후 세력'으로 몰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해 온 강기훈(50)씨가 13일 재심을 통해 확정 판결 22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13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1992년 7월 징역 3년이 확정됐던 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1991년 5월 전민련 간부였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자살하자 검찰이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를 자살 배후로 지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 등의 필적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강씨는 자살방조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뒤 이듬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
강씨의 '유서대필 사건'은 당시 당시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며 항의의 뜻으로 잇따라 분신하던 학생들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1월 국과수의 재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김씨가 스스로 유서를 작성한 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에서다.
강씨는 2012년 10월 재심을 청구한지 4년여 만에 재심 개시 결정을 받아 이날까지 다시 재판을 받았다.
대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문에서 "강씨의 유죄 증거로 인용된 증언이 허위로 드러나 재심 사유가 있다"면서도 "과거사위 재감정 결과가 국과수 기존 감정 결과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재심에서는 두 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지난해 12월 강씨의 무죄 주장을 뒷받침하는 감정 결과를 새로 내놓으면서 검찰의 공소사실은 무너지게 됐다.
재판부는 "1991년 당시 국과수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없고 검찰의 다른 증거만으로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공소사실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다만 재판부는 강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부분이 재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의 형을 별도로 선고했다. 강씨는 이미 3년 동안 복역해 재수감되지 않는다. 징역 1년을 초과한 구금일수에 대해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매경닷컴 속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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