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12월 30일(06:01) '레이더M'에 보도 된 기사입니다]
#신용등급이 BBB급인 대기업 계열 A건설사는 차환용 회사채 발행을 타진하다 낭패를 봤다. 지난 10월말 국내 한 중소형 증권사와 주관계약을 체결했다가 한 달이 넘도록 인수단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때문이다. 팔리지도 않을 물량을 떠안았다가 자칫 평가손실 입을 것을 우려한 증권사들이 손사레를 쳤던 것이다.
회사채 발행을 미루자니 미국 테이퍼링(양적완화 점진적 축소) 이후 예상되는 국고채 금리 상승세가 큰 부담이 됐다. 회사채 발행을 강행하려던 이 기업은 증권신고서 제출 직전 단계에 결국 포기했다. 대신 만기 도래 직전 급조해 리스크가 큰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발행하면서 가까스로 부도를 막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테이퍼링을 시작한 뒤 금리 상승이 기정사실화하면서 기업들 자금조달 비용이 추가로 상승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3.0019%로 마감했다. 2011년 7월 25일 기록한 3.006% 이래 2년 5개월 만의 최고치로 추가 상승 가능성도 열려 있다. 미 국채금리가 상승하면 회사채 발행금리 기준이 되는 한국 국고채 금리도 동반 상승이 불가피하다.
발행금리가 높아지면 기업 이자비용 부담은 커진다. 그만큼 한계기업은 자금조달이 힘들어지고 건전한 기업활동도 위축돼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다. 미국은 국채 대신 회사채 투자로 이동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이에 따라 선진국처럼 금리에 덜 민감한 하이일드(고수익고위험채권)시장을 활성화시켜 산업과 금융이 시너지를 내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지성 기자]
◆ 멀쩡한 기업도 자금난 우려 커져…불안감 가중
- 건설·해운 등 회사채 자금조달 난망…공기업도 '갸우뚱'
- 동양 다음 타자 누가되나 촉각, 동부 현대 한진 등 내년 대규모 차환 일정 앞둬.
"돈 구할 곳 없는 기업들이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일부 우량 대기업들을 제외한 대부분 기업들은 자금조달 실패로 회사채를 제때 갚지 못해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진 상태다. 멀쩡하던 기업도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데 투자하고 고용할 수 있겠나."
기업들 자금조달 업무를 지원하는 투자은행(IB) 관계자들은 "회사채 시장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며 이같이 입을 모았다. 일각에서는 지난 1998년 벌어진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최악이라는 시각도 고개를 들었다.
올들어 STX그룹이 무너진 데 이어 동양그룹 기업어음(CP) 사태까지 터지자 투자자들은 회사채를 철저히 외면하기 시작했다. 회사채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하인 회사들 발행금리는 치솟았고, 유동성 위험은 한층 커졌다. 이로 인해 기업들 자금조달 사정은 내년에도 나아지기 어렵다는 게 금융투자업계 우려다.
초우량 기업이 아니면 건설·해운·철강·조선업체들은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이 사실상 매우 어려워졌다. CP나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등을 시도하지만 이마저도 쉽진 않다. 한계기업들은 자금조달을 포기하고 알짜 자산을 매각해 부채를 갚으려 하는 실정인데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회사채 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인 이유다.
특히 내년에 대규모 회사채 만기를 앞둔 기업들은 비상이다. 자금조달 마련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위기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동양그룹 이후 유동성 위기설이 불거졌던 일부 기업들은 고강도 유동성 확보 계획을 발표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여건은 녹록치 않다.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던 동부그룹은 3조원 규모 자산매각 등 고강도 자구책을 내놓으면서 시장 우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동부제철·동부씨엔아이(CNI)·동부건설 등 동부그룹 계열사들은 내년 6600억원 규모 회사채 만기가 오지만 상환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금융투자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자구책이 지체되면 역시 안심할 수는 없다.
한진그룹과 현대그룹도 최근 대규모 자산매각 계획을 내놓으며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한진그룹은 1조6000억원, 현대그룹은 현대상선 회사채와 CP를 포함해 총 8000억원 규모 부채를 내년에 상환해야 한다. 현대그룹이 아끼던 현대증권 등 금융계열사 매각까지 불사하는 배경이다. 대한항공과 한진해운 등 한진그룹 주요계열사도 자산매각 등을 통해 5조원 이상 자금을 확보할 요량이다.
정부 신용도를 바탕으로 회사 경영 상황에 비해'손쉽게' 자금을 조달했던 공기업들도 위기이긴 마찬가지다. 특히 일부 지방 공기업들은 부실이 자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기관투자가들이 공사채 인수를 꺼리고 있어서다.
공기업 채권·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 등은 '흥행보증수표'로 여겨졌던 것이지만 강원도개발공사와 인천개발공사 등 일부 공기업이 발행하는 물건은 투자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자금조달 시장 경색이 기업 경영위축으로 이어지고, 다시 자본시장에 악영향을 주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며 "자본시장이 위축되면서 투자와 고용이 줄면 성장률이 정체되는 일본식 불황으로 진입할 수 있어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서태욱 기자]
◆ 회사채시장 양극화 심화…기관투자가 A급 이하 채권 '외면'
- 미매각율 A급 이하 57%, BBB급은 96% 달해…증권사"우량기업 아니면 발행주관 안맡는다"
리테일(소매)용 채권을 활발히 인수해 온 우정사업본부나 지역단위 협동조합들도 최근 내부 인수기준을 AA급 이상으로 올려 잡은 실정이다.
투자자 모집이 어려워지면서 증권사들은 웬만한 우량기업 회사채가 아니면 주관사를 맡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투자금융(IB) 업계에 따르면 현재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을 정상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기업은 삼성ㆍLGㆍ현대차ㆍSK 그룹 등 신용등급 AA급 이상의 일부 초우량 기업들뿐이다.
건설·해운·철강·조선업종에 속한 기업들은 상당수가 회사채를 통한 자금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태다. 대안으로 단기 기업어음(CP)나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등을 시도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다. 회사채 시장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이같은 추세가 지속될 전망이다.
NH농협증권이 올해 11월까지 발행된 A급 이하 회사채의 수요예측 실적을 분석한 결과 152건 가운데 미매각이 발생한 경우는 총 86건으로 전체의 56.6%에 달했다. 또 올해 발행된 BBB급 회사채의 미매각률은 95.8%에 달했으며, A급 회사채 미매각율도 35.7%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될 여지도 많지 않아 보인다. 윤원태 현대증권 연구원은 "지난해와 올해 발행한 2~3년물을 내년에 차환발행할 때 금리가 오르면 비용부담이 커진다"며 "기업 투자규모가 올해와 비슷하고 시장 양극화도 지속돼 비우량·한계기업의 어려움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지성 기자 / 전경운 기자]
◆ 해법은 하이일드채 시장 활성화
- 비우량 기업 회사채 투자매력 올리고…몸사리는 기관도 바뀌어야
현재 국내 기관투자자들 내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회사채 투자가 가능한 등급은 원래 'A-'급이었다. 하지만 등급이 하락하면 처분이 쉽지 않아 실제론 'A0'나 'A+'등급 채권에만 투자하는 실정이다. 거기에 최근 터진 동양그룹 사태로 리스크관리 부담이 커져 사실상 AA급 이상 회사채에만 투자하는 분위기다.
국내 한 대형증권사 DCM(채권발행시장)팀장은 "동양사태 이후 정부가 채권평가손 규제를 강화하면서 연기금 등 주요 기관이 비우량 회사채에 투자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며 "보험사 등의 채권투자도 덩달아 위축돼 물량 소화가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가 회사채 시장을 활성화하려고 차환발행을 지원하는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도입했지만 실효성 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결국 움추려든 회사채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정부 도움에 의존하지 말고 미국처럼 하이일드채(고수익고위험채권)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 모인다.
회사채 시장이 극도로 위축된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하이일드 본드나 하이일드 론 등 비우량 회사채와 연계된 다양한 금융상품이 개발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역발상 투자를 통해 수익을 얻으려는 일부 자문사들이 회사채 시장이 최악인 상황에서 새로운 투자기회를 잡는 하이일드펀드를 내년 초 출시를 목표로 준비중인 점은 고무적이다.
현재 국고채와 회사채간 수익률 격차가 7%대에 달해 투자 매력은 높은 편이어서 회사채 전문가들이 기회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 등이 위탁운용하는 채권펀드는 내부 규정 때문에 하이일드 성격의 회사채 투자가 용이하지 않은 상황이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회사채 시장이 무보증 회사채로 일원화되며 리스크도 커진 만큼 해외처럼 채권발행시 담보보증 관행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형호 한국채권투자자문 대표는 "하이일드시장 활성화가 비우량 기업들 자금난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며 "기업이 투자매력도를 높이고 기관도 등급에만 의존하지 말고 똘똘하게 옥석을 가려 투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상만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비우량 기업들의 은행 차입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고 있다"며 "기업 신용등급의 정확성을 높여 투자자들이 제값을 주고 하이일드 채권에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한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