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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N <집중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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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전 정무장관
“남북 간에 비밀접촉 42차례.. 저도 북측 지역에 20번은 갔죠.”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역사에 산 증인이시죠. 박철언 전 장관을 모시고 최근 현안, 과거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 요즘 어떻게 보내셨어요?
-이제 장관을 그만둔 지 22년 되었고 국회의원 그만둔 지 13년 되었고 백수죠. 백수로써 조용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생활, 봉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백수 생활을 오래하셨네요. 최소한 10년 이상을 하셨네요.
-네 그렇습니다.
▶ 85년도에 북한 밀사로 다녀오셨잖아요. 김일성 주석도 그 후에 만났고. 그래서 최근 북한 얘기부터 여쭤봐야겠습니다. 남북 긴장 국면이 계속되고 있는데 원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된다고 보세요?
-우리 분단 사회에 있어서 지금의 남북관계가 굉장히 나쁜 상황입니다. 사실 지금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기간에는 우리가 남북 간에 비밀대화, 공개대화를 통해서 북한이 1985년 12월에 비핵화 NPT 조약에도 서명하고.
▶ 그게 85년?
-그렇습니다. 남북 간에 비밀접촉을 42차례.. 제가 상호주의에 입각해서 북측 지역에 20번은 갔죠.
▶ 장관님이 그때 20번이나 다녀오셨습니까?
-그렇죠. 20번을 저쪽에서 이쪽으로도 오고.
▶ 옆집 왔다 갔다 하듯이 자주 오가셨네요?
-그렇지 않죠. 그때만 하더라도 남북관계가 최악이었죠. 1983년 10월 9일 날 아웅산 폭탄테러사건, 남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죠. 그런 가운데 서로 대치하면 군사비 부담, 안보 부담이 많아지니까 우리로선 투자가 줄어들고 관광객도 줄어드니까 남북 간에 공존해서 평화통일로 나가야겠다. 그래서 당시 배포가 큰 전두환 대통령 주도로 남북 간 비밀 회담을 열도록 하고. 제가 수석대표로써 김일성 주석, 허담 대남총책비서..
▶ 당시에는 비선라인이 상당히 있었던 거죠?
-있었죠.
▶ 남북관계가 상당히 냉랭했는데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첫 번째 대화의 물꼬를 어떻게 터뜨린 겁니까?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린 상황에서 우리가 저쪽에 그런 제의를 했죠. 그 이전에 1984년도 아웅산 사건이 일어나고 일 년 후에 북한이 수제물자..우리가 수혜가 났을 때 제의를 해왔습니다.
▶ 인도적인 지원 요청을 북한에서 먼저 했군요?
-북한에서 먼저 했죠. 우리가 별거 아니니까 거부해야 한다는 게 많이 있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받아들였죠. 그렇게 약간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해서 1985년 7월부터 노대통령 시절인 1991년 가을까지 6년간 42차례 비밀 회담을 통해서.. 1991년 12월에는 남북 기본 합의서가 채택되고 1992년 2월 10일에는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하게 되었죠.
▶ 대화국면으로 긴장을 풀어야 하는데 북한이 거부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계속적으로 미국과의 대화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북한이 전략적으로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남한 쪽에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지난 20년간 사실 우리의 대북정책, 북핵 대응을 잘 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노태우 정권 끝나고 김영삼 정권 들어서는데 갈팡질팡 5년 동안 하고 DJ정권 들어서서 5년간 가시화 성과는 많이 내었지만 너무 일방적인..
▶ 그 당시에는 남북정상회담을 했잖아요. 그러면서 평화분위기는 있었던 거 아닌가요?
-그러나 일방적인 퍼주기를 많이 했죠. 노무현 정권 들어서도 일방적인 퍼주기를 하고 가시적인 성과는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 대북 어정쩡한 강경책, 비핵개방3000. 이렇게 20년간 그 기간 동안 소강상태는 유지된 거 같지만 북한이 엄청나게 핵미사일 능력을 재고 했죠. 그래서 지금 북한의 핵보유 자체가 북한체제의 근간이자 대미전략, 대남전략의 핵심이 되어 있습니다.
▶ 북한이 핵이 보유하고 있다는 거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최근 이를 둘러싼 핵 선제 공격론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제공격하라고 해도 미국이 하지도 않을 거고 한다고 해서 정확하게 타격해서 북한핵시설을 완파할 수 있느냐. 그것도 가능성이 적다고 봅니다.
▶ 핵무장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결국 핵이라는 게 군사적 비대칭 구조가 되기 때문에 우리도 핵을 보유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정몽준 의원도 계속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물론 북한이 핵을 안 가지도록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지만 그게 안 되는 경우 그게 될 때까지는 미국의 전술핵이나 그렇지 않으면 핵 잠수함을 동해에 상시 배치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핵을 개발해야죠. 엄청난 국제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핵을 가지지 않는 상태에선 우리가 인질로 잡혀서 365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공포의 균형이라도 취해야죠.
▶ 지금 개성공단도 3주째 가동이 중단되어 있고 남북 정책에 있어서 첨예하게 부딪히는 딜레마 구역이 된 것 같은데요. 이것이 순기능 하는 것도 있다, 남북 간의 대치국면에서도 대화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아니냐 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에. 거기에 우리 노동자들이 볼모로 잡혀 있는 거 아니냐. 충돌하고 있거든요.
-그것은 양면이 다 있지만 지금의 개성공단은 분단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희망의 싹입니다. 남북 교류 협력, 평화 공존의 상징물입니다. 엄청난 부담이 있지만 개성공단을 통해서 남과 북의 여러 가지 득이 많이 있습니다. 북에서 폐쇄한 것은 북의 여러 가지 잘못도 있지만 우리도 그 당시에 언론이나 일부 정부 전문가들이 나와서 북한이 여러 가지 도발을 하지만 개성공단은 폐쇄하지 못한다. 가난한 나라가 외화벌이를 해야 하는데 연 8천 7백 만 불, 30만 먹여 살리니까 못한다, 이런 식으로 저쪽의 자존심을 많이 건드린 점도 있죠.
▶ 그런 것은 우리 측에서도 잘못한 겁니까?
-우리가 심했죠. 개성공단은 남북 상생의 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사실 그런 측면에서 정부 당국자도 그런 측면에서 개성공단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필요하고 분단극복을 위한 희망의 싹이니까 정부 당국자도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 오해가 없도록 키워가자 이렇게 하면서 대화를 끈질기게 해야죠.
▶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이냐.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 방향을 제시했는데. 지금 워낙에 대치국면이 이어지다 보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고 지금이라도 대북특사라든지 대화의 노력이 시급하다고 보십니까?
-특사라고 하는 것은 공개리에 가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특사가 가도 별 실익이 없고 일도 성사되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과거처럼 밀사?
-비밀리에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해서 절충하는, 말하자면 전쟁 중이라도 서로 밀사 간에 비밀접촉을 통해서 정전 내지 평화 협상 하는 거 아닙니까. 때문에 특사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고 밀사는 계속 노력해서 서로가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해야 되고. 그 대화채널은 통일 될 때까지 꾸준히 견지해야 합니다.
▶ 최근 대화의 움직임이 부족했던 거 아니냐. 자칫 대북밀사라는 것을 하다가 노출되기라도 하면 또 하나의 비난 촉발 요인이 되지 않나.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요?
-밀사가 필요한데 필요하다고 해서 접촉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협상이 이루어지려면 서로가 상생하는 타결점을 우리가 마련해서 북한에 제시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의 최고 요구치는 3가지입니다. 핵보유국, 체제인정, 서방의 대폭적인 경제지원. 우리의 최대치는 같은 3가지죠. 핵은 안 된다, 체제 등 인권문제를 많이 개선해야 된다, 경제지원도 대폭적이고 일방적으로 많이 줄 수 없다. 이런 세 가지인데 최소한을 보면 결국 우리가 움직일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은 북핵 폐기입니다. 북한에서는 이미 자기들이 핵을 폐기하면 살 길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핵을 폐기해도 너희들은 활로가 있다. 말하자면 체제도 인정하고 대폭적인 지원도 하고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 등 서방과의 외교관계 수립도 보장한다는 등 김정은과 북한 수뇌부들이 봐서 우리가 핵을 포기하더라도 다른 살길이 있구나 이렇게 되어야 새로운 정책을 택하죠.
▶ 그것을 우리 남한 정부에서 정책을 담보하기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미국과 담판을 해야 합니다. 지금 북한에 대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나라는 중국입니다. 유료의 8~90프로를 중국에 의존하죠. 식량 한 20퍼센트, 무역의존도가 70퍼센트 이상입니다. 미국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B-2, B-52, F-22 띄우고 핵잠수함 와서 몇 시간 며칠 시위하는 정도죠. 그러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중국이죠. 중국이 여전히 북한에 대해서 불만, 불평이 많지만 제가 보기에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미국이 중국 봉쇄 작전을 쓰고 있잖아요. 한국, 대만, 호주. C자형으로 호위해서 지원, 미국 유일 권력체제를 계속 지속하려고 하죠. 중국은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G-2 체제. 그러니까 결국 중국은 이런 미국 전략이 계속되는 한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잡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2009년 8월에 중국공산당 중앙외사 영도소조 회의에서 북한은 여전히 중국의 전략적 자산이다. 북핵 문제와 북한문제는 분리 대응한다고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진핑 시대가 등장했으니까 그것도 회의를 합니다. 기조가 바뀌려는지 지켜봐야죠.
▶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위해서 다음 달 초에 미국으로 가잖아요. 거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죠.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 그런 다음에 일본이 아닌 중국을 먼저 가겠다, 이런 방침이 흘러나왔잖아요. 그 선택과 흐름을 어떻게 보세요?
-당연히 일본보다 중국에 먼저가야 하고. 저는 일찍부터 중국, 미국 양해 하에 중국 시진핑과 먼저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좋다고 얘기했었습니다.
▶ 당시에 북방외교를 주도적으로 하셨잖아요. 구소련 러시아와의 관계라든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85년 대북 밀사로 북한에 다녀 오셨을 때를 저희가 반추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당시에도 워낙 긴장관계였기 때문에 유서를 쓰고 가셨나요?
-제가 유서를 가장 많이 쓴 사람 중에 하나일겁니다. 밀사라고 하는 건 안보내주면 못 오니까. 1960년도 저쪽의 황태성 차관이 여기 내려왔을 때 간첩으로 몰아 사형 처리했죠.
▶ 첫 방북 당시에는 누구와 동행하셨습니까?
-평양 갈 때 군사분계선 넘어 북측 지역에서 회담할 때는 제가 갔었고. 그래서 주선해서 특사교환 방문을 처음으로 이뤄서 서울, 평양 간 교환 방문을 할 때 1985년 10월 16일 3일간 갔는데.. 그때는 장세동 부장하고 수행원 3명, 그렇게 5명이 갔죠. 북측에서 내려올 때도 9월에 먼저 왔는데. 허담 대남총책비서, 한시해 수석대표 일행 다섯 명이 왔죠.
▶ 당시 남북관계가 굉장히 엄중한 시기였잖아요. 그때 북에 갔을 때 반응들이 어땠나요? 김일성 주석을 만났잖아요.
-김일성 주석을 주석궁에서 만났죠. 회담도 하고 오찬도 했죠. 물론 그때 아웅산 폭탄 테러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그것을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았습니까.
▶ 지금 사진 나오는 게 당시 모습인가요?
-그렇습니다. 김일성 주석하고 건배하는 겁니다. 따라주면서 통일 운동하는 젊은 박철언 동지를 열렬히 환영한다, 건배를 제의한다, 그 장면인데. 그때 거기 가기 전에 9월에 허담특사, 한시해 대표가 왔을 때 장세동 부장하고 저하고 허담, 한시해,넷이서 워커힐 뒤쪽 북한 측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때 2시간 회담을 할 때 그랬습니다. 우리가 지난 아웅산 폭탄 테러 같은 엄청난 것을 해서 되는가. 북한이 시인하고 사과를 해야 될 거 아니냐.
▶ 북한은 절대 시인하지 않잖아요.
-북한의 얘기가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보고 시인해라, 사과해라 한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를 그르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것은 과거의 역사가 다 말해줄 테니까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 우리 일을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얘기했죠. 말하자면 우리가 바라는 유감 표명보다는 지극히 어정쩡한 그러나 유감표시였고. 그 이후에 우리가 북한에 갔을 때 10월 17일 주석을 만났을 때 김주석이 묘한 얘기를 했었죠. 과거는 백지로 덮고 그쪽에서 우리를 초청했고 김일성 주석을 전두환 대통령이 초청한다는 얘기가 오갔을 거 아닙니까. 과거는 백지로 덮고 양측에서 만나서 앞으로 통일되고 문명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방안을 논의하도록 하십시다. 이런 식으로 완곡하게 얘기하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 결국 과거에 대해서 명확한 사과는 없었네요. 북한의 특징인거 같아요.
-특징이라기 보단 그것을 만약 시인하게 되면 사실상 자기들이 살인, 범죄를 시인하게 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 측에서 먼저 요구한 상황에서 서로 24시간 녹취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죠.
▶ 당시에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있었습니까?
-그때는 없었습니다. 현장에는 없었는데. 1985년도는 김일성 통치 시대였고. 1945년부터 1974년까진 김주석 단독 통치 시대고. 1974년부터 김주석이 사망한 1994년 7월8일까지 20년은 공동통치기간입니다. 74년에 후계자로 김정일 위원장을 내세우고 당 중앙으로 초대해서 내정문제, 경제문제는 김정일 위원장이 맡고 외교, 국방, 남북 문제는 김일성 주석이 전담하는 그런 시스템이었죠.
▶ 돌이켜보시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 3대를 평가한다면 어떤 느낌이세요?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세히 설명 드리면 1945년부터 1974년까지 김일성 주석의 단독 통치 기간이고 김일성 주석은 중국과의 연계도 강화되어 있고 당과 군의 기반도 튼튼하니까 상당히 자신 있는, 경제도 어느 정도 안정된,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상대적 자주성을 내세우는 입장이었다면 1974년부터 1994년 20년간 공동 통치 기간 중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군에 기반이 약해서 선군정치를 했습니다. 군에 상당한 파워와 경제적 역량을 집중 지원합니다. 그래서 그때 핵미사일 개발이 엄청나게 박차를 가하게 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대북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로서는 1991년도에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비핵화 선언을 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들어선 1988년 7월 7일 특별선으로 북방정책 선언해서 우리가 그때 고하기를 중국, 소련 등 공산권과 수료를 한다. 그 대신에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서방과 수교하는 것을 우리가 반대하지 않고 지원한다. 공존하고 국제부대에서 과한 경쟁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우리는 다 이루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임기 기간 동안 39개국과 수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전방위 3개 외교시대를 열었는데 북한은 내부의 체제 경직성,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후에 등장한 93년 김영삼 대통령 들어서면서부터 갈팡질팡 했잖아요. 북방정책, 북방외교의 진정한 철학적 바탕을 모르는 다음 정권에서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 북한은 살 길이 없는 거죠. 경제적, 외교적, 재래식 무기가 대비상 현격하게 떨어지니까 핵미사일 개발에 집중해서 살길을 찾은 겁니다.
▶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김정일 위원장 시대에는 선군정치, 군의 기반이 약하니까 군에 많이 하다보니까 경제가 피폐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중요 항만이나 광물자원은 중국에 거의 50년 100년 임대를 해줍니다. 중국이 그 임대권을 가지고 있죠.
▶ 이른바 광물을 팔아서 먹고 사는 거죠?
-그렇죠. 김정일 위원장은 군에 많이 하고.. 대신에 핵과 미사일 능력은 엄청나게 재고시켰죠. 2010년 9월 28일에 갑자기 김정은 위원장이 대장으로 하루아침에 등장했죠. 김정일 위원장이 죽은 게 2011년 12월 17일이니까 1년 2~3개월간 후계수업을 시킨 거죠.
▶ 충분하지 못했던 거죠?
-충분하지 못했죠. 김정일 위원장이 20년 후계수업을 했다면 김정은 제1비서는 1년 2~3개월 하다가 2012년부터 독자통치를 하니까 사실 굉장히 취약하죠. 당과 군에. 작년 12월 12일에 1만 km 은하 3호를 발사하고 지난 2월 12일에 3차 핵실험을 한 것은 3가지 목적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는 내부 결속용이죠. 화폐 개혁도 실패해서 북한의 경제 사정이 안 좋으니까 내부를 결속시켜야 합니다. 또 카리스마가 없으니까 국내외 카리스마를 정립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중요한 대목이 자기방어용입니다.
▶ 아직 권력 체제가 견고하지 못하다고 봐야 되나요?
-불안정 요인이 상당히 있죠.
▶ 안에서 암살과 테러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그런 가능성 보다.. 할아버지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당과 군에 거느리고 있다 보니까.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지 않고 어려워지니까 결국 경제생활 수준 향상이 정권의 장기 안정 여부를 판가름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3번째 목표는 김정은 비서의 과격 도발시위의 목표는 자기방어용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핵미사일 개발을 위해서 ICBM과 핵실험을 했는데 세계에서 떠들고 일어났잖아요. 그 기간 중인 3,4 월에 우리는 키리졸브, 독수리 합동훈련을 해서 B-2, B-52, F-22 이 오고 연습하니까 이렇게 해서 선제타격을 당할 수 있지 않은가 당연히 그걸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그렇게 할 경우는 불바다가 된다고 과시하는..
▶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우리에게 선제 도발 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겁니까?
-지금 국지도발 가능성은 있죠. 과거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 시절보다 불안정하니까 있죠.
▶ 밀사 등 여러 움직임이 있었는데 결국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가 안 되었잖아요. 왜 안 되었을까 이게 궁금한 대목 아닙니까?
-1985년 10월에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도 만나고 허담, 한시해 대표들과 집요하게 이야기를 해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해서 돌아왔죠. 돌아오니까 우리 남한의 수뇌부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갈 때는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자고 했는데 돌아오니까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서 당시 총리니 여러 사람들이 외무장관, 비서실장, 이런 여러분들이 전부 반대했습니다. 왜냐. 위험한 지역에 가서 결국 인사드리는 것밖에 안되고 자칫하면 오히려 망신을 당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위해요인도 있고..
▶ 만나봤자 구체적인 진전 사안을 얻을 수 없다?
-그렇게 태도가 바뀌었는데 그때 마침 부산 앞바다 청사포에 간첩선 하나가 들어오다가 우리가 포격해서 좌초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전 대통령께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북한 측 대표단한테 얘기해서 정상회담을 조기 성사할 필요가 없다, 서서히 늦추어라 이런 얘기가 있어서 늦어지게 된 거죠.
▶ 남북문제, 과거 얘기가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박철언 장관하면 킹메이커를 가장 많이 떠올리잖아요. 별칭이 마음에 드십니까?
-사실 킹메이커 라기 보다는 나라와 사회가 불안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타계하고 해법을 마련하고 실천해가는.. 말하자면 큰 일꾼 내지는 기획정치가였다고 보는 게 맞겠죠.
▶ 궁금한 게 보면 이 사람이 다음 대통령 감이다 라는 감이 옵니까?
-감이 온다기 보다 제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모시고 있었는데 다음 노태우 대통령 시대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저로서는 총력을 다해서 준비를 하고 뒷받침해드렸고 그래서 노태우 시대를 열었고. 곧이어 두 달도 안 되서 4.16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정계개편을 해서 안정된 가운데 일을 해보자 이렇게 해서 3당 통합을 하고..
▶ 역사적인 3당 통합이죠?
-내각제를 통해서 YS, DJ한테 기회를 주자 이런 생각이었죠. 내각제가 되면 한 사람은 수상, 한 사람은 대통령. 못하면 또 바뀌니까. YS, DJ, JP 한테 한 번씩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함께하는 정치니까. 통일에도 대비하고. 그런 내각제를 하기로 하고 3당 통합을 했는데 YS가 배신해서 못했죠.
▶ 지금도 사이가 안 좋잖아요? YS 얘기가 나왔으니까 비자금 3천 억 원을 지원했다고 언급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택도 없는 얘기다는 입장이잖아요.
-노태우 대통령께서 팔순이 돼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증언을 했죠. 그 당시에 이원조, 금진호 씨를 통해서 3천억을 조성해서 보낸 거, 그 사이에 녹음한 녹취록도 있으니까 부인할 수 없죠. 다 끝난 일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 실제 있었다면 아무리 썼어도 어딘가 있을 거 아닙니까.
-실제로 있었으니까 있었다는 얘긴데..그게 허위라면 노태우 대통령이나 저나 이것에 대해서 당연히 명예훼손죄로 고소 고발이 들어오고 지금 여기 앉아있을 수도 없죠. 그건 진실인데. 그것을 문제삼기보다는 진실의 역사를 증언함으로써 이제 우리 권력 운영도 투명하고 맑고 밝은 정치가 있어야 되죠.
▶ 그때 이 어마어마한 돈을 주면 어떤 형태로 줍니까? 현금으로 줍니까?
-그 당시는 실명제도 안 될 때니까 전부 수표죠.
▶ 3당 합당 당시에도 40억 원 정도..
-제가 직접 준 것도 수표로 주었죠. 42억 원하고 미화도 주고..
▶ 수표가 한 장 짜리 입니까?
-1억짜리로 해서 주죠. 일련번호를 제가 다 메모를 해놓았다가. 제가 8년 전에 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다 공개했습니다. 제가 정치보복 당하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당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증언으로써 하는 것이지 공소시효 다 지나서 김영삼 대통령 처벌 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여야지도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장에 있는 저로서 증언을 한 겁니다.
▶ 지난번 회고록에서 87년 CAL기 폭파사건이 굉장히 중요한데 빠져있더라고요. 김현희가 주범이냐 아니냐 라는 논란이 아직도 있잖아요.
-그거는 공개재판을 통해서 여러 가지 증거들이 확인되었고 확정된 것이죠. 그것을 가지고 지금 아니다 라고 얘기하면 좀 곤란하죠. 그것은 그 당시에 수사 기록이나 재판기록이나 모든 증거를 통해서 김현희 자신의 자백을 통해서 입증된 겁니다.
▶ 그런데 왜 이 논란이 계속 된다고 보세요?
-이해할 수 없는 게 그것은 일종의 친북 좌파들의 오해나 나쁜 의도. 좋게는 오해, 나쁘게 얘기하면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닌가 생각되죠.
▶ 그때 이 문제는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구술을 안 하신 겁니까?
-수사과정은 수사기록도 전부 다 공개되었는데 제가 거기서 새삼스럽게.. 바른 역사를 위한 증거 1권, 2권은 비사들, 공개 되지 않았던 사안들만 증언하는 것입니다.
▶ 5공 청산 작업이 당시에 대단했잖아요. 산 넘어 산 이었을텐데.
-사실 5공 청산이라고 하는데 이게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왜냐하면 5공과 6공은 같은 뿌리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비리가 나타나면 법에 의해서 처리되면 되는데 문제는 그 당시 5공 청산작업이 크게 문제되고.. 마무리 된 게 새 정권이 출범한 1988년 2월 25일. 1년 10개월 후인 1989년 12월 15일 11개항을 합의하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그것이 일어나게 된 2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 정권 출범하고 총선을 했는데 여소야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YS, DJ, 야당에서 집요하게 5공 청산 마무리해라..
▶ 정치적인 압력?
-그렇죠. 물론 광주 문제도 제기했고. 또 하나는 6공의 핵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취임준비위원회 멤버들. 최병렬, 현홍주 등 있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이 5,6공은 차별화해서 청산되고, 차별화해야 6공의 이미지가 올라간다. 이런 잘못된 생각..
▶ 원래 정치에서 지지율이 안 좋으면 지난 정권을 밟으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것이 저는 잘못되었다고.. 노태우 대통령 생각이나 저의 생각하고도 전혀 다른 생각. 같은 뿌리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되죠.
▶ 원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상당한 신뢰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정치에 입문하셨고. 88년 11월 연희동에서 만났을 때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서 나를 죽여라 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맞습니까?
-그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 주변의 형, 동생, 처남 다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서 나를 죽이라는 격한 얘기, 말하자면 당시 전 대통령 내외께서는 6공의 핵심이 의도적으로 그런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오해했는데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야당이 그것을 요구했고, 취임준비위원회 멤버들의 잘못된 판단, 두 가지가 그 요인이었죠.
▶ 81년이었던가요, 계엄령 해제를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당시 3허인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씨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된 다음에 첫 해외 출장으로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가는데 한미정상회담을 하러 가시게 되는데..제가 보기에 민주주의 나라인 미국에 갈 때 계엄을 해제하고 당연히 가셔야 되는데. 그래야 되기 때문에 대통령 결심을 받아서 계엄 해지하고 간다 했는데. 3허, 안기부장, 차장 이런 분들이 구부에서 이게 말이 되느냐, 한국을 떠나 상당기간 있는데 계엄을 해지하고 가는 게 말이 되느냐. 다시 뒤엎어서 그대로 한 채 간다, 이래서 제가 안 되겠다 싶어서 결제서류를 만들어서 대통령께 다시 올라갔죠. 우병규 수석하고 올라갔는데. 당시에 비서실장께서는 허화평 수석의 보좌관이죠, 입김이 워낙 세니까 자기는 결재를 못하겠다고..결재를 해야 대통령한테 그것을 뒤엎는 결재로 가는데..그래서 제가 그러면 대통령 결제란이 있고 비서실장 결제란이 있으니까 보았음이라고 해주십시오. 이래서 전대미문의 보았음이라는 결재를 받아 대통령께 올라갔습니다.
▶ 보았음? 싸인도 아니고요.
-그렇게 대통령께 올라갔더니 장단점을 설명 드렸더니 대통령께서.. 우리가 그랬죠. 지금 대통령 가시다고 해서 국내에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 가면 정상회담을 하고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세계 언론을 상대로 인터뷰하는데 한국에서 인권을 완전히 억압한 체제하에 미국에 와서 연설하면 그 질문 공세, 비판 공세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대통령께서 다시 뒤집고 싸인을 해서 계엄을 해지한 채로 갔죠. 그래서 아니다 다를까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대통령께서 연설하시는데 미국 기자가 묻습디다. 대통령이 답변하길 어느 나라나 계엄 하에선 인권이 제한된다. 지금 해제하고 왔다고 해서 잘 넘겨갔죠.
▶ 역대 대통령의 긍정, 부정 여러 가지 평가가 있고 지금도 진행 중인데 지금 다 법정에 섰잖아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현대사 60년 역대 대통령을 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2차 대전 후에 수립된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만 산업화와 민주화를 60년간 이룬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을 제외한다면.
▶ 소위 통합이라는 가치를 정치에서 항상 외차잖아요. 오랜 뿌리가 있는데 그런 아쉬움이 있고. 그렇다면 앞으로 박철언 장관님의 꿈은 뭘까? 킹메이커가 아닌 킹으로서의 도전 꿈은 버린 겁니까?
-저는 약속을 지키면서 일평생 살아왔습니다. 정치계를 떠난 지 13년입니다. 정치판에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제가 26년째 하고 있는 장학금 주고 장애인 돕고 있는 한반도 복지 통일재단, 대구에서 사단법인 대구연구발전소 이사장으로, 13년간 변호사 개업해서 전부 무료상담하고 있고 시인으로서 조용하게 시작활동하고..
▶ 한때 여자들한테 인기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글쎄요, 인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지금은 어떠세요?
-제 나이가 벌써 많이 되지 않았습니까. 나이를 직접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국가기밀에 속한 사안이기 때문에 궁금한 사람은 인터넷 찾아보면 나이가 나오죠.
▶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고요. 다음에 또 모셔서 숨겨진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