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완진의 The CEO] 차별화된 전략으로 골프공 업계의 선두주자로 거듭난 (주)볼빅 문경안 회장
입력 2013-08-09 21:12  | 수정 2013-08-12 09:24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골프공 시장은 외국 브랜드가 장악했었습니다. 그랬던 골프공 시장에서 (주)볼빅의 문경안 회장은 우수한 기술력과 톡톡 튀는 마케팅으로 바탕으로 국내 골퍼들과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며 시장의 선두주자로 우뚝 선 CEO입니다. 시장 점유율 30%, 어느덧 연 매출 400억 원을 바라보며 ‘컬러볼 열풍 이끈 (주)볼빅 문경안 회장의 이야기를 MBN '정완진의 The CEO'에서 직접 들어봤습니다.


문경안 회장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시내로 유학 아닌 유학을 갔습니다.

하루빨리 졸업하고 취직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간절했습니다.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저는 고3 2학기 때부터 취업 준비에 들어갔고, 각고의 노력 끝에 그 당시 최고 인기 기업이었던 종합상사 직물수출부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문경안 회장은 수출입 업무 지원 관리 업무를 담당하며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의 일 처리 솜씨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고 ‘미스터 문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조직 내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사내의 각 부서에서는 그를 탐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주요 부서를 두루 거치며 큰 활약을 펼치던 그에게 이번에는 무역업을 하는 동종업계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었던 문경안 회장은 퇴사를 합니다.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그가 수행하던 업무를 대신할 이를 마땅히 찾지 못해 그가 떠난 빈자리에 세 사람이나 채용할 정도로 후폭풍이 컸다는 후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입사 10년 차에 접어들 무렵, 회사의 상태가 급격이 나빠지면서 그는 직장을 잃고 다른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난감했죠. 나이 마흔 살에 새로운 직장을 찾기엔 부담스러웠으니까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고민으로 보내던 차에 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친구가 저에게 창업 제안을 했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종합상사에서 오래 일한 것, 그리고 무역업과 유통업을 통해 노하우를 쌓은 것이 저에게 있어 가장 큰 밑천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경안 회장은 노하우를 살려 친구와 함께 제철업계와의 인맥을 활용하고 그간 모아둔 돈과 퇴직금을 모두 털어 철강유통업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렇게 회사 운영에 매진한 지 12여년 정도가 흐른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골프공 제조회사 ‘(주)볼빅을 인수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주)볼빅이라면 골프 마니아였던 저도 익히 알고 있었던 골프공 브랜드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이름만 대면 알 정도의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였고 실사를 해보니 충분히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인수를 해놓고 보니, 그의 앞에는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있었습니다.

수출은 적자 상태였고, (주)볼빅에 대한 시각은 저가의 싸구려공이라는 낮은 인식뿐이었습니다.”

문경안 회장은 위기를 떨쳐내기 위해 회사 내에 비상경영을 선포했습니다. 출근 시간을 아침 7시 30분으로 당기며 긴장감을 조성했지만 12명 직원 중 10명의 직원들이 반발하며 퇴사할 정도로 진통이 벌어졌습니다.

겉으로는 강단 있게 추진했지만 막상 분란이 생기니 속으로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견뎌야 할 시련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정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경안 회장은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들로 채우고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그의 비전을 다시 공표하며 하나하나 혁신의 전략을 펼쳐갔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저가의 싸구려볼로 인지되어 있는 (주)볼빅의 공을 고급화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개발해두었던 4피스 제품을 중심으로 생산체제를 바꾸고 고가볼 전략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개발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개발해둔 특허를 잘 조화시켜 결집하는 일이 전부였죠. 제가 직접 필드에서 테스트도 해보고 로봇 테스트, 아마추어 선수들로 이루어진 자문단 테스트를 거치며 공의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4피스 공을 들고 그는 고급볼에 맞는 고가 전략을 펼쳤습니다.

골프공 시장의 80%는 선물 시장으로, 선물의 가치는 가격에 의해 정해집니다. 세계적인 브랜드에 비해 결코 기술력에서 뒤지지 않기 때문에 가격 또한 그들과 동일시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문경안 회장은 전국 골프샵을 직접 순회 영업하며 시장과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전국을 돌며 영업을 펼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가의 이미지를 단숨에 끌어올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 저녁 라운딩에 나간 어느 날이었습니다. 골프를 치다 보니 하얀색의 공이 어둠과 조명에 비쳐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 순간, 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 바로 ‘컬러공 이었습니다.”

사실 컬러공은 저가의 공, 여성들이 치는 공정도로 인식되던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문경안 회장은 그 길로 고급 컬러공 개발에 착수했고, 캐디를 중심으로 컬러볼의 편리성을 알리며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매출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출시 한 달 만에 매출이 15%나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인지도 상승을 확인한 문경안 회장은 더욱 더 (주)볼빅을 알리기 위해 고심하다 프로 골퍼들을 타깃으로 잡았습니다.

프로 골퍼들이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진가를 느끼고 찾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받기란 매우 어려웠죠. 그래서 저는 고민 끝에 묘수를 내놓았습니다.”

바로 ‘1억 원의 상금을 내건 마케팅이었습니다. 대회에서 (주)볼빅 공으로 우승을 하면 현금 1억 원을, 예선을 통과하면 200만 원, 사용만 해도 50만 원을 주겠다는 엄청난 제안이었습니다. 그랬더니 8명의 프로 선수들이 (주)볼빅의 공을 선택했습니다.

곧 이어 배경은 프로가 저희 공으로 홀인원에 성공하면서 곧바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상승세에 힘입어 선수 후원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문경안 회장은 각종 대회 유치와 공격적인 프로 선수 영입, 선수 후원, 아마추어대회 개최 등 다양한 지원을 통해 (주)볼빅의 이름을 알려갔습니다. 그와 함께 (주)볼빅의 매출도 점점 상승했습니다. 볼빅 인수 당시 3.5%에 머물던 시장 점유율은 2011년이 되자 30%로 치솟았고, 수출도 점점 늘어나 약 25개국에 수출 길을 텄습니다.

국내 시장 점유율 1위 및 400억 원 매출 목표 달성을 올해 목표로 삼으며 포부를 드러내고 있는 (주)볼빅의 문경안 회장.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해 멈출 줄 모르는 달리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8월 10일 '정완진의 The CEO'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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