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원양어선 타려던 청년, 200억대 자산가로 변신
입력 2011-02-04 15:09 

큰 부를 이뤘다는 자산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누구 하나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김기현(45·사진) 글로브너 투자자문 대표이사의 인생은 유독 굴곡이 심하다.

진로를 둘러싼 부모님과의 갈등, 미래가 보이지 않던 직장생활, 그리고 몇 번의 투자 실패... 인생 풍파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김 대표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펀드매니저를 꿈꿨던 약골 소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법원 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2살때 서울로 상경했다. 약 10년간 시 외곽 번동에서 살던 그의 가족은 1976년 "넓은 집에서 좀 살자"는 아버지의 바램에 따라 당시 땅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강남 압구정동으로 이사했다.

이사 당시 평(3.3㎡)당 10만원이던 이 집의 시세는 정확히 15년 후 200배가 올랐다. 집안 살림이 갑자기 눈에 띄게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돈걱정을 비교적 덜 하면서 행복해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김 대표는 두가지를 깨달았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는 것, 돈을 벌려면 가치가 증가하는 자산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은 몰랐지만 이때부터 그의 꿈은 펀드매니저를 향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김 대표는 유난히 독서를 즐겼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찾아온 신장염으로 몸이 불편했던 탓에 친구들처럼 뛰어놀지는 못했지만 소설, 수필, 역사책 등 인문학에서부터 수학, 과학, 물리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의 책을 탐독했다.

독서로 연마된 그의 지적 능력은 결국 학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김 대표는 결국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유는 펀드매니저가 되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고시를 치르고 법조인이나 공무원이 되길 바랬던 아버지의 바램을 져 버린 탓에 이때부터 김 대표는 진로 문제를 두고 부모님과 갈등을 겪었다.

◇원양어선이라도 타야 했던 서울대생

김 대표는 대학 2학년때부터 증권사 계좌를 개설하고 주식매매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정보를 얻을 경로가 많지 않았기에 경제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투자 의사결정을 내렸다. 대학생인 그에게 주식은 돈벌이 수단이라기 보다 펀드매니저가 되기 위해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는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SK증권 공채 1기로 입사한 김 대표는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당시 코스피는 3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증권사 객장에서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자신만의 정석 투자로 차곡차곡 자신과 고객의 자산을 불려갔다.

그러던 그에게 금융실명제라는 첫 시련이 찾아왔다. 1993년 시행된 금융실명제는 주식시장 사상 초유의 폭탄이었다. 대다수 종목이 한동안 하한가를 이어갔다. 금융실명제 실시 직전 미수계좌를 활용해 건설주를 대거 매입해두고 동원 예비군 훈련을 떠난 김 대표의 주식계좌는 3일 만에 `깡통`이 됐다.

그 후 열심히 일해 다시 1000만원 정도의 돈을 모은 김 대표는 직장생활을 접고 전업투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업투자에서도 양호한 수익률을 이어갔지만 외환위기를 앞두고 경제에 적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하던 1996년 또 한번 가진 돈을 모두 날렸다.

두번의 실패 후 그는 재기를 위해 2년간 업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의외로 원양어선이었다. 증권사 생활에 찌들어 나약해져 있던 몸과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일해 종자돈을 마련하자는 뜻의 고육지책이었다.

1997년 2월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찾아간 부산항은 바닷바람이 매서웠다. 하지만 독한 각오로 임했고 6개월의 항해사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인력수급에 불균형이 생겼고 배에서 일하기 위해 중개상에 웃돈을 챙겨줘야 하는 웃기는 상황이 전개됐다. 김 대표는 결국 열심히 배운 기술은 써먹지 못하고 각종 막노동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집안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성공하기 전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뇌이며 참았다.

◇10년만에 1000만원→200억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일까. 그 후 김 대표의 인생은 순탄하게 풀리는 듯 했다. 당시 유행하던 전화 주식상담서비스 사업을 하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오면서 김 대표는 1999년 다시 주식투자 업계로 복귀했다. 이 곳에서 주식상담, 투자설명회 등을 하며 감각을 키운 김 대표는 2달여 만에 회사를 나와 작은 부띠끄를 설립했다.

부띠끄를 운영하며 자본금 1000만원으로 2년만에 1억5000만원을 만들었다. 당시 김 대표는 선물옵션에 대한 투자도 병행했다. 투자는 곧 자산가치의 방향성을 예측하는 것이므로 정확한 예측을 만들어 낼 능력만 있다면 선물옵션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한 동안 승승장구했지만 얼마 못 가 또 한번 시련이 찾아왔다. 2001년 어느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상승 방향에 베팅한 채 포지션을 청산하지 않고 퇴근한 김 대표는 9.11 테러라는 글로벌 악재의 직격탄을 맞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매도 맞다보면 면역이 생기는 법. 가진 돈 대부분을 잃었지만 김 대표는 크게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있던 자금을 수습해 선물옵션 투자 비중을 높였다. 물론 예전보다 더 치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했다.

결국 3년만에 7000만원을 30억원까지 불렸다. 2005년부터 다시 주식투자로 눈을 돌린 김 대표의 자산은 꾸준히 증가해 한때 300억원 수준까지 늘었다가 최근 투자자문사 설립 등으로 지출이 늘어나며 다시 200억원대로 줄었다.

대략 10년만에 1000만원이 200억원으로 늘어난 것이다.

◇"글로브너 같은 펀드매니저 될 것"

글로브너 투자자문에서 글로브너(Glosvner)는 미국 고전 SF 소설 `비이글호의 모험`에 나오는 종합 과학자 캐릭터다. 그의 임무는 각 분야 과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김 대표는 학창시절 이 책을 읽고 글로브너와 같은 펀드매니저가 될 것이라 결심했다.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펀드매니저는 세상 모든 이치를 대부분 다 알고 있고 가능한한 모든 변수를 고려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전문가였다. 중학교 때 부터 시작된 그의 각종 영역을 파괴한 독서가 수천권을 독파한 지금도 계속되는 이유다.

지난해 8월 설립된 글로브너 투자자문은 다른 자문사나 자산운용사와 달리 고객이 수탁한 돈을 현금으로 보유하는 경우가 없다. 장이 좋든 나쁘든 100% 주식에 투자한다. 김 대표는 "포트폴리오에서 현금과 주식의 비중을 조절하는 것은 투자자들의 몫"이라며 "주식형 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는 경기에 관계 없이 오를 종목을 골라서 보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글로브너 투자자문의 포트폴리오에는 5~6개 정도의 종목이 들어있다. 김 대표는 이들 중 80% 정도가 우량 중소형주며 나머지가 대형주라고 귀띔했다.

그는 향후 국내 증시 전망에 대해서는 "단기적으로 충격이 있을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매수가 옳다"고 전망했다.

그는 또 재테크에 열광하는 20~30대 직장인들에게 "주식에 투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투자해야 할 때"라며 "재테크는 여유자금이 생긴 후 자산운용사, 자문사 등 운용 전문가에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특히 노후를 위해 각종 연금상품에 가입하는 투자자들에 대해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능력에 따라 은퇴 시점도 유연해질 것"이라며 "은퇴 후를 걱정하기보단 역량을 갖춰 건강하게 오래 일할 궁리를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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