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63번째 무료강의 시작 ⇛ 십만양병설과 요행보고(거짓보고=허위보고)에 대하여 설명
■ 전체 제목: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 63번째 주 내용: 십만양병설과 요행보고(거짓보고=허위보고)에 대하여 설명
■ 일자: 신축년(辛丑年) 단기 4354년 서기 2021.4.29.목요일.(음력 3.18.)
■ 장소=등재한 곳: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올려놓았음.
■ 강의자(講義者):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여러분께서 사업과 직장에 초석이 되고 밑바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무료강의는 1마당에서 13마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무료강의를 올리겠습니다.
정정당당한 미래를 위해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대홍익역사(大弘益歷史)배움터와 천지학당(天地學闛)터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힘찬하루 보내세요.
제11마당 설명 중 63번째 무료강의 시작
◐ 십만양병설과 요행보고(거짓보고=허위보고)에 대하여
▣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구국지책(救國之策)과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에 대하여.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1520년(조선 11대 중종 15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후에 세계역사의 정황을 잠간 이야기를 먼저 하고 글을 올리겠습니다.
이황이 1501년에 태어나고 19년 후인 1520년에 서산대사가 태어났으며 16년 뒤 1536년에 이이가 태어났다.
역사는 서산대사가 태어나기 전에 1096년에 십자군전쟁이 일어나고 이후의 세계역사는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는 1271년에 동방여행길에 오르고 십자군전쟁은 1291년에 막을 내리고 마르코폴로는 1299년에 동양에도 여러 신들이 있다는 동방견문록을 편찬하였으며 이에 1335년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으며 1453년에는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였고 후에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이 1492년 8월 3일에 90명의 선원과 함께 스페인을 출항하여 10월 12일에 잉카제국(마야문명을 이은 것이 바로 멕시코의 아즈데카 문명과 잉카문명이다)의 섬을 발견하고 인도 라고 하였으나 이탈리아의 항해사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신대륙 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로 부르게 되었다.
1513년(조선 11대 중종 8년)에는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가 45살에 군주론(君主論)을 저술하였다.
그 후 독일의 루터가 종교개혁이 1517년에 일어났다. 서산대사가 태어나는 1520년에는 독일의 루터는 로마교회에서 보낸 파문칙서를 불태웠다.
서산대사가 태어나고 난 2년 후에는 독일의 루터는 신약성서 제1판을 간행하였다.
이후 칼뱅도 종교개혁으로 1536년에 일어났다.
이후 신앙고백을 만들어 오늘날 개신교의 한파인 장로교회의 신조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서양에서는 당시 기독교의 우주관은 지구가 중심으로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하였다.
그 후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주장은 기독교상의 교리에 위배되므로 그는 주장을 못하고 라는 책을 서기 1542년 5월 24일에 임종할 때에 전해졌다.
서산대사가 1604년에 운명하고 난 그 다음해에 에스파냐(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풍자소설 돈키호테를 간행하였다. 즉 1605년 12월에 간행(刊行)하였다.
그리고 이때 세계의 문성(文聖)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리어왕과 맥베드를 간행하였다.
또한 이때 1605년에는 사명당과 일본의 덕천가강의 강화담판을 하여 사명당이 임진전쟁(임진왜란) 때에 약탈한 문화재와 포로를 데려왔다.
◉ 임진전쟁(임진왜란) 이후 1605년(선조 38년) 3월 20일에 사명당과 덕천가강의 강화담판을 할 때의 일본의 담판장소는 일본 교토에 있는 복견성(伏見城: 후시미 성)에서 했다.
교토에 소재해 있는 복견성(후시미 성)은 대판(大阪)=오사카의 복쪽에 있다.
이 대판까지 가는 경로는
대마도(쓰씨마) → 일기도(壹岐島=一岐島: 대마도 밑에 있음)=이키도 → 후쿠오카(복강현) → 히로시마 → 대판(大阪)=오사카 → 후시미 성=복견성(伏見城)=교토에 있음(오사카 북쪽에 교토가 있으며 복견성에서 사명당과 덕천가강의 강화담판이 이루어졌다. 오사카 북쪽에 교토가 있으며 이 교토에 복견성이 있다)
그 후 이탈리아의 갈릴레이(1564년~1642년) 라는 과학자가 지동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난 후며 즉 갈릴레이 그는 1633년에 70세의 나이로 고문 등을 받고 또 교회의 강요를 당하여 지동설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판소에 나오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그대로 돈다. 라고 중얼거렸다.
역사는 이후 1636년에는 후금의 2대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고 개명하고 조선 16대 인조 때에 병자호란=병자전쟁이 일어나고 1644년에는 명나라는 17대로 청나라 3대 순치제 때에 멸망하고 그 후 역사는 1688년에 영국은 국왕의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의회가 다스리는 정치를 일으킨 혁명인 명예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로는 국왕이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지는 않고 의회가 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오늘날까지 의회정치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후 1775년 4월 18일 영국과 아메리카 간의 첫 전투가 렉싱턴(미국 동쪽: 구글지도 검색)에서 일어나게 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어 1776년 7월 4일에 미국 이라는 연합국의 나라가 만들어졌다.
역사는 이렇게 물이 마르지 않는 한 태양이 꺼지지 않는 한 남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사욕과 애욕과 분노와 질투와 계략과 덕담과 전쟁 속에서 피차가 고지를 먼저 점령할러고 하면서 계속 흘러가고 있다.
즉 인생사 희노애락(喜怒哀樂) 속에서 뒤엉켜가면서 역사는 큰 사업을 위하여 큰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흘러가고 있다.
여기서 인류가 바라는 것은 홍익정신이 있는 사업과 홍익인간을 위하는 정책을 펴는 군자가 대장부가 대인이 나와서 더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살아가게 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곧 역사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즉 피차의 싸움에서 피차가 상생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 휴정(休靜)=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서산대사)은 1520년(중종 15년)~1604년(선조 37년)이며 조선중기의 고승(高僧)이며 당호(堂號: 법사로부터 받는 이름)는 청허(淸虛) 또는 서산(西山: 묘향산이 오악 중에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더 알려져 있다.
법명(法名: 불가에서 사후 이름)이 휴정(休靜)이다.
본관(本貫)은 완산(完山) 최씨이며 평남 안주 출생이다.
어릴 때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인 9살에 어머니가 운명하고 10살 때에는 아버지가 운명하였다.
서산대사는 율곡 이이(李珥)보다 16살 연배이다.
휴정(休靜)의 선교관(禪敎觀)은
禪是佛心(선시불심):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敎是佛語(교시불어):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서산대사의 심법요초(心法要抄)에 선(禪)과 교(敎)는 다 일념중(一念中)에서 일어남.
선(禪)이란? 심의식(心意識)이 미치지 못하는 곳 곧 참구(參究: 진리 탐구)에 속하는 것은 선이고
교(敎)란? 심의식(心意識)이 미치는 곳 곧 사량(思量: 진리의 말씀을 가르침)에 속하는 것은 교가 되느니라
◉ 이이(李珥)
이이는 1536(중종 31년)~1584년(선조 17년)에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이며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출생은 강릉 오죽헌(烏竹軒)이다.
율곡 이이는 1583년(선조 16년) 2월에 48세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올리고 같은 해 4월에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하고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율곡 이이(李珥)와 나이가 동갑이다.
이이(李珥)의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올린 후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임진전쟁(임진왜란)으로 처참한 피해를 입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임금과 중신한테 책임이 있다.
왜냐 고려 8대 현종시대의 강감찬(姜邯贊)은 거란(요)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여 귀주대첩(龜州大捷)을 1019년 2월 초하루에 승리로 이끌어 즉 거란(요)의 3차 침입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였다.
즉 고려시대에 귀주대첩이 일어나고 573년이 지난 후에 왜놈의 침략을 예방하는 십만의 군사력을 키우지 못하고 임진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에게 조선의 나라가 참혹함을 당하였다.
즉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책임은 그 당시 임금과 중신들에게는 영구히 역사의 대범죄를 물어야 한다.
비록 명나라의 도움과 여러 의사(義士) 의민(義民) 의승(義僧: 승병)들의 희생으로 임진전쟁(임진왜란)을 물리쳐 끝이 났지만 선량한 백성들에게 온갖 참혹함을 당하게 한 것에 대하여 십만양병설인 군사 10만명을 양성 못하였는 책임은 영구히 역사의 대범죄를 물어야 한다.
서산대사는 화엄경(華嚴經)의 원리인 만학(萬學) 만청(萬聽) 만수(萬修) 만덕(萬德) 만통(萬通) 만행(萬行) 부대립(不對立) 태양(太陽)과 같은 우주관의 마음을 터득하면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는 보살과 같은 경지에 이르니라. 라고 말하였다.
즉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요. 리즉사(理卽事) 사즉리(事卽理)이다. 라고 말하였다.
유학에서 보는 우주관의 학문으로 성리학(性理學)인 성즉리설(性卽理說)과 양명학(陽明學)인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하였지만 서산대사는 조선 13대 명종 때에 보우스님으로 배운 불학으로 불교에서 보는 우주관으로 보는 불학을 한마디로 일즉다(一卽多)요 다즉일(多卽一) 이요 리즉사(理卽事)요 사즉리(事卽理)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법구경(法句經)에는 이런 말이 있다. 知者居世間(지자거세간) 常習吉祥行(상습길상행) 즉 지혜로운 사람은 세간과 더불어 살면서 항상 배우고 익혀서 길하고 상서로운 행신을 하며 산다. 라고 하였다.
조선의 정책은 불교를 억눌러 호국불교가 일어서지를 못하게 되었다.
즉 연산군 때에 폐지되었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부활하도록 한 보우(普雨)스님이 유생들을 놀라게 한 것은 조선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대비가 50세에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때에 그 다음해인 1551년(명종 6년)에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하게 하였다. 그래서 봉은사(奉恩寺)가 선종의 본사가 되었으며 봉선사(奉先寺)가 교종의 본사로 지정되었다.
이에 보우 고승은 판선종사도대선사로 즉 선종판사(禪宗判事)로 임명되어 연산군 때에 선교양종이 폐지되었던 승려과거시험인 승과제도를 부활시켜 승려들의 자질이 향상되었으며 이때에 서산대사인 휴정(休靜)과 사명당이신 유정(惟政) 등의 고승들이 발탁되어 임진전쟁(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565년(명종 20년) 4월에 문정대비가 운명하자 유생들은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으로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서울 근교의 사찰 출입을 금지 하였으나 계속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자 이때에 이이(李珥)가 제주도로 귀향을 보낼 것을 올리자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결국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즉 보우고승은 조선의 억불정책 속에서 호국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이며 그는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하나로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보우고승은 비록 제주목사인 변협에 의해 처참하게 죽었다. 즉 보우스님은 스스로 임종을 맞으려고 단식에 들어가자 변협은 무관을 시켜서 형틀에 매달고 태장 100대를 때려 죽였다.
비록 보우고승은 조선정책인 억불정책으로 유생들에 의해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는 서산대사를 승과에 장원급제를 하게 하여 서산대사를 호국불교 중흥과 자신의 자리를 잇게 하여 서산대사를 교종판사(敎宗判事)와 선종판사(禪宗判事)의 자리를 물려주고 그 후 양종판사(兩宗判事)를 겸하게 하여 명성을 얻게 만들어 그 후 서산대사는 사명당과 이이에게 선교양종의 사상과 유불선에 통달한 삼교를 전하게 하여 그 후 일어나는 임전전쟁(임진왜란)에 승리하게 하는 요인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 서산대사(西山大師)의 구국지책(救國之策)에 대하여
휴정(休靜) 서산대사는 다음과 같이 구국지책에 대하여 10가지를 선조에게 말하고 있다.
1. 지성감천(至誠感天)이 되어야 합니다.
2. 군신일체(軍臣一體) 만민일심(萬民一心)이 되어야 합니다.
3. 대명파병(大明派兵) 요청하여야 합니다.
4. 나라의 군신상사는 최후까지 적과 싸워서 죽을지언정 겁내어 쫓겨가서는 아니되오나 그러나 아무런 대적할 만한 무기 등이 없이 그냥 죽는 것만은 아무 이익이 없사오니 명나라의 응원과 무기, 화약, 양곡 등이 오기 전에 맨주먹만 가진 백성을 적의 번개 같은 총검 앞에 내세우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평양성도 지키기 어려우니 더 북으로 들어가시옵소서 그것은 장차의 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십니다.
5. 적에게 함몰되지 않은 지방에 황급히 명신을 파견하시어 관민을 효유하여 인심이 흩어지지 않게 하시고 또 충의애국지사를 격동하여서 처처에 의병을 일으키게 하시옵소서.
6. 군사훈련이옵니다. 우리나라는 2백년동안 싸움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무관과 군졸이 무예를 분외사로 여기어서 왜병이 이르는 곳마다 폭풍 앞 풀 스러지듯 하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시급히 무예를 통한 장병을 불러서 군적 가진 자나 또는 민간장정을 모집하여 빨라도 한 달 또는 석 달까지는 칼쓰고 활쏘는 법을 연습시켜 적 앞에 나가도록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거리와 산에서 피난민을 거두어서 몽둥이를 들고 총검이 번개같이 빛나는 적에게 내보내면 이것은 양민을 몰아 적의 제물(祭物)로 받치는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7. 철공을 널리 부리시어 벼슬과 봉록을 주시고 민간의 깨어진 솥, 가마, 농구를 거둬들여 속히 칼과 활촉을 만들게 하옵소서.
8. 널리 인부를 모집하여 소와 말을 몰아 관리와 함께 민간에 가서 양곡 마초(馬草)를 거둬들여서 적에게 약탈되지 않도록 하고 장차의 대병의 수용을 준비하옵소서.
9. 대명에서 대군이 파출되기 전에 왜적이 전국을 다 약탈하면 않되오니 적이 화의를 요구하여 오면 그것을 딱 끊지 마시고 그 조건을 명천자에 주달하여 결정하겠다고 하고 그 사이 군사행동을 일체 중지시키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그동안에 대원의 응원병도 오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하도록 하옵소서.
10. 산승도(서산대사) 산에 돌아가 팔도 선교사찰에 있는 젊은 중들은 모두 나가 싸우고 늙고 약한 중은 불전에 지성으로 기도하여 국운회복과 민족재생을 빌도록 힘을 다 하겠습니다.
말은 하는 데 값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실행하는 데 값이 있는 것입니다.
삼척동자도 옛 성인의 말을 외우기는 하지만 80노인이라도 성현의 일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열가지 조목은 나무꾼 같은 산승의 말씀이옵니다만 실은 지혜 영달하옵신 성상께서도 실행하시기 어려우실까 하옵니다.
선조임금인 내 이 나라 이 백성을 아주 멸망시키려면 이 열 가지 조목을 시행하지 않으려니와 내 이 나라 이 백성을 내버릴 수 없거늘 어찌 대사의 말씀을 등한시 하리오. 대사는 염려마오.
임진전쟁(임진왜란) 때에 구국의 천사로서 가장 처음 소리치고 나온 분이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였다. 세상에 사내로 태어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할 일이 태산 같거늘 전쟁을 피하여 도인 벽곡(僻谷)이나 하고 오래 살면 무엇하리오. 어서 그런 말은 말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건질 도를 닦으라. 이에 곽재우 크게 깨달아 많은 공적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한 무장으로서 하늘을 감동시키는 지성심과 귀신을 울리는 기묘한 재주로 적의 간담을 써늘케 하고 쓰러지는 나라를 다시 붙들어낸 분이 이순신 장군 이라면
이러한 재변이 오기 전에 미리 10년 먹을 양식을 쌓아두고 서자와 천민도 해방시키는 등 국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탁월한 정책을 힘차게 내세운 구국의 정치가가 율곡 이이 선생이었다.
이운룡이 원균을 보고 사군(使君)이 평시에는 나라의 중책을 맡아 국록을 받아 자시다가 란시(亂時)에는 한 몸만 빠져나가면 나라와 백성의 일은 누가 하라는 말씀이오. 라고 하였다.
➜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의 구국방책(救國方策)에 대하여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은 1578(선조 11년) 34세에 율곡에게 국난을 예고하고 10만양병설을 역설하였다.
사명대사가 율곡선생과 서로 사귀기는 4년 전에 대사가 선종판사로 있을 적에 선생 이이는 예문관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동료들을 데리고 두어 차례 봉은사(선종의 본사)를 찾은 일이 있었다.(이이는 사명당보다 9살 연장자) 그때 서로 시도 짓고 뱃놀이도 하며 사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성화(聲華)를 듣고 마음으로 사귀기는 10년 전부터 일이다. 그리고 사명당은 이이에게 오늘 우리나라에서 꼭 해야만 나라와 백성이 살아나는 방책으로는 5가지를 이야기를 하였다.
1. 동서당파를 쳐부수는 것입니다.
2. 적자, 서자, 얼자(孽子)와 상놈 양반을 차별하는 악습을 타파하여 서자, 얼자도 등용하고 상놈도 차츰 양민으로 속양(速讓)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불교를 함부로 압박하고 중을 멸시하는 법을 없앨 것입니다.
4. 10년 안으로 군사 10만명을 양성시키고 성곽을 다시 쌓고 병기와 갑주(甲冑: 전쟁물자)를 10만 군병이 3년 싸울 것을 준비하고 식량을 3년 먹을 것을 예비시키는 것입니다.
5. 지방이나 중앙이나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모든 문벌권리를 떠나서 인재를 공평하게 등용시키고 백성의 부세를 가벼이 하고 나라의 용도를 절약하여 사치와 안일을 좋아하는 습관을 금지하고 근검절약하는 풍속을 숭상하며 일 잘하는 자를 상주고 노는 자를 벌줄 것이며 조정의 백관은 한마음 한뜻이 되고 임금과 신하가 한몸이 되며 백성과 상관이 한마음 되도록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10년 안으로 실행하면 이 나라 백성이 살고 그렇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이에 율곡선생은 이 말을 듣더니 벌떡 일어나 대사 앞에 세번 절하고 공손히 꿇어앉으며 다시 추연히 얼굴빛이 변하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명을 받고 율곡 이이에게 나라와 백성의 장래를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하였다.
이에 율곡 이이는 5년 후 1583년(선조 16년)에 48세에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이는 그 다음해인 1584년(선조 17년)에 운명하고 8년 후에 일본의 풍신수길은 신무기로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전쟁(임진왜란)이 터졌다.
➜ 시무육조(時務六條)와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에 대하여
시무육조 제2조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임진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며 이이는 서기 1583년(선조 16년) 2월에 48세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 2조에 10만양병설을 함)를 올렸다.
이때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 48세로 일본의 전국을 장악하여 4년 뒤에 일본 전국을 통일하였다. 풍신수길(1536~1598.8.18.) 그는 일본이 이미 이전에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총과 포술을 들여다가 신무기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또한 이때에 45세의 후금의 누르하치(청태조: 1559~1626.9.30.)는 이미 거병하여 요동지방을 석권함으로써 옛날 금나라의 영토를 확보해가고 있었다.
□ 시무육조(時務六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주요기관의 직책은 인재 본위로 모든 파벌과 권세를 초월하여 등용하라는 것.
둘째: 군력과 민력을 크게 배양하여 10년 내로 군사 10만을 기를 것.
셋째: 조정이나 민간은 호화, 사치, 유흥의 풍습을 일소하고 근검저축하여 재력을 확충 하자는 것.
넷째: 남동으로 왜적의 침략을 경비하고 북서로 여진의 노략을 방비하기 위한 수륙군 배치와 성곽을 수선하자는 것.
다섯째: 전마(戰馬) 2만필과 병기를 새로 준비하여 수륙작전상 만반의 태세를 갖추자는 것.
여섯째: 학교교육으로부터 일반 국민자치 경제자립도의 운동인 향약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자는 것.
▣ 요행보고=거짓보고=허위보고에 대하여 한마디.
징비록의 녹후잡기에서
壬辰四月十七日(임진사월십칠일):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배로 군사와 군수물품을 싣고 마산 합포 앞바다로 쳐들어오고 5일 후 임진년 4월 17일에
≪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약 700척으로 군사 20만명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함. 그리고 정유년 1597년 정월에 약 50척 이상의 배로 군사 1만 4천 5백명과 군수물품을 싣고 왔다고 봅니다. 마지막에 일본이 탈출하는 데는 50척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賊報至(적보지): 왜놈이 침입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이르니
朝野遑遑(조야황황): 조정과 민간에서 매우 황급하여 허둥지둥했다.
여기에서 다 이야기를 못하고 이 징비록(懲毖錄)과 녹후잡기(錄後雜記)에서 말하기를 임진전쟁(임진왜란)이 터지고 그 소식을 5일 후에 조정에서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당시의 나라의 안보가 썩어문드려졌다는 것이다.
일본이 않쳐들어온다고 요행보고(거짓보고=허위보고)를 해놓고 심지어 성벽을 쌓는 일조차 그만두게 만들어 놓고 그 죄가 무거움을 알고 자중한다면 역사의 대범죄를 역사에나 둘 것이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집안에서 자중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대범죄를 영구히 물어야 된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문화재와 어린아이와 온 백성 등 그 처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은 임진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난데 대하여 그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 적의 침입과 전쟁에 대비하라고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이러하므로 김성일 집안에서는 앞으로 나라를 위하여 그 큰 죄를 자중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된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그렇치않으면 그 당시 주요문화재와 백성 등 처참하고 어마어마한 피해를 당한 것에 대하여 영구히 물어야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징비록에서 말하기를 임진전쟁(임진왜란)이 터지고나서 겨우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아 전쟁 전에 고귀한 문화재와 백성의 생명을 지키지 위해 성벽을 쌓아야지 지금 김성일 집안에서 요행보고의 큰 잘못에 대한 뉘우침은 없고 성을 쌓는 일은 백성들의 삶을 지나치게 궁핍하게 하므로 즉시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괴변을 늘어놓고 있다.
학문을 진정 배웠다면 잘못을 반성도 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자중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환예방(思患豫防)이라 즉 우환을 대비하는 것이 올바른 학문이라고 보는 봐(見=思)입니다.
다만 학봉 김성일이 임진전쟁(임진왜란) 때에 좋은 일을 하였다. 그것은 바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를 모함에서 살려주게 되었다.
인생은 도고마성(道高魔盛: 명성이 높아지면 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 맞는 말이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민심을 수습하고 의령과 합천 등지가 평온해지고 명성이 높아지자 왜적에게 쫓겨 도망가기만 능사로 삼던 지방관리들은 슬그머니 그의 처사를 시기(猜忌)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의령에 정대성(鄭大成)이란 자가 왜적보다 더 무서운 도적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곽재우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이 도적떼와 더불어 곽재우를 모함하였다.
그를 시기(猜忌)한 자는 합천군수 전견룡(田見龍) 경상감사 김수(金晬) 경상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다.
곽재우 그를 도움을 준 자로는 경상도의 초토사(招討使) 김성일(金誠一)이 조사하여 중앙정부에 올리기를 곽재우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자기 재물을 던져 군병을 모집하여 크게 왜적을 격파한 순수한 민간 의병대장인데 그에게 상은 못 주나마 처벌이 웬 일이냐 하고 항변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모함에서 살아나게 되었다.
이때 곽재우는 파직된 김수(金晬)를 죽여야 된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임금의 노여움을 샀으나 윤두수(尹斗壽)의 도움으로 무사하였다.
자우간(自又間)=좌우간(左右間)에 선조가 임진전쟁(임진왜란)이 터지자 요행보고(거짓보고=허위보고)를 한 김성일을 죽이려 하였으나 류성룡의 기지로 살려주게 되어 이로인하여 곽재우 홍의장군을 살려주게 되어 일본이 전라도를 쳐들어가는 것을 막게 되어 전라도가 살아남게 되어 일본은 결국 강화조약을 맺게되어 도망가게 되었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좌우간에 학봉 김성일 집안에서 그 당시 역사의 큰 잘못을 인정하고 자중하여 앞으로 나라를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해주기를 바라는 바(所=事)입니다. 만일에 자중하지 않고 요행보고의 큰 잘못에 대한 뉘우침은 없고 성을 쌓는 일은 백성들의 삶을 지나치게 궁핍하게 하므로 즉시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괴변을 늘어놓는다면 그리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 당시 문화재와 백성들의 처참하게 당한 피해보상에 대한 역사의 큰범죄로 영구히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63번째 무료강의 종(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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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세(亂世)나 난세(難世)의 근원은 사람들이 서로 암투를 벌이고 간교한 지혜를 겨루며 허위와 가식을 앞세우는 데 있다. ♬
신축년(辛丑年) 단기(檀紀) 4354년 서기(西紀) 2021년 4월 29일 목요일.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용사(庸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