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완진의 The CEO] CEO된 천재 예술가 '몽우 조셉킴'의 예술, 그리고 경영 이야기
입력 2013-01-07 14:15  | 수정 2013-01-07 14:18

열 살 무렵 백혈병과 혈액 암에 걸려, 스무 살도 채 살지 못할 것이라고 판명 받았던 한 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덧 서른여덟 살의 어른이 되었고, ‘21세기 피카소, ‘앞으로 세계미술 100년을 상징할 화가라는 극찬을 받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CEO로 새로운 발돋움을 하고 있습니다. 백혈병, 암도 꺾지 못한 그의 열정과 예술에 대한 탐미정신. 그리고 CEO로 성장하기까지의 스토리를 듣기 위해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김영진 대표를 단독 취재했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아   래>


Q. 김영진 대표님을 두고 ‘몽우 조셉킴이라고 부르는데요. 그 뜻이 무엇인가요?
10대 초중반부터 인사동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전각을 판매했습니다. 그때 외국인 관광객, 컬렉터들을 위해 ‘조셉킵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조셉이라는 단어에 ‘꿈꾸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몽우(夢友) 또한 ‘꿈 친구라는 의미를 담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죠.



Q. 어린 시절부터 미술적 재능이 뛰어나셨다고요?
제가 태어난 집안은 김해김씨 삼현공파 김가 목전각을 조상 대대로 전수해오는 집안입니다. 어린 시절, 저희 아버지 또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목전각을 사진관 내부에 진열해두고 판매하곤 하셨죠. 제 미술적 재능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렸을 때 집안 곳곳에 전각, 그림, 음악, 서예작품 등이 항상 있었으니까요. 제 위로 세 살 터울의 형과 아래로는 여덟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는데, 저희 삼남매 모두 현재 예술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나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죠. 지우개, 깍두기, 쌀 등에도 조각을 하고, 삶은 계란으로 식탁에 그림을 그리다 부모님이 충격 아닌 충격을 받으신 적도 있으니까요. (웃음)



Q. 많이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아프셨던 건가요?
10살 무렵, 갑자기 머리가 빠지고 길을 가다 픽픽 쓰러졌습니다. 처음에는 신경을 안 썼는데, 자꾸 입이 계속 헐고 코피가 나고, 몸 안에서 자꾸 출혈이 생기더라고요.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보니,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백혈병이라고 하셨어요. 게다가 혈액 암까지 겹쳤다고…. 스무 살도 채 못 살 거라고 하셨죠. 밤에 잠들 때마다 내일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극도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Q. 그 어린 나이에 정말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네. 매일 죽음의 고비와 순간을 맞닥뜨려야 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고 죽자는 생각이 말이죠. 그래서 아버지께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죽기 전에 예술의 경지를 알고 싶다.고 했죠. 어린 제가 그런 말을 하니 아버지도 놀라는 눈치셨지만, 어쨌든 제 말에 동의해주셨습니다. 그날부로 아버지의 사진관에서 초상화 그리는 법, 사진 찍는 법을 배우고 가업인 전각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저와 관련 없는, 재미없는 것들을 가르쳐주었지만 아버지는 초상화, 사진, 서예, 전각 등 흥미로운 것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매일 매일이 환희에 차오르는 배움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Q.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대단합니다. 그래서 예술의 경지는 찾으셨나요?
예술의 경지는 지금도 찾고 있지만, 당시 ‘아브라함 차라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14살 되던 무렵 급작스레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건강 악화로 요양을 가게 되면서 형과 저와 여동생은 동대문에 작은 공방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각, 인장재료, 도장 등을 팔았죠. 그런 저희의 모습을 본 한 외국인이 호감을 표시했고, 그 분이 바로 ‘아브라함 차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저와 형에게 예술과 조각, 전각을 넘어 세계 미술사, 문학, 종교, 법,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작품 활동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아브라함 차 선생님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남산도서관에 가서 주구장창 책만 읽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면, 직접 가서 전시회도 관람하고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야말로 저의 예술적 경지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리고 책에서 배운 것, 아브라함 차 선생님을 통해 배운 것을 단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전에 적용하기 위해 인사동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죠. 왼손잡이 화가가 엄청난 속도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인사동에 계신 외국인 관광객 가이드 분들도 저에게 사람들을 소개시켜주었고요. 많을 때는 하루에 20~30명도 그렸어요. 하루에 50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까지 벌었으니 꽤 벌었죠.



Q. 미국에서 500여 점의 작품이 팔리면서 ‘21세기 피카소, ‘천재화가라는 극찬을 받으신 적이 있으시죠? 그 에피소드도 들려주시죠.
인사동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LA에서 왔다는 한 재미교포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제 작품을 미국에서 팔고 싶은데, 어떠냐고요. 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그려온 그림 수백 점을 모아 미국 재미교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제 그림이 500점이나 팔려버린 거예요. 제 그림을 구매하신 분들이 ‘21세기 피카소다, ‘천재 화가다 이런 수식어들을 붙여주시며 극찬을 해주셨는데... 어쨌든 기분은 정말 좋았습니다. 얼떨떨하기도 하고요.



Q. 1억 5천만 원의 돈이 생겼는데, 그것으로 무엇을 하셨나요?
재미교포 분이 저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가문의 전각 기법을 가구에 적용해 엔티크 가구 사업을 하자고 말이죠. 당시엔 그 제안이 ‘하늘에서 주신 기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업도 하고, 예술도 하고, 가문의 기법도 계승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였죠. 하지만 잘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사업은 1년도 못 버티고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중국산 저가 상품이 들어오면서 제 상품이 가격 경쟁력을 잃고 추락해버린 것이죠. 소비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정말 깊은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Q. 사업에 망했을 당시, 심정은?
제가 만들면 곧 대박날 것이다, 사람들이 인정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철저한 자만이자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가구, 작품성 있는 가구를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서 사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직원들에게 인건비조차 주지 못한 채,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제게 남은 것은 통나무 몇 개와 나무 부스러기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5억 원이 넘는 빚까지 졌고, 빚보증까지 잘못 서는 바람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있었습니다.
그렇게 짚은 자괴감에 빠져 있을 무렵, 한 중소기업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몇 백 만원의 돈뭉치를 던져주며, 자신의 얼굴을 사진처럼 그려달라고 주문했죠. 그 순간 저는 머리를 망치로 쾅 하고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사진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칭찬이 가장 좋았던 저였지만, 한순간 ‘나는 그동안 사진을 그저 흉내 내는 작가일 뿐이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태껏 옳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에 회의감이 느껴졌습니다. 수억 원의 빚더미에 올라있는 실패한 사업가, 초라한 예술가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했죠. 급기야 제 왼손을 망치로 내려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작업했던 그림, 조각, 전각들도 모두 깨어 부수어 버렸고요...



Q. 그 실패 후 느낀 점은?
맨 처음에는 교만한 작가 근성, 장인 정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했기에 얼마 뒤 안산의 아울렛 백화점 6층에 작은 공방을 열고 재기를 다짐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장인적인 작품만 만들어서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더니 지나가는 한 손님이 이걸 좀 작게 만들고, 예쁘게 만들면 살 것 같다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무언가 깨달음이 왔죠. 이때까지는 저 혼자만의 예술을 했구나 하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과 소통하는 예술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큼지막하고 어디에 쓰일지 모르는 작품이 아닌, 조그맣고 실용적인 디자인 도장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구사업에 실패했던 이유도 타인의 말을 너무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제 고집만 내세웠던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후, 그림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주의적 화풍에서 벗어나 보다 내면적인 화풍, 추상적인 그림으로의 변이를 시작한 것이죠. 처음엔 오른손으로 그리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는데 점점 작품에도 긍정적인 발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Q. 그렇게 해서 2008년에는 전시회도 가지셨습니다.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전시회를 가졌을 때 기분은?
그것을 얘기하려면 우선 송준 선생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해야 하는데요. 어느 날, 우연히 시인 백석 연구가이신 송준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때 백석의 시집을 선물 받고, 읽게 됐는데 정말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의미, 사랑의 소중함, 슬픔의 위대함 등등에 대해서 말이죠. 백석의 시가 이중섭, 박수근, 윤동주와 같은 천재들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그 이후 제 작품 세계도 확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그리지 않았던 아름다움, 따뜻함에 대해 그리게 되었고, 새로운 저의 정체성을 다질 수 있었죠. 그리고 송준 선생님의 도움으로 2005년 5월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부산 인피니티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그리고 2008년에는 꿈의 무대인 인사동에서 세 번째 개인전시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5만 원의 입장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몰랐는데, 정말 작품을 설명하는 내내 기쁨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Q. 현재는 어떤 작업에 열중하고 계신지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셉아트공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증도 냈고요. 각각의 고객들이 원하는, 고객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도장을 만들어드리는 것이 조셉아트공방의 컨셉입니다.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된 도장, 혼을 담은 도장, 가문의 정신을 담은 도장을 만드는 것이 예술가로서, 또 조셉아트공방의 CEO로서 제가 하는 일이자, 제 사명이죠.



Q.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
2012년 새로운 병마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백혈병, 임파선 암에 이어 피부암까지요.. 하지만 저는 늘 그랬듯 다시 세상과 맞서기를 자처했습니다. 올해 사업자 등록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요. 조셉아트공방의 작품들이 조상대대로 내려온 저희 가문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작품들이 제 예술 정신과 가문의 정신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세우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또한 그 속에서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고, 저를 사랑해주시는, 또 조셉아트공방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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