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커멘트 】
무아마르 카다피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카다피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김희경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
세계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최근의 모습입니다.
▶ 인터뷰 : 카다피 / 리비아 국가원수
- "(유엔) 헌장에는 유엔이 다른 나라의 국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나라도 내정 간섭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2009년, 카다피는 유엔 총회에 나타나 무려 96분 동안이나 시차 적응에서부터 존 F. 케네디 암살, 자신의 40년간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기행을 일삼은 카다피는 한때 '아프리카 왕 중의 왕'으로 불렸습니다.
1942년, 지중해 연안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무아마르 카다피.
1969년에 젊은 장교를 모아 '자유장교단'을 구성해 같은 해 9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나이 27세.
카다피는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공화국을 세웠습니다.
19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했습니다.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반서구주의와 이슬람 민족주의를 외친 카다피는 '공공의 적'으로 등장했습니다.
1986년 서베를린 미군 나이트클럽 폭탄테러.
1988년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팬암 항공기 폭격 사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 인터뷰 : (고)레이건 / 전 미국 대통령
- "오늘날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필요할 경우, 또 할 수도 있습니다."
1992년 유엔 제재로 원유 수출이 봉쇄당하자 카다피는 1999년에 테러 사건의 피의자를 영국에 인도했고 유엔은 제재를 풀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생존을 위해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했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무자비한 독재로 국민의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카다피.
아랍 최장기 독재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MBN뉴스 김희경입니다.
무아마르 카다피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카다피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김희경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
세계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최근의 모습입니다.
▶ 인터뷰 : 카다피 / 리비아 국가원수
- "(유엔) 헌장에는 유엔이 다른 나라의 국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나라도 내정 간섭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2009년, 카다피는 유엔 총회에 나타나 무려 96분 동안이나 시차 적응에서부터 존 F. 케네디 암살, 자신의 40년간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기행을 일삼은 카다피는 한때 '아프리카 왕 중의 왕'으로 불렸습니다.
1942년, 지중해 연안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무아마르 카다피.
1969년에 젊은 장교를 모아 '자유장교단'을 구성해 같은 해 9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나이 27세.
카다피는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공화국을 세웠습니다.
19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했습니다.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반서구주의와 이슬람 민족주의를 외친 카다피는 '공공의 적'으로 등장했습니다.
1986년 서베를린 미군 나이트클럽 폭탄테러.
1988년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팬암 항공기 폭격 사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 인터뷰 : (고)레이건 / 전 미국 대통령
- "오늘날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필요할 경우, 또 할 수도 있습니다."
1992년 유엔 제재로 원유 수출이 봉쇄당하자 카다피는 1999년에 테러 사건의 피의자를 영국에 인도했고 유엔은 제재를 풀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생존을 위해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했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무자비한 독재로 국민의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카다피.
아랍 최장기 독재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MBN뉴스 김희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