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 '수북한 돈 봉투' 다 어디로 갔나?
입력 2012-02-22 18:23 
어제 검찰의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새해 벽두부터 정치권을 뒤흔들었던, 그래서 한나라당이 당명을 버리고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했던 그 떠들썩했던 사건의 결말치고는 너무나 허탈했습니다.

검찰은 어제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수석비서관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어제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내용입니다.


▶ 인터뷰 : 정점식 /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
- "박희태 국회의장 등 세 명은 2008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 직전 고승덕 의원에게 300만 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검찰이 밝혀낸 것이라고는 고승덕 의원에게 건네진 300만 원과 안병용 은평 당협위원장에게 건네진 2천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럼 여기서 지난 1월9일 고승덕 의원의 기자회견 내용을 잠깐 들어보시죠

▶ 인터뷰 : 고승덕 / 새누리당 의원(1월9일)
- "노란색 봉투를 달랑 하나만 들고 온 것이 아니라 쇼핑백 크기의 가방 속에는 노란색 봉투가 잔뜩 끼워있었다. 그 진술을 미뤄보면 여러 의원실을 돌아다니며 똑같은 돈 배달을 한 것으로 보는게 맞지않은가 싶고요."

그렇다면, 고승덕 의원의 여비서가 봤다는 쇼핑백의 수북한 돈 봉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정말 고승덕 의원 혼자만 박희태 캠프에서 돈 봉투를 받은 것일까요?

검찰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박희태 의장 계좌에서 1억 5천만 원이 인출돼 현금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돈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전당대회 당시 친이계 의원이 100명이 넘었고, 고승덕 의원이 친이계 핵심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다른 의원실에도 돈 봉투가 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무리한 억측일까요?

검찰은 고승덕 의원처럼 돈을 받았다고 스스로 진술하지 않는 한 수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돈 전달자로 알려진 곽모씨를 조사했고, 돈 봉투 살포를 진두지휘한 김효재 전 청와대 수석의 신병도 확보했습니다.

늘 그랬듯 이들을 구속하고 심리적으로 압박했다면 이들의 입에서 돈 봉투를 받은 더 많은 국회의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검찰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난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 박희태 의장과 김효재 전 수석의 말만 철석같이 믿은 꼴이 됐습니다.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전 정무수석을 불구속 기소한 것도 논란입니다.

검찰은 어제 박 의장과 김 수석을 기소한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 듯했습니다.

▶ 인터뷰 : 정점식 /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
- "단순 금품 전달자 등 실무자 위주로 처벌되던 종전의 사수 한계를 넘어 당선자, 총괄책임자 등 금품 제공을 주도한 핵심적인 인물을 기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검찰 말대로 단순 금품 전달자인 안병용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은 구속됐는데, 금품 제공을 주도한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불구속된 것입니다.

실무진을 구속하고, 최대 '윗선'은 자유롭게 놔둔 셈입니다.

검찰은 안병용 씨는 구의원들에게 돈 살포를 '지시'했지만, 박 의장과 김 전 수석, 조정만 비서관은 돈 살포를 단지 '공모'했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돈 봉투 살포를 기획하고 당선까지 된 박 의장과 김효재 전 수석은 단순 공모자, 그리고 안 위원장은 불법적인 일을 지시한 죄질이 나쁜 사람이 됐습니다.

돈 살포를 기획하고 공모한 게 죄가 더 큰 것일까요? 아니면 이들의 명령을 받고 지시한 게 더 큰 죄일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검찰의 설명은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검찰이 서둘러 돈 봉투 사건을 매듭지자 새누리당은 안도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 인터뷰 : 황영철 / 새누리당 대변인
- "박희태 의장과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적극적으로 검찰수사에 협조해 조속히 마무리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관행과 단절하고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아 새롭게 거듭날 것이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총선을 50일 앞두고 돈 봉투 수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공천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만일 공천을 모두 끝내고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돈 봉투를 받은 공천 의원들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안 그래도 새누리당에게는 힘겨운 선거가 더 해보나마나였을겁니다.

이 때문에 민주통합당은 검찰이 여권 눈치를 보고 서둘러 꼬리 자르기를 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박영선 /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 "이렇게 고대 라인이 모여서 과연 수사를 어디서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수사를 자를 것이냐 논의를 했다면 이것은 밀실에서 짜맞춘 수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으로서도 어떻게 해볼 뾰족한 수는 없는 듯 보입니다.

검찰이 여전히 민주통합당 돈 봉투 수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전당대회 돈 봉투가 정치권에 만연된 관행이었고, 민주통합당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돈 봉투 수사가 여야 전반으로 확대되는 게 달가울 리 없습니다.

예전 같으면 특검 얘기가 벌써 나왔을 텐데, 특검의 '특' 자도 나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아무리 임기 말이지만 여전히 힘을 가진 여권과 그 여권의 눈치를 본 검찰의 그렇고 그런 관계를 다시 한번 목격했습니다.

지나간 정권의 대통령까지도 먼지 털 듯 수사하던 검찰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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