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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Mr. 전설] 김봉연과 장효조, ‘1983년 그들에겐…’
입력 2013-09-13 06:04 
1983년 해태 타이거즈와 MBC 청룡의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한 해를 마감하는 시상식이 열렸다. 한국시리즈 MVP 김봉연과 페넌트레이스 타격 3관왕 장효조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83년 이들 둘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110년 한국 야구사에서 자신 있게 ‘홈런왕과 ‘타격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선수가 몇이나 될까. 김봉연과 장효조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홈런과 타격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아마와 프로를 통틀어 ‘홈런왕 타이틀을 가장 많이 차지한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김봉연일 것이다. 연세대 1학년인 1973년 동아대전에서 대학야구 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며 그해 대학리그 홈런왕. 1974년 추계대학리그 홈런왕. 1975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홈런왕. 한국화장품 시절인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연속 실업야구 홈런왕. 마지막으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아마추어 시절 3연타석 홈런을 3차례 기록한 선수는 김봉연 밖에 없다.

김봉연은 너도나도 일본야구를 받아들여 다운스윙이 교과서로 인식되던 당시 한국야구에서 헬멧이 벗겨질 만큼 큰 어퍼스윙을 했다. 타격의 이단아로 취급받았지만 그의 홈런본능은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했다.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갖고 있었다.

프로통산 타율 3할3푼1리. 타격왕 통산 4회. 아직도 깨지지 않는 프로야구 기록을 갖고 있는 장효조지만 그의 프로야구 성적은 아마추어 때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대구상고 2학년인 1973년부터 프로입단 전인 1982년 경리단(육군)까지의 10년 통산 타율이 4할을 훨씬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만화 같은 성적이다.
그럼 다시 1983년으로 돌아가 보자.
전기리그를 마치고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이었던 6월 28일. 김봉연은 모처럼 가족과 함께 여수 여행길에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머리와 얼굴을 무려 314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흉터를 감추기 위해 코털을 기른 김봉연은 부상이 채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팀을 한국시리즈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 성적은 19타수 9안타(0.478), 1홈런, 8타점.
김봉연의 ‘코털 투혼은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인간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참가로 1983년 프로야구에 합류한 장효조는 단숨에 타격부문을 휩쓸었다. 타율 3할6푼9리, 18홈런, 117안타. 타율 출루율 장타율 최다안타(비 시상부문) 1위, 홈런 3위의 신인이라곤 믿기지 않는 성적을 올렸다.
그런데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너무 뛰어난 성적이 신인왕의 발목을 잡았다. ‘신인 같지 않은 신인 장효조를 신인왕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1983년의 프로야구는 아웅산 테러사건에 따른 갑작스런 한국시리즈 연기와 후기리그 우승팀 MBC 청룡의 ‘보너스 파문 등 우여곡절이 많았던 해다.
김봉연의 ‘코털 MVP와 3관왕 장효조의 ‘신인왕 탈락도 그 해 단연 핫이슈였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기자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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