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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레전드] 백인천, 20년만의 절박했던 귀향…下
입력 2014-01-13 07:50  | 수정 2014-01-13 09:09
…上편에 이어


작은 꿈에서 시작된 수위 타자
일본 진출 이후 백인천은 1군에 이름을 올린 뒤 1 경기만 나가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일본 프로야구는 그에게 꿈의 무대였다. 그리고 1963년 5월 1군에 데뷔, 그날 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날이었다. 도에이 주장의 1000경기 1000안타 기념식이 열린 것. 이를 바라본 백인천은 새로운 목표를 가슴에 품게 됐다. 앞으로 999경기에서 999안타를 치면 1000경기 1000안타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포부였다. 그리고 이는 1000경기 1000안타를 넘어 1500경기 1500안타라는 기록으로 이어지게 됐으며, 1975년에는 타자들의 꿈인 수위타자 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았다.

4번의 올스타전 출장과 올스타 첫 홈런
백인천은 1967, 1970, 1972, 1979년 4차례에 걸쳐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이중 롯데 오리온즈 소속이던 1979년에는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7월 24일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진행된 올스타 3차전에서 백인천은 4회초 다이요 훼일즈의 엔토 가즈히코의 공을 받아쳐 좌측 담장을 넘겼다. 이 홈런은 백인천의 올스타전 첫 홈런임과 동시에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의 통산 150호 홈런으로 기록 됐다. 막연하게 프로야구 선수를 동경해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던 백인천은 일본 프로무대에 크나큰 족적을 남기는 스타로 떠오르게 됐다. 뒤에 보이는 선수는 센트럴리그 1루수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왕정치)다.

국내 후배들에게도 아낌없는 조언을…
1979년 롯데 오리온즈의 가고시마 전지훈련장에는 제26회 세계선수권대회를 대비하기 위한 한국 국가대표팀의 합동훈련이 진행됐다. 당시 최동원, 김봉연, 이만수 등의 스타 선수들이 참가했었는데, 이미 일본프로리그에서 일가를 이룬 백인천은 개인 훈련이 끝난 뒤 한국 타자들을 따로 불러 스윙지도를 해줬다. 사진은 김재박에게 스윙 지도를 해주고 있는 모습

20년만의 귀국, 그리고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은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귀국해 MBC 청룡의 초대 감독이자 선수로 활약했다. 부친상으로 1981년 귀국한 백인천은 한국 프로야구를 발전시켜달라는 주위의 권유로 감독직을 수락했고 이내 4할1푼2리의 타율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백인천의 타율은 국내 야구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록이며 그가 초기 프로야구의 정착을 위한 공로는 아직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백인천은 당시 절박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에서 쌓아온 경력이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커리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러 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신바람 야구의 수장
MBC청룡이 LG트윈스로 바뀐 첫 해인 1990년, 백인천은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있었다. 1983년 이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이 없는 MBC가 1989년 중반 백인천을 또다시 감독으로 선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LG트윈스로 바뀐 이듬해 백인천은 자신이 이끌던 팀을 드디어 우승으로 이끌었다. 김동수 노찬엽 김상훈 등이 타선에서 불을 뿜었고, 김용수 정삼흠 등이 마운드를 지켰다. LG의 신바람 야구의 시작이었다.

뿌듯함과 아쉬움의 공존, 삼성에서의 감독
1996년 삼성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은 이승엽이라는 걸출한 국가대표 타자를 발굴해 냈다. 타격에 조예가 깊던 그는 양준혁과 이승엽 두명의 거포를 두고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당시는 양준혁이 삼성의 독보적인 선수로 발돋움 해 있을 때고, 이승엽은 신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을 시기다. 백인천은 야구에 가장 뛰어난 천부적 재질을 가진 선수로 양준혁을 꼽았다. 다만 스윙의 효율성을 높이려 준비자세의 변화를 요구했지만 시행되지 않았다. 이승엽의 경우 자세를 가다듬는데 성공해 국민타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1997년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감독직을 마무리 하지는 못했지만 국민타자를 발견한 것은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백인천 전 감독은 야구에 미쳤었다. 혹은 중독됐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가지고 미친 듯이 야구에 매진한 결과 한국과 일본 양국의 프로야구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 나가시마 시게오를 동경했던 것도 데뷔 무대에서 1000경기 1000안타를 다짐했던 것도, 뇌경색을 이겨냈던 것도 다 꿈을 가지고 중독에 가까운 노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야구에 대한 이같은 열정은 일흔이 훌쩍 넘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다소 불편해진 몸이 부담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야구를 말하거나 배트를 잡을 때의 눈빛은 지난 시절의 사진들에서 봤던 밝고 즐거운 눈빛 그대로였다.
[lsyoon@maekyung.com]
[사진제공=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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