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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N <집중분석>
매주 월~금 오후 5시
재방 익일 새벽 1시, 새벽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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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봉 (천안함 유족), 전준영, 이은수(생존 병사)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잃은 동료들의 복수위해 선봉장으로 나설 것”
▶ 북한 김정은 제 1위원장이 사흘째 군 부대를 시찰하고 전투기술장비를 점검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일이 천안함 3주기 라는 것을 감안하면 김정일 위원장의 의도가 새삼 궁금해집니다. 정운갑의 집중분석 오늘은 당시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VCR)
2010년 3월 26일 마흔 여섯명의 희생자. 온 국민에게 놀라움과 슬픔을 안긴 천안함 폭침 사건. 천안함 폭격 3주기를 맞아 전준영, 이은수 생존장병과 유족 고 나현민의 아버지 나재봉씨를 만나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천안함 3주기를 맞아서 세 분을 모셨습니다. 세 분 자리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자기소개를 듣고 싶네요. 나재봉씨부터 말씀해주시죠.
나- 저는 나현민 상병 아버지 나재봉입니다.
▶ 당시 나재봉 상병?
나-일병이었죠
▶ 이쪽부터 말씀하시면
전-저는 그때 당시 병장이었고요 이름은 전준영입니다.
▶ 당시 병장이셨군요?
전-네
▶ 우리 이은수씨는?
이-저는 당시 막내였고 이병이였습니다.
▶ 삼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상처는 아물지 않았죠. 이런 질문을 드리는 저도 가슴이 아픈데요, 세분은 오죽 하실까 생각이 듭니다. 고 나현민 장병의 아버지인데 매년 이맘때만 되면 누구보다 가슴이 너무너무 아프시겠어요.
나-이맘때가 아니라 늘상 아프죠. 때 되면 자식이 나타나고 아픈 게 아니고. 늘상 빈자리가 갈수록 커지니까 더 심한 것 같아요.
▶ 두 분은 당시 생존자이잖아요.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기억을 잊을 수 없을 거 아니에요? 생생하죠? 우리 이병은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있었어요?
이-저는 그때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구조가 됐었죠.
▶ 샤워를 하다가 커다란 굉음을 들은 겁니까?
이-그렇죠. 저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황에서 굉음을 듣고 몸이 옆으로 넘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 전 병장은 그 당시에 어디에 있었어요?
전-저는 침실에 있었습니다. 침실에 누워서 쉬고 있는 상황이었고요. 쉬고 있는 상황에 갑작스런 굉음이 크게 한번 들렸고요. 그리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까 배가 오른쪽으로 다 기울러진 상태였고요. 그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끔찍합니다.
▶ 당시에 충격이 굉장히 컸었겠네요?
전-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큰소리였습니다.
▶ 그 순간에 의식을 잃었었나요?
전-잃기 보다는 몸이 공중에 붕 떠서 돌았다고 할까요. 공중에 붕 떴습니다.
▶ 얼마나 커다란 큰 충격이었으면 붕 떠서 돌았을까.
전-네
▶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뭔가 이상한 조짐 같은 건 없었습니까?
전-보통 함에서 이상한 조짐이 있으면 함계에서 함구령을 내립니다. 실제전투배치 함구령을 내리면 저희는 1분 내에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각자 지정된 장소로 뛰어갑니다. 그러나 그때 상황에서는 그런 구령도 없었고요.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 이은수 씨는 그때 샤워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굉장한 충격이 있었고. 배로 올라가 봤을 거 아닙니까? 옷을 입고 올라갔어요? 아니면 정신없이 그냥 샤워중에 뛰어나갔어요?
이-그때 화장실에서 나올때는 아무것도 안 입었었는데 중간에 갑판에 올라오기 전에 안재근 선임이 저한테 밑에서 옷하고 신발과 구명조끼를 갖다줘서 그것을 입고서 저는 배위로 올라왔죠.
▶ 배 위로 올라와보니 어땠어요? 반쪽짜리 배는 이미 사라진 거 아닙니까?
이-맞아요. 저는 안경을 안 쓰고 있어서 자세히는 못봤는데, 구조되면서 배를 봤는데 반이 뒤쪽이 사라졌더라고요.
▶ 두 분과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이 한순간에 보이지 않았던 거 아닙니까?
전-그렇죠.
▶ 경황이 없었겠네요.
전-정신이 너무 없었다고 하면 저희가 구조하는 내내 힘들었을텐데요. 사태 파악을 빨리 했기 때문에 현재 58명이라 인원이 안전하게 구조된 것 같습니다.
▶ 그때는 차분하게 구명조끼를 입고서 헤쳐나온 겁니까?
전-구명조끼는 많이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요. 일부 몇 명만 입은 상태였고. 당시 상황이.. 함장님께서 대원들 안정감 찾을 수 있게 우리 살 수 있으니까 침착하고 다같이 나갈 수 있으니까 당황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 당시에는 공격을 받았다는 생각은 했나요?
전-저도 계급이 병장이다 보니까 그 상황을 느끼자마자 저는 개인적으로는 전쟁이 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전쟁이고 정말 큰일이 일어났구나.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전-네
▶ 이미 전쟁이 났고, 배의 반은 보이지 않고. 안타깝지만 나현민 상병은 반쪽 배에 있었던 거죠 위치가?
나-함 이쪽에요.
▶ 아들과 마지막 통화는 언제였어요?
나-휴가는 한달 전에 나왔었고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통화는 아직 계급이 낮다 보니까 자주는 못하고 선임들이 빌려준 휴대폰으로 가끔 부모님 걱정 때문에 전화가 한번씩 온 게 불과 보름 전 일겁니다.
▶ 나현민 당시 이병은 두 분도 다 알고 있는 동료 아닙니까? 어땠습니까? 아버지로서는 이 자리 자체가 가슴 아프겠어요.
전-현민이 같은 경우는 항상 웃는 아이였습니다. 선임으로서 후임한테 부탁하면 다 웃으면서 저희가 말한 것을 다 해줬고요. 개인적으로 현민이 한테 미안한 감정들도 많이 있고..
▶ 살아계신 분들은 다 죄인이 된 느낌이겠어요. 사실은 그게 아닌데..
전-네.
▶ 전준영씨는 당시 제대할 즈음이었으니까 복무를 하면서 동료들과 여러 에피소드가 많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전-큰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배 청소를 할 때 외부에서 물청소를 한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청소를 하는데 날아가는 갈매기 배설물을 맞은 기억이 있고요. 동기들이 많다보니까 같이 먹고 즐겼던 것이 많이 생각납니다. 에피소드를 말하려고 하니까 너무 많아서 콕 찝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 배안에서 같이 생활하면 가족 이상으로서 서로 몸을 부딪치고 마음을 나눠야 되는 거 아닌가요?
전-그렇게 해야지만 천안함이라는 배가 운영이 잘 되기 때문에 마음이 잘 안맞았다면 배 분위기 자체도 많이 흩트러졌을 겁니다.
▶ 최근에 어디서 보니까 이상준 준사가 당시 전사했는데 이상준 준사와 손목시계와 얽힌 일화가 있다고 제가 들었거든요. 어떤 일화입니까?
전-제가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는데요. 이상준 하사가 차던 시계를 제가 지금 차고 나왔습니다.
▶ 저도 보여주세요. 이것은 언제 서로 바꿔 찬겁니까?
전-제가 강제적으로 뺏었다고 할까요. 제발 차고 싶으니까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벗어주시더라고요. 제대 선물로 가져가라고 하시더라고요.
▶ 이게 하나의 유품이 되었네요?
전-네
▶ 이상준 준사 고모님도 이 내용을 알고 계시겠죠?
전-저도 그것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 아들의 귀한 유품을 가지고 있는..
전-이상준 하사는 제 시계를 차고 있었고요.
▶ 이상준 하사는 전 병장의 시계를 차고..
전-유품 중에서도 제 것을 차고 있던 걸 확인했습니다.
▶ 이은수 씨는 당시 막내였는데 내무반에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훨씬 더 당혹감이 크지 않았을까요?
이-그렇죠.
▶ 배안에서 탈출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위에서 빨리 올라오라고 밑에서 물이 들어오는 것 같으니까 빨리 올라오고. 우선 위에서 계속 소리 쳤어요 다들. 물이 차니까..
▶ 나현민 장병은 3월 26일에 사건이 터지고 다음 달 되어서 시신을 찾았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믿고 싶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나-그렇죠. 28일부터 백령도 현지에 내려가서 해남구조대 배에서 시신 인양할때까지 계속 지냈죠. 그런데 나현민 상병은 늦게 서른 두 번째 나왔어요. 그나마 늦게라도 나온게 다행이지만..
▶ 아직도 시신을 못 찾은 장병이 있습니까?
나-여섯 장병은 산화된 채로 못 나왔죠. 그 당시 상황에서는 시신을 찾는 자체만으로도 축하한다고 박수칠 정도였으니까요. 남들이 보면 외람된 것 같지만. 어떻게 자식 시신을 보고 박수치고 축하한다고. 그날 소주 한잔도 마셨지만..그 정도로 애절했죠.
▶ 나재봉씨에게 있어서 나현민 일병 아들은 어떤 아들이었어요?
나-자기 자식..어떻게 보면 나쁘게 표현한 것을 찝고 싶어도 이제 스무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까. 한참 커나갈 나이에 세상에서 꿈도 제대로 꿔보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어도 시원치 않죠. 그런 아들이 희생될 때는 차마..지금도 맺히죠.
▶ 눈물을 안 흘릴수가 없죠.
나-주위에서 보기에는 그런 것을 내색 안하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인관계를 기피하게 되더라고요. 가족끼리 만나면 서로 우리끼리야 흉이 안 잡히니까 웃고 있겠지만 사실은 밖에 나가서 좋다 나쁘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웃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 3년동안 웃음을 잃고 사신거잖아요.
나-3년이 아니라 평생 내가 죽기전까지는 가슴에 묻고 살아야죠. 그것을 잊어버리려면 어차피 내가 빨리 죽는게 아들한테 미안한 감이 덜해지겠죠.
▶ 정말 가슴아픈 말씀시네요. 먼저 죽는게 아들한테 미안함이 덜 하다. 부인과 가족들도 여전히 큰 충격에서 지내고 계실 거 아닙니까. 어떤 분은 인터뷰에서 보니까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물속에 있는 아들 때문에 겨울에 보일러를 켜지 않고 지낸다. 똑같은 생활이시겠죠.
나-그런분들 많습니다. 정봉구 어머님도 그렇고. 아예 김치 하나 이상을 놓지도 않고. 자식 먼저 보내놓고 뭘 먹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니까 먹긴 먹겠지만 먹는 것 자체도 자식한테 미안할 따름이죠.
▶ 살아있는 두 장병이 아들같은 역할을 해야죠. 당시 천안함에 있던 장병들은 전부 하나가 되었을 것 같아요.
나-후에 들어보니까 그래도 제일 단결이 잘 되어있고 장병들 우애도 1순위로 좋았다고 그렇게 소문이 나있더라고요.
▶ 전준영씨하고 이은수씨하고는 천안함 사건 당시에 별다른 외상이 없었는데. 외상이 없을 경우에는 국가유공자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하던데. 지금 유공자가 못 되었습니까?
전-지금 현재 유공자는 아니고요. 전역하고 1년 지나서 유공자 신청을 했습니다. 1년 그 기간동안 제가 병원을 다니지 않아서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점이 돼서 많이 힘들어서 2~3개월 정도 병원을 다녔는데 그걸로 해서 국가유공자를 신청했는데 안 된다는 통보가 나왔고요.
▶ 정신적 상처를 받은 경우는 해당이 안된다고 하는 건가요?
전-예.
▶ 당시 장병으로서는 정부 조치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아요.
장-그 당시에는 안 되었다고 해서 그런 서운함 보다도..사람..
▶ 한분 한분이 당시를 생각하니까 목이 메이는군요. 살아있는 자체에 대한 기쁨, 감사..
전-그것으로 위안삼고..
▶ 정부가 나서서 더 잘해줘야죠.
전-그렇죠.
▶ 정부가 그러면 안되는 거죠. 눈앞에서 장병들이 죽어나갔고. 여기 두 장병들도 목숨이 경각에 있었던 것 아닙니까. 이것은 정말 우리 아버님 입장에서 봐도 울분이 나올 것 같아요.
나-당연하죠. 전쟁이든 북의 도발이든 죽어서 희생의 댓가가 유공자 훈장을 받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다고 해서 유공자 훈장을 안 주면 국가가 생각할때는 장병들은 희생을 저버리지 않고 했는데. 국가가 장병들을 대한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당시에 있던 장병들 누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크잖아요. 계속 치료 많이 받으셨죠?
이-정신적인 치료요? 그런것을 받으려고 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제가 받고 싶다고 해도. 그게 정신적인 문제라서 함부로 병원을 찾아갔다가 나중에 저한테 피해가 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고. 나라에서 정신적인 치료를 받아보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어요.
▶ 국가에서 관리를 안했군요?
이-그렇죠.
▶ 방송을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 정치 담당자들이 반성들을 많이 해야겠네요. 엄청난 사건이 있으면 살면서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두 분도 실제 그런 것을 많이 느끼고 계실 거 아닙니까?
전-저 같은 경우에는 한번 천둥이 친 적이 있었는데요, 천둥 치고 바로 주저앉고 소리 지르게 됐거든요. 일상생활을 지내다 보면 큰 소리에 많이 예민해지더라고요. 그 당시에 큰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자동차 크락션마저 들으면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럽고..
▶ 소리가 들리면? 그때 엄청난 굉음에 대한 휴우증인거죠?
전-네. 꿈에서도 침몰하는 꿈도 꾸다 소리 지르면서 깨고.
▶ 이은수 일병은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요?
이-좀 전에 준영이 형이 이야기 했었는데. 천둥소리 이야기 했잖아요, 저도 전역후에도 그런 것을 계속 겪었었고. 저 같은 경우에는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에 시신하고 다치신 분들 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었거든요.
▶ 당시 근무하면서 연평도 포격에서도 이송역할을 했군요.
이-그것을 하면서 천안함하고 연평도 하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그런 부분이 너무 힘들어서 남몰래 혼자 울기도 많이 했었고. 전역 후에도 갑자기 불이 꺼진다거나 엘리베이터안에 혼자 있으면 솔직히 많이 힘듭니다.
▶ 이 즈음에서 해군에 내가 왜 지원했을까? 정부에 대한 원망, 후회는 없습니까?
전-후회는 하지만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 국가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보상한다고 해도 지금 두 장병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부가 제대로 조치를 못한 문제들, 그런 걸 보면 우리 나재봉 선생님께서는 더욱 화가 나시겠어요.
나-그렇죠. 한간에는 보상으로 해줬다고 하지만 국가가 보상해준건 아니에요. 국민들께서 참여를 많이 해주신거죠. 자식 보내놓고 보상이라는 것 자체를 논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장병들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도록 안보의 교육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되는데 대부분 당사자가 아니 사람들은 그 순간 뿐입니다. 그런 천안함 사건이 있었지, 지나고 나면 금방 까먹습니다. 당사자만 헤아릴 수 있지. 저희같은 민간인이 이런 목소리로 떠들어봐야 결코 어느 누구도 귀담아 주지 않는거죠.
▶ 정말 국가의 어마어마한 책무인데 그런 외침과 메아리를 제대로 안들으면 장병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나-6.25 전쟁 이래 어떻게 보면 천안함 사태가 초유의 사태겠지만. 그 전에 그렇게 큰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계기로 해서 정부나 국가도 특단의 조치를 해야 되는데. 실제로는 장병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간 저희들 자식과 군에 속한 장병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했으면 국가도 장병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깊이 새겨주었으면 합니다.
▶ 당연히 국가가 해야될 일이죠. 2010년에 발생했던 천안함 문제가 당시 키 리졸브 훈련과 맞물려서 일어났던 일이었잖아요. 최근에도 키 리졸브 훈련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연일 무력도발을 얘기하고 있는데. 두 분께서는 북한의 이런 모습을 보면 굉장한 분노가 있겠습니다.
전-너무 화가 나고요. 도대체 그렇게 해서 남는게 뭔가 그런 생각도 합니다. 자기 국민들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있는데 핵무기 만들고 로켓 만들고. 그런 모습 봤을때 바보같은 짓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은수 일병은 어때요? 북한이 또다른 움직임을 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이-저는 지금 전역을 한 상태고 군인 신분은 아니지만 예비군으로 편성되서 다시 들어오라고 하면 그때 하지 못한 복수를 하려고 다시 들어갈 겁니다.
▶ 동료 장병들을 위해서?
전-생존자들 다들 만나면 그 이야기 많이 합니다.
▶ 아버님도 직접 응징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을 것 같습니다.
나-저도 선봉자로 서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러나 사실 키 리졸브 같은 훈련이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한 지붕 아래서도 정치권이나 우리나라 명분이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것을 인지 못하는게 답답하죠. 그 양반들 자체부터 벌써 불신을 갖고 있고. 종북세력이나 좌파계층들은 어떻게 보면 자기의 직업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지만 실제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꿈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 김정은 제1비서관이 백령도를 계속 시찰하고 있잖아요. 서해안이 지역적 특성상 당시 근무했을때도 항상 긴장도가 있었죠?
전-출동을 나가게 되면 실전을 자주 붙게 됩니다. 북한의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실전 전투배치 붙어서, 그런 사태를 많이 느꼈습니다.
▶ 북한 피격 당시에 우리 해군이 아무 방어를 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잖아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요.
이-그때 제가 느끼기에는.. 제가 사건이 있기 1시간 근무를 섰었는데 별다른 특이사항도 없었고 위쪽에서 내려온 보고도 없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방어를 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면 솔직히 굉장히 억울합니다.
▶ 어디 인터뷰를 보니까 천안함 용사들은 패전병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셨던데.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시죠? 어떤 근거에서인지 부연 설명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전-개인적으로 생각했을때는 천안함 사고가 안 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텐데. 북한 함정, 잠수함이 3일동안 안보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항이 저희에게 전달이 안된걸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라도 그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었다면 이런 사고가 안 났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 전준영씨는 지금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인을 만난 계기가 특별하다고 들었는데.
전-기자회견에 나가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화면을 보고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개인미니홈피를 뒤져서 찾았다고 합니다.
▶ 부인이 기자회견을 보고서 너무 가슴 아프다?
전-위로를 해주고 있었는데요. 전역 후에 보니까 미니홈피를 보니까 많은 글을 남겨주셨는데 그 중에 한 분 이셨거든요. 끝에서 제 옆에서 위로 해주시고. 매일매일 연락 해주셔서 위로를 해주셨거든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 6월 5일날 만나서 맛있는 밥도 사주고 그랬습니다.
▶ 사진 보니까 아기도 있네요?
전-네
▶ 앞으로 자라날 아이에게 어떤 대한민국에서 살게 하고 싶습니까?
전-살짝 걱정되는 게 지금 이런 분위기로 20년, 30년이 지나가게 되면 제 아이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됩니다. 우리 아버지도 이 나라를 위해서 큰 희생을 하셨고 좋은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많이 인지시켜주고 싶습니다.
▶ 지금 한편에서는 패전병 이런식으로 국가유공자로 제대로 처리를 안해주고. 지금은 정말 그 순간 어마어마한 고통과 엄청난 사건을 겪었지만 아직은 국가의 움직임에 너무 아쉬움이 큰거죠. 지금 이 일병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이-저는 지금 대전대학교 병원경영학과 다니면서 3학년이고 학생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 앞으로 정부에 대해서 이런 것은 해주었으면 좋겠다. 뭘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 헌신하는. 이것은 좀 잘못된것 아니냐 그런 게 있으면 한마디 외쳐 보세요.
이-제가 생각하기에 군인들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전방 각지에서 피땀 흘려가면서 훈련하고 도발에 대비하고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국가는 지원도 많이 해주지 않고. 저희같은 경우에도 홀대받고.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커서 그런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재봉씨야 이루 말할 수 없겠죠.
나-저희도 바란다면 이제 천안함 국가 행사를.. 사실은 보훈처에서 향후 5년동안 해주기로 했습니다. 2년 후에는 시효가 끝나겠죠. 최첨단 무기나 장비가 문제가 아니라 향후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안보에 대한 교육이나 후속조치로 이것을 정부 공식 행사로 계속 지정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마지막으로 먼저 간 아드님께 꼭 하고 싶은 있으면 이 방송을 통해서 한 마디 해주세요.
나-할말이야 많죠. 밤을 지새워도 다 못 나눌텐데.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할까, 우리 국가가 미안하다고 할까. 뚜렷한 목적이 없어요. 그런데 해주고 싶은 건 북한체재. 정신병자 같은 놈들한테 당했다는 것이 억울하고. 그 애비의 아들은 더 심한 정신병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국지도발이 또다시 한번 생긴다면 현 정부에서 46용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한번 강력하게 응징해준다면 한이 풀어지겠습니다. 그런것을 봐야 자식을 볼 면목이 있지, 현 상태에서는 자식한테 같이 지내주지 못한 거, 뭘 못한 것. 이것은 한 개인의 욕심일 뿐이고요. 늘상 아버지라는 사람이 우리 46용사 장병들 명예가 실추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 만약 도발이 온다면 제대로 응징해줬으면 좋겠다?
나-강력하게. 말로만..
▶ 연평도때 두 분도 답답했겠어요? 그렇게 당하고도 속수무책으로 또 당했잖아요.
나-천안함 사태는 어떻게 보면 북의 소행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고 해서 그렇다 치지만 연평도 도발때는 북의 만행이 확실시 되었는데 그때도 백배 천배 응징한다고 했는데 결국엔 말뿐이지 않습니까. 지나간 것은 덮어둘 수 없지만 앞으로라도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국민들 마음, 장병들 마음을 위해서 원없이 풀어줬으면 합니다.
▶ 오늘 세 분 소중한 자리 빛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당시 천안함 생생한 기억들, 이들이 원하는게 뭔지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게 바로 이상준 준사의 유품이라고 합니다. 다시한번 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세 분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