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김대호의 야구생각] 김응용 감독의 못 말리는 `신인사랑`
입력 2014-02-11 11:20  | 수정 2014-02-11 11:21
1975년 실업야구 춘계리그. 김응용 한일은행 감독은 경동고를 갓 졸업한 풋내기 유승안(경찰청 감독)을 4번 타자로 기용했다. 당시 한일은행에는 임신근(작고) 강병철(전 롯데 감독) 최남수(작고) 허구연(MBC 해설위원) 우용득(전 삼성 감독) 등 강타자들이 즐비한 그야말로 최강의 타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승안은 큰 덩치에 거친 타격으로 ‘삼진왕의 불명예를 떠안았지만 김응용 감독의 변함없는 믿음 덕분에 이듬해인 1976년 실업야구 홈런왕에 등극했다.

김응용 감독은 1976년 또 하나의 신예를 선보였다. 이번엔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입단한 김용철(전 경찰청 감독)이었다. 김용철은 첫 대회인 춘계리그부터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4번 타자에 이름을 올렸다. 김용철 역시 처음엔 성인무대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곧 장기인 홈런포를 펑펑 터뜨렸다. 김용철은 실업데뷔 2년째인 1977년부터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초고속 성장을 했다.
김응용 감독의 탁월한 ‘안목은 이미 1974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해 한일은행엔 ‘야구천재 임신근이 군 제대 후 복귀했다. 임신근은 1972년과 1973년 해병대에서 2년 연속 다승왕에 오른 불세출의 투수였다. 특히 임신근은 1972년 해병대가 1년 동안 거둔 20승 가운데 18승을 혼자 올릴 정도로 철완을 자랑했다.
김응용 감독은 국내 최고투수인 임신근이 한일은행에 돌아오기 무섭게 타자로 전향시켰다. 그의 타격재능을 일찌감치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운드 대신 타석에 들어선 임신근은 1976년 춘계리그 5할1푼2리, 추계리그 4할4푼의 맹타를 휘둘러 타격왕에 올랐다. 임신근은 한국 실업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다승왕과 타격왕을 모두 거머쥔 선수로 남아 있다.
프로팀 해태 타이거즈를 맡은 뒤에도 김응용 감독의 ‘신인 탐험은 계속됐다. 그 첫 수혜자는 박철우(고양 원더스 코치)였다. 1987년 동국대를 졸업하고 해태에 입단한 박철우는 한 동안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타격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해태 1루에는 요즘말로 ‘넘사벽 김성한(전 KIA 타이거즈 감독)이 버티고 있어 헤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박철우의 재능이 묻혀갈 즈음, 김응용 감독은 기회를 줬다. 대뜸 4번 지명타자 자리를 떠맡긴 것이다. 박철우는 물 만난 고기처럼 타석에서 펄펄 날았다. 박철우는 1989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끌면서 MVP에 뽑혀 김응용 감독의 은혜에 보답했다.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긴 김응용 감독은 채태인이라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발굴했다. 채태인은 미국무대 도전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인야구에 기웃거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김응용 감독은 이런 채태인을 2007년 특별 지명으로 뽑아 타자로 전향시켰다. 채태인 역시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채태인을 빼고 삼성 타선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다.
고희를 넘긴 김응용 감독이 요즘 어린 선수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손자뻘 되는 선수들의 훈련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한지 깊은 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김응용 감독이 뉴페이스에 유독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기존 선수들에 대한 동기부여, 팀 체질개선, 세대교체 등등. 무엇보다 이름값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김 감독의 오랜 철학이 담겨 있다.
한화에선 누가 김응용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명장 김응용 감독에 의한 새로운 ‘스타 탄생을 기대해 본다.
[매경닷컴 MK스포츠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