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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전국순회 공연갖는 국민가수 조용필
입력 2011-04-21 08:55 

이름 석자 외엔 더 이상 수식어가 필요 없는 이가 있다. 조용필(61)은 말하자면 그런 존재다. 밴드 앳킨스로 데뷔해 가수로 살아온 지 42년. 그가 걸으면 곧 길이었다. 1994년 음반 판매량 1000만장을 넘겼다. 1980년 미국 카네기홀에 섰고, 1984년 일본 부도칸(武道館)에 섰다. 1999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 섰다. 모두 국내 최초였다. 이 거인의 조심스러운 걸음이 지난 15일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를 방문해 1년 전 "다시 찾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작은 사슴의 섬에 울려 퍼진 희망가에 300여 명 주민은 펑펑 눈물을 쏟았다. 20일 서울 서초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난 조용필은 "1년 전 눈에 밟히던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에겐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5월부터 전국을 돌며 국민을 만나는 것이다.
-얼마 전 소록도를 다시 갔는데.
▶소록도는 작년 5월 런던심포니와의 협연으로 처음 갔다. 평생 처음 본 조용필인데 두 곡만 부르니 실망하는 눈치였다. 기회가 오면 다시 오겠다고 하곤 지금까지 가능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악기를 줄이더라도 밴드와 같이 가서 그들이 좋아할 노래를 불러주자고 생각해 신청곡도 받기로 했다. 주민들 평균 연령이 73세더라. 평생 갇혀 살아온 이들이었다. 무조건 밝게 하자. 동네 아저씨처럼 대해주자 싶었다. 한센인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피하는 그런 응어리가 있을 거라 생각해 춤도 추게 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신청곡이 쏟아졌다. 가락이 구슬픈 한오백년은 일부러 뺐는데도 제일 먼저 신청곡으로 들어오더라. 그 순간 참 행복했다. 그분들의 눈을 보고 "또 봬요" 하고 왔다. 앞으로도 쭉 갈 생각이다.
-지난해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을 채웠다. 5월부터는 2년 만에 첫 전국투어를 하는데.

▶한동안 공연으로만 관객을 만나 왔다. 더 많은 이를 만나고 싶을 수밖에 없어 큰 무대에 서는 거다. 무대 먼 곳에 자리 잡은 이들과도 눈을 맞추고 싶어 작년 무빙스테이지(30m 높이 공중에서 움직이는 무대)도 도입했다. 이틀 공연만 하니 왜 지방엔 안 오느냐고 난리가 났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이번엔 전국을 돈다. 작년엔 장비를 렌탈했는데 이번엔 아예 무빙스테이지를 직접 만든다. 눈이 휘둥그레질 무대가 될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부도칸, 예술의전당, 평양, 카네기홀 등 항상 대한민국의 최초였다. 더 앞으로 가야 한다는 부담은 없나.
▶항상 기회가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최초 타이틀을 달게 됐다. 어느 무대든, 어느 장소든 내가 서야 하면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다. 해외 공연이나 특별한 무대에 대한 부담은 이젠 없다. 국내에서 할 일도 많고 여기에 계속 있을 거다.
-세 시간 공연을 채울 만큼 히트곡이 많다.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가수는)자기가 부른 노래는 다 애착이 간다. 이번에 바람의 노래를 테마로 뽑아서 콘서트를 하는 건 주위에서 지금의 조용필에 가장 맞는 걸 정해줬기 때문이다.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지나간 뒤 사랑을 깨닫는다는 노랫말이다. 노래는 내 얘기만은 아니다. 노래는 대중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우리가 함께 가져보면 어떻겠나 싶었다.
-진정한 가수의 자질은 뭘까.
▶악기 한두 개는 수준급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악기를 연주하면 음감이 좋아져 내 소리와 악기 소리의 조화를 알게 된다. 그 다음은 연습이다. 기획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 노력하고 길을 찾을 때 깜짝 놀랄 발전도 따라온다.
-아이돌이 TV를 휩쓸고 있다. 방송에서 활동하는 가수를 볼 때 안타까움은.
▶신인 때는 자기를 알려야 하니까 방송 출연을 안 할 수가 없다. 버팀목을 만들어주는 게 방송이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설 수 있는 뿌리를 찾아야 한다. 그건 개인의 노력이다. 방송에만 의지하다 보면 방송을 안 하면 곧 잊힌다. 1992년 꿈을 마지막으로 방송 안 한다고 선언하고 저도 2년간 굉장히 고생했다. 그때 무대를 내가 만들자고 생각했다. 결국 공연으로 극복했다. 인기가 떨어질 만하면 버리는 방송 경향도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옛 노래가 다시 불리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조용필의 노래 부르기 미션도 생기고 있는데.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틀스가 해체됐지만 여전히 불리듯이 영국이나 미국처럼 음악 역사가 길면 음악이 쌓이고 계속 이어진다. 우린 가요 역사가 겨우 몇십 년이다. 이제야 가요계의 클래식이 만들어지는 좋은 현상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1960~1980년대 좋은 음악이 얼마나 많은가.
-은퇴하면 자신의 노래로 뮤지컬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1990년대부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며 좋아하게 됐다. 같은 작품을 10번 넘게 보기도 했다. 우린 왜 저렇게 못 만들까 싶었다. 무대를 만드는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됐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좋은 대본도 필요하다. 기약할 수 없지만 4~5년은 걸릴 어려운 작업이 될 거 같다.
-지난해 소아암 돕기 콘서트를 통해 어린이 500명의 치료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조용필장학재단에 속한 학생도 40명이 넘었는데.
▶사회 환원이란 거창한 말은 싫다. 유명인이기에 내가 사회에 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장학재단 학생도 계속 늘려가려고 한다.
-가수 생활이 화려하게 보이지만 굴곡진 삶도 있었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
▶힘들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힘든 일들은 앞으로도 수없이 찾아올 것이기에 어떻게 지금을 이겨내는가가 중요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걸어가는 과정에 튀어나온 자그마한 돌덩이라고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가수로서 삶이 정말 행복했나.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노력만으로도, 재능만으로도 안 되고 천운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음악을 하며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순탄하게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가수였다.
공연 문의 (02)541-7110
[김슬기 기자 / 이경진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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