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ㅡㅡ5,18당시 전남도청 보건과 정의환씨 실제증언 2019,01,19일ㅡㅡㅡ
▶5.18은 폭동이었다. ▶대학생들 데모 때는 선동과 폭력은 일체없었다.
▶5.15일께부터 전혀 낮 선 청장년들이 나서서 시민들을 선동하며 데모를 이끄는 느낌을 받았다.
▶광주 전남민들은 5.18 단체 관련자들을 극도로 혐오 기피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들과 엮이지 않으려한다.
▶5.18 유공자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은 5.18단체의 방패막이가 될만한 유력인사 영입 공작?.
●▶2019.1.18일에 있었던 "5.18 북괴군 개입 대국민 공청회"에서 용기있게 증언한 정의환 씨는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분위기가 심각해 미국으로 대피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5.18관련 실제상황을 제가 겪었던 사실들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시 31세였고 전남도청 보건과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 1980년경 광주지역 분위기
이름도 생소하였든 전두환씨가 정권을 휘두르고, 광주전남에서는 거의 신격화 되다 시피한 김대중을 내란음모로 사형선고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전라민들은 전두환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바닥에 깔려있었고, 대학생들은 날마다 전두환을 죽이자고 데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데모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이미 민주화가 되어 있었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여 먹고살기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구국이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다는 명분 같은 것은 없었기에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대다수의 전라민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5.18 민주화란 사건의 시작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대학생들의 데모는 1980년 5월14일경까지 광주시내에서 산발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결코 과격하다거나 무력을 사용한 데모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실제 데모에 참가한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총학생회 간부들의 우격다짐으로 데모를 선동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참가한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1980년 5월15일경부터 5월21경까지의 광주지역 실제 상황
- 5월14일경까지 광주시내에서 시끄럽게 산발적으로 하고 있던 대학생들의 데모가 5월15경부터는 갑작히 자취를 감추어서 저도 그 당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 5월14일경에 대학생들의 데모가 자취를 감추자 5월15일경부터는 전혀 낮 설은 청장년들이 나서서 일반 시민들을 선동하여 데모대를 이끄는 듯 한 느낌을 받았었고, 이 낮 설은 청장년들이 주동이 되어 갑작스럽게 일반 시민들이 시내를 몰려다니면서 데모대가 형성되기 시작 하였고, 5월18일경부터는 본격적으로 데모가 이루어짐과 동시 매우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변하여 공권력을 거의 마비시켜 버리고, 이때부터 경찰력은 보이지 않고 시가는 완전히 치안공백 상태가 되고, 그 데모대들의 폭력적인 형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 광주인근의 군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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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씨가 파악한 최종 집계;-사망 121명, 부상 437명이었다.
* 부상자들을 파악하는데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중복된 환자들이 있었고 경상이나 중상환자들이 서로 겹치고 하여 인원수가 들쭉날쭉하였고 보고를 하고서도 틀린 경우가 많았다.
*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시신이나 부상자들이 나오지 않아 최종 집계를 하였다. 부상자는 437명, 사망자는 121명인 것으로 기억한다.
* 부상자들의 인적사항은 파악이 되었지만 사망자들의 인적사항은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하여 그 후 시신들을 관에 넣고 방부제와 탈취제들을 쏟아 붓고 시신들을 모두 도청 앞 상무관으로 옮겨서 유가족들이 시신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 그 때 가장 특이하고 의아 했던 점은 5.18 민주화 사태는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임에도 부상자들이나 사망자들 중 대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고 한 사람도 없었다.
* 당시 도청에서 부상자나 사망자들을 파악하고 치료 등을 해주는 담당실무자는 나였으나 도청 직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제가 소속해 있는 보건과 직원들조차 거의 관심이 없었고 계장님, 과장님, 국장님, 도지사님만 업무를 챙기신 정도였고, 오로지 저 혼자서 5.18관련 모든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 까닭은 5.18사태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학생들과 일부 어리석은 시민들이 데모를 하다 어쩌다가 이런 사태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고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때문이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 가지였고. 만약 지금 시대에 5.18사태가 일어났다면 도청직원들. 경찰들, 검찰들, 의원들, 시민 단체들 등이 총 동원되어 사건을 수습하였을 것이다.
* 그 후 여론은 사망자가 최소한 500명에서 5000명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대세였으나 저는 그런 여론에 코웃음치고 있었다. 당시 부상자에게는 400만원 사망자에게는 600만원씩을 무조건 지급하기로 하였고, 또 내 가족이나 친척들이나 선후배들이 행불이 되었거나 크게 다쳤다면 신고하거나 찾아 나서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 광주광역시 승격→업무 광역시로 이관→5.18단체 발호→깜짝 놀랄 변질과 유공자 폭발
그 후에 광주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되는 바람에 5.18관련 업무가 도청에서 광주광역시로 이관되었고 5.18사태가 점점 민주화 운동으로 변질되고 광주광역시와 5.18관련 단체들이 합세하여 부상자들에 대해선 전혀 이견이 없었고, 사망자들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당시 행불자들 등을 대상으로 숫자 파악에 나섯으나 순전히 어거지로 자기들 입맛대로 부풀린 숫자가 154명으로 공식적으로 최종 발표를 하였었다.
▶정씨, 2018.7 망월동 묘지 방문 경악/묘지 824기, 유공자 4,500명? 심각한 날조 조작
저는 거기까지 인줄로만 여기고 여태까지 지내오고 있었는데 2018년7월경에 우연히 망월동에 있는 5.18 국립묘지에 들르게 되었는데 깜짝 놀라 까무러칠 뻔 했다. 5.18 유공자 묘기가 무려 824기가 있고 앞으로도 여기에 들어올 유공자가 약 4천5백명이 더 있다는 직원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저는 유공자 외 그 가족들까지도 묻히는 것이냐고 물어 봤더니 그게 아니고 순수하게 5.18때 다치거나 사망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하도 기가차서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5.18단체들의 수없이 많은 비리들을 훤히 알고 있는 나였지만 이토록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김후식 5.18관련 단체, 부상자, 유가족협회의 회장이란 자?
김후식은 80년경 나이가 40세쯤으로 충장로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이발사였는데 5.18때 부상자로 접수가 되었던 자이다. 그 때 처음으로 5.18관련 단체로 5.18관련 부상자 및 유가족협회가 결성되고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 자가 김후식이다. 어떤 경로로 부상자가 된 줄은 모르지만 경상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회장 직을 역임해 오다 십 몇 년 전에 유공자 부정 지정 사건으로 회장 직에서 사퇴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가서 다시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금까지 35년여 간 동안 회장을 역임하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어 5.18 민주화운동 단체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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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18 당시 전남도청 보건과 공무원 정의환 씨 증언|
(유튜브에서 `5,18은 폭동이었다`를 검색해서 직접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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