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9일, 미국 LA에서 대형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19세 생일을 한 달 앞둔 에드워드 리(한국명:이재성)는 흑인들의 오인사격으로 그 자리서 사망했다.
흑인과 한인사회 간 갈등을 증폭시킨 충격적 사건의 도화선은 건장한 흑인 청년 로드니 킹 이었다. 차량 과속을 하다가 단속에 걸린 그는 4명의 백인 경찰들에게 이유 없는 폭행을 당했다. 한 아마츄어 사진작가가 촬영한 이 비디오는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흑인들을 향한 미국사회의 차별과 폭력이 다시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됐다.
이후 법원은 가해 경찰 전원에 무죄를 선고했다. 1년을 끌어온 재판 과정과 결과는 전 미국인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편파적 판결은 흑인사회에 쌓여 있던 극도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흑인 사회가 분노를 품은 대상은 당연히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사회 전반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이 실제로 표출된 곳은 엉뚱하게도 흑인들과 가장 밀접한 지역에서 상권을 이루고 있는 LA 코리아타운이었다.
흑인들은 폭동 발생 1년 전, 17세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수퍼마켓 주인 두순자 씨 사건을 떠올리며 습격을 정당화했다. 코리아타운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과 약탈, 방화 등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고 40만 한인교포사회는 8억 5천만 불에 달하는 재산과 자식의 목숨을 잃었다.
흑인들이 저지른 약탈과 방화의 이면에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있었다. 흑인들에 대한 미국 미디어의 일그러진 초상은 한인들로 하여금 흑인들을 경계하게 만드는 요인이었고, 고단한 생활과 가족 간 대화 단절, 언어 장벽, 문화적 차이로 주류 사회와 섞이지 못한 한인들은 흑인들에게 있어 그저 ‘돈 버는 기계일뿐이었다.
LA폭동 발생 후 잿더미가 된 코리아타운을 본 미국인들은 이제 한인사회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비온 뒤 땅이 굳 듯 코리아타운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인들은 수 십 년 이민 생활을 통해 터득한 지혜와 경험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에도 속도를 내고 있으며 흑인, 히스패닉이 주류를 이루는 LA에서 그들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한인 김정기 씨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주 수요일이면 교회 동료들과 가게 한 편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흑인 노숙인들에게 샌드위치와 과일이 든 봉투를 전했다. 그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기도하는 김 씨에게 흑인들은 살을 맞대고 정을 나누는 가족과 다름없었다.
진심을 담아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으로 한인들은 다른 문화와 진짜 소통을 시작했다. 20년 전 한 청년이 흘린 억울한 눈물이 LA에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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