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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
매주 월~금 오후 5시
재방 익일 새벽 1시, 새벽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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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목사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십니까.
▶ 초창기에 그 당시 잡혀서 얼굴과 지금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셨어요.
- 그럼요. 그 때는 45년 전에 그 때는 젊었고 특수훈련도 받았고 한국에서 45년동안 자유롭게 살다보니까 얼굴도 좋아졌고.
▶ 지난 세월의 추적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 볼 수 있죠.
▶ 사람들의 기억에는 아직도 무장공비 김신조로 기억되는데.
- 그게 몇 번 애기했는데 공비는 아닙니다. 그 때 군사정권 때 공비라고 말 한 거죠.
▶ 뭐라고 표현해야 되는지. 간첩?
- 간첩은 공작원이고. 그건 비폭력이고. 그 때 임무 자체가 폭력인데 특수부대 게릴라 부대 특공대입니다. 북한 총경찰국 특공부대.
▶ 남한에서는 그냥..
- 공비는 그건 산적이니까 그건 안 맞는 거죠.
▶ 45년 전에 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 침투 지령으로 남으로 온 거 아닙니까. 청와대 습격은 특수부대지만 지령 중에 가장 어려운 그런 게 아니었나. 어떻게 멤버들이 구성이 됐는지.
- 그 대상에 따라서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부대의 구성, 조직, 훈련이 달라지죠. 지금 고인이 되신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그리고 제 2의 6.25처럼 남한의 완전한 공산화 이것이 그들의 목표. 그러니까 그 임무를 수행하려니까 북한에서 특수부대에서 제일 정기부대고 한국의 몇 번 왔다 갔다한 경험이 있고 탁월한 자로 뽑아서 구성을 했죠.
▶ 목사님은 어떤 이유로 선별이 됐는지.
- 그 부대 안에서도 모든 훈련 과정을 항상 교관들이 볼 때 잘 끝마쳤어요. 그리고 지령을 받을 때 68년도 1월 21일 날, 그 때 임무 띄고 왔지만 그 전에 66년도 5월 달에 비폭력으로 서부전선 군사 임무를 한 번 했죠.
▶ 남한에 그 전에 넘어온 적이 있는 겁니까?
- 서른 한 명 다 그런 경험을 한.
▶ 남한 침투의 경험이 있는 분들. 목사님은 몇 번?
- 비폭력으로 한 번. 66년도 5월 달에 한 번 했고, 비폭력으로 283에 가서 공작원으로 경기도 양평군에 누구, 누구를 만나서 공작근무를 주고 지령을 주라, 침투는 역시 육상으로.
▶ 양평에 왔다갔군요.
- 그 때는 왔다가려고 하는데 차질이 있었어요. 그 때 그것이 무슨 차질이 있었어요. 그래서 폭력과 비폭력 임무를 했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거기서 검증이 되니까 교관들이 볼 때 큰 임무를 김신조한테 줘도 되겠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 칠십 몇 명 조직이 됐다가 다시 한 번 서른한 명으로 해서 임무가 청와대 습격, 박정희 대통령을 임무를 받았죠.
▶ 지금도 싸움이라든가, 몸의 민첩함은 남아있겠네요.
- 아마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기서 그런 무서운 강한 훈련을 받았으니까 나이 먹어도 나타나겠죠.
▶ 성공하고 돌아올 경우에 보상은?
- 우리하고 다릅니다. 우리도 이북에 공작하는 게 있는데 보상제도지만 북한에서는 보상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건 당과 수령 혁명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남조선 인민 해방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보상이라는 건 그게 전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갔다 오면 훈장 주겠다, 그러는데 거기에 선발되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 거기에 메어 있지 않습니다. 당과 김일성 수령 남방의 혁명 해방을 위한 혁명 전의부대니까 혁명감입니다. 사명감이죠. 혁명과 사명감이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
▶ 남파된 특수부대원이 서른세 명이다, 이런 얘기가 있는데.
- 제가 그 부대에 있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나와서 실패하고 성공한 애들도 있고 비폭력으로 들어와서 성공과 실패를 하는 애들도 있는데 물론 그건 철저히 보안이 됩니다. 왜, 여기 와서 성공했다고 하면 만약에 다른 조가 실패해서 잡혔다고 하면 진술하다가 들통 나면 과거에 성공한 조도 수사하면 잡히거든요. 그래서 절대 보안이 있는데 우리끼리 안에서는 이제 좀 과장된 말도 하기도 하고, 좀 이상한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조금 황당했습니다. 서른 한 명이라는 사람이 그것이 모여서 훈련하고 밥도 먹고 그런 얼굴을 서로 아는 사람들인데 서른 한 명의 조가 형성됐고. 그런데 거기서 두 명이 또 있다는 건 아마 그 쪽에서 우리나라의 어떤 정부나 수사기관이나 혼란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나는 이것은 내가 한 거니까 분명히 내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서른한 명.
▶ 탈북자 출신의 증언. 그 당시 참수 협박을 받고 남한의 고정 간첩이 됐다.
- 그래서 그건 있죠. 서른세 명이 아니고 서른한 명입니다. 그런데 스물아홉 명은 살상되고. 그리고 한 명은 살아서 갔습니다. 7년 전, 8년 전인가 북한의 장군이 돼서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 임태형, 우명훈이라는 이름도 나왔는데 그 사람들인지.
- 아, 그건 서른 세 명 안에 그 두 사람이라는 게 아까 말한 겁니다. 그건 우리 서른한 명하고는 관계없는 거예요.
▶ 그 분 얘기가 구체적인데. 공격조가 떨어져서 인근 주택가에서 후방을 감시했다. 이 쪽에서 고정 간첩으로 보내서 활동했다/.
- 서른 한 명이 검문 당할 때 제일 뒤에 있는 애가 경찰에 잡혔어요. 걔가 치안 본부가서 자폭을 했어요. 그게 서른한 명에서 한 명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30명. 한 명은 살아갔단 말이에요. 도망가서. 그리고 내가 포위당해서 투항을 했고. 스물아홉 명 살상되고 서른한 명 맞죠.
▶ 두 사람 이름은..
- 관계없는 겁니다.
▶ 당시 나이가 스물일곱. 어떤 생각이었는지. 사명감?
- 그렇죠. 나는 거기에 선발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고. 왜? 당과 김일성 수령을 위한 혁명가니까 아주 나는 자랑스럽고. 이건 남들 못하는 걸 내가 한다, 내 청춘 바친다. 김일성 수령이 나를 인정하고 불렀기 때문에 그 때는 그랬습니다.
▶ 1월 17일 밤 8시에 출발, 세 시간 뒤인 밤 11시. 미2사단 철책 앞에 다다랐는데 미2사단 철책을 선택한 이유는? 경비가 소홀했는지.
- 아닙니다. 잘 해놨는데 원래 우리가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이고 그 서른 한 명 다 과거의 조장으로서 몇 번 침투해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조장들이 수천 명 있죠. 거기 대원들도 엄청난 경험을 가지고 있죠. 그 속에서 특별히 탁월한 애들입니다. 거기서 고르고 또 골랐죠. 그러니까 대통령을 죽이고 이 나라를 결정적 공산화, 혁명을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통일하냐, 못 하느냐, 거기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런 부대로 그런 사람들로 구성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철책이 잘 되었다고 해도 경험도 많이한 애들이기 때문에.
▶ 어떤 것도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
- 네. 그 때는 미 2사단 구역만 철책선과 각종 화력이 배치되어 있었어요. 그 옆에는 한국군 25사단이었는데 그 때 못 갈 수밖에 없었어요. 각종 지령은 있었지만. 왜 미군을 선택했냐. 미군이라는 군인은 우리나라가 아니다, 자기네 나라처럼 지키는 그렇지 않다.
▶ 소홀하겠다.
- 걔들이 장비가 좋고 여러 가지 그래도 자기나라가 아니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어요. 그런 약점을 이용. 그게 적중이 됐어요. 그리고 그 때는 눈이 많이 왔고 추웠습니다. 미군 애들은 그런 걸 극복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그 지역에는 발동기 소리가 나더라고. 불 피우는 발동기 소리 같애. 그런 소리가 밤에 날 때는 침투해도 안 들리죠. 그런 허점을 우리가 뚫은 거죠. 철책선에 각종 차단물이 있잖아요. 그게 밤에 깜깜한데 전등을 켜면 노출이 될 거 아닙니까. 깜깜한 상태에서 그걸 다 제거합니다. 감각이죠.
▶ 하나 잘못하면 터지거나..
- 네. 과거의 우리 동료들 중에서도 잘못해서 지뢰 밟아서 그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건 우리가 여러 번 연습, 반복했기 때문에
▶ 감이 옵니까?
- 그러니까 우리가 장애인들을 보게 되면 눈 잘못 된 사람, 귀가 잘못된 사람, 그 분들은 감각이 발달해요. 얼마 전에 한 분이 버스에 치여 돌아가셨지만 난 한국에 45년 살면서 그런 얘기는 처음들었지만 맹인들이 차사고 나서 돌아가신 분들은 한 번도 못 들었어요. 그와 같이 아주 전부 감각입니다. 반복을 통해서 그걸 몸에 완전 배입니다. 그걸 제거하고 통과하고 원 상태로 다시. 왜? 아침에 순찰할 거 아닙니까. 전혀 흔 적없이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하니까 여기 우리는 방어 입장에서 더 잘 해야겠죠.
▶ 경기 연천군 매연리에서 종로구 천호동까지 이동. 그 때 루트가 김신조 루트라고.
- 안보 장소라고 해서 외국사람들 많이 옵니다. 일본 사람들도 많이 왔습니다. 거기 가면 옛날에 김신조 루트다, 그런 분위기가 없어요.
▶ 거기 가 보신 적이 있는지.
- 거기 자주 갑니다.
▶ 그 당시 순간들이 기억나겠어요.
- 자주 가니까 그런 건 많이 없어졌는데.
▶ 처음 마주친 나무꾼을 오씨 4형제를 풀어준 게 큰 실책이었다고. 그 때 마주쳤으면 제거하든지 해야 되는 거 아닌지.
- 공작원이나 비폭력이나 폭력을 하는 사람들은 침투할 때 해상이나 육상이나 똑같습니다. 반드시 누구든지 만나면 살해해라. 왜? 신고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때는 아주 반공이라고 해서 신고가 잘 되어 있을 때. 무조건 신고하라고 했거든요. 만나면 이런 게 있으니까 살려주지 말라, 무조건 죽여라.
▶ 근데 왜 풀러줬는지.
- 죽이면 흔적이 없게 해야 하거든요. 간 사람 없어지면 수색을 할 거 아닙니까. 죽인 사람을 땅에 파묻어야 하는데 1월 19일 날, 오전 11시. 그 때 또 눈이 지금보다 더 추웠어요. 누가 땅 팝니까. 죽이는 건 간단한데. 그래서 총 조장은 박정희 대통령 쪽에서 만들어놨지만 이런 상황에 있을 때는 우리보고 죽이라니까 총 조장은 자기는 죽이고 우리보고 땅을 파라는 거예요. 누가 팝니까. 과거 조장하던 애들인데 땅 못 파겠다.
▶ 거기서 이견이 있었네요.
- 그게 실패 원인. 거기서 명령 하달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실패 원인이 거기서 나옵니다. 어떤 인물이 됐던 간에 내가 데리고 있던 대원을 데리고 나와야 명령이 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거기서 그 조직을 한 그거 실패한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잘 했죠. 그게.
▶ 목사님은 어떤 입장?
- 나는 그 때 죽이자고 했습니다. 나보고 땅 파라고 하더라고. 내가 죽이는데 왜 땅 파느냐. 자기가 죽이고 나보고 파라고 하더라고. 어떻게 팝니까. 네 사람을 파묻어야 하는데.
▶ 그 때 삽은 없었나요?
- 그것도 가지고 나왔죠. 곡괭이. 그래서 그들을 살려주는데 신고 안 하겠다는 다짐도 받고, 공산당도 입당도 받고 그들이 우리를 누군지 아니까.
▶ 그 때 너무 순진한 거 아닌지, 그걸 믿고 다시 행군.
- 그래서 우리가 내일 모레면 공산화가 된다.
▶ 남한이 전부 공산화 될 것이다, 라는 확신을 하셨나봐요.
- 살려줘서 우리가 그들이 신고 안 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설득한 거죠. 그래서 만약에 신고해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반드시 보복하는 부대가 나온다, 신고하지 마라, 협박도 했죠. 그리고나서 신고 안 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녁에 어두워서 내려 보내고 출발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 오는 거 보니까 신고했더라고요.
▶ 그리고 언제 알았나요?
- 이제 1월 19일 날 저녁에 출발하는데 1월 20일 날에 구파발에서 의정부 가는 도로가 있습니다. 그 도로를 넘어야 비봉에 들어오거든요. 그 도로 지점에 새벽에 오니까 군인이 이미 차단. 그래서 딱 느꼈죠. 얘가 내려가서 신고했구나. 그래서 그 때 알았지만 그 도로에 군인들 매복하고 그 도로를 새벽에 넘었습니다.
▶ 그럼 작전이 어렵구나, 실패하겠구나, 그런 생각도.
- 그건 아닙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다.
- 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대한민국 군인이 어느 정도 실력이냐, 경찰도 어느 정도 실력이냐. 상대를 모르고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신고해서 비상이 걸려도 실력을 아니까
▶ 충분히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있다.
- 네.
▶ 저녁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로에 섰을 때 시동을 건 버스 세 대가 있었고.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돌진하자, 이런 의견도 있었다고.
- 그게 처음에 계획에는 거기서 수경을 해서 거기까지 군복을 입었지만 이제부터는 군복으로 입고 서울로 들어가면..
▶ 우리나라 군복을 입었던 거죠?
- 그 다음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그래서 이제 거기서 출발해서 원래 코스가 산을 타고 청와대 뒷산 북악산 밑에 바로 청와대. 그것이 눈이 너무 많이 왔습니다. 거기서 그날 밤 하루를 다 보냈어요. 청와대 북악산에 1월 20일 날 새벽에 도착해야하는데 거기서 해매다 보니까 청와대를 못 간 거예요. 북악산까지. 그래서 비봉이 있습니다. 비봉에서 수경을 했죠. 완전 대담하게 골짝으로 세금정 골짜기로 가자, 골짜기로 들어오니까 버스가 있더라고요. 그 버스가 자문을 해서 종합청사로 갈라진 지금도 그 버스 다닙니다. 그 버스가 거기 가는 노선버스라는 걸 알거든요. 그 버스를 이미 추우니까 시동 걸어놓고 사람들이 타고 있더라고요. 우리도 그거 타고 그 쪽으로 가는 버스니까 가자고 하니까 거기서 총 조장이 거부했습니다.
▶ 그 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 성공했다고 봐야죠. 왜? 도보를 해서 검문당하면서 청와대 정문까지 갔으니까. 버스가 있었으면 거기 다니는 버스인데. 그래서 총조장이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버스를 타자, 그랬어요. 그런데 총조장이 거부. 그래서 도보로 들어가는데 나는 그 때 이미 감을 잡았어요. 이건 실패다. 같이 따라는 가야죠. 만약 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이미 가지고 있었어요.
▶ 경찰 검문 받고 총격전. 청와대 앞까지 간 건 아닙니까.
- 종로 경찰처장 돌아가신 게 검문 당해서 청운 중학교 후문. 거기서 만나서 보니까 적이 맞거든요. 계속 우리를 못 간다니까 거기서 살해를 한 거죠. 총 조장이 제일 앞에 섰으니까.. 그 다음에 돌격을 하다가 경북고등학교 후문을 지나서 청와대 들어가서 가려고 하는데 그 길에서 수도 방위 사령부에서 청와대 파견 나온 대대가 그 때 전두환 대통령이 대장할 때. 그 분하고 그 때 격전한 거. 이미 비상 걸린 상태니까 경찰도 군인도 다 비상상태니까 그래서 작전이 전개될 때 벌써 최후죠. 적이라는 건 알았으니까.
▶ 그 당시에 뚫고가는 건 불가능.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 그런 것도 있습니다. 있지만 그 때 장갑차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만약 거기에 대한 교전 붙었다,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대비가 있었어요. 그거를 우리가 진압하면서 핵심만 다섯 명 들여 보내자, 청와대로.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 다른 조들은 전투를 벌이고.
- 다른 특공대들은 군인들과 교전 보내면서 핵심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들여보내고 그렇게 했는데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수방사업 군인들이 대대가 너무 강했어요. 거기서 우리가 깨지고 임무를 포기.
▶ 스물아홉 명 다 사살되고.
- 스물아홉 명 살상한 그 현잘에 그 날 일곱 명이 살상되고. 그 나머지는 12월 마지막에..
▶ 그 때 무고한 민간인 두 명도 사망.
- 근데 이미 신고 되서 비상걸린 상태고 검문당해서 이제 청와대 갈 거 아닙니까. 그럼 그 노선 버스를 자문 고개서 막아야죠. 그럼 그걸 막지 않은 게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밤에 깜깜하니까 거기서 작전을 벌였으니까 군부대가 지원부대가 들어오는 걸 생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격전인데 거기 들어왔다는 거 자체가 문제.
▶ 그 당시 최규식이 숨졌는데. 그 이후 유가족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눠봤는지.
- 그 후에 가족들 만나서 인사도 드리고 사모님이 약국 할 때 제가 들리면 그 때 박카스가 유행. 박카스도 주고 아주 저를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그 서장님을 죽인 건 아는데 어떻게 같이 포함된 사람이니까 혼자 살았으니까 책임도 있죠.
▶ 그 이후 유격 대원들은 도망자 신세였잖아요. 목사님은 계곡 바위틈으로 숨었어요.
- 나는 대게 북쪽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나는 인왕산으로 가서 쭉 빠지게 되면 홍계동 나옵니다. 세금정 골짜기 하단 길. 바위틈에 거기 숨었다가 잠복한 군인에게 들켜서 그 분이 부대 포위당해서..
▶ 원래 체포당하면 자폭하라고 교육을.
- 네. 맞습니다.
▶ 대항하지 않은 이유는?
- 그러니까 그렇게 교육을 받았는데 직접 당해보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더라고요. 본성이죠. 살고 싶다. 그러면서 그 때 만약에 부모, 형제, 김일성이 생각했다면 내가 혁명가인데 이 생각했다면 내가 투항을 못 하겠죠. 그런데 살고 싶다, 그거 하나 때문에 손들고 나간 겁니다. 그 때 체포라고 하는데 체포가 아니에요. 투항입니다. 그건 짚고 나가야 합니다.
▶ 적극 대응할 수 있었다?
- 네.
▶ 남파되기 전까지 북한에서의 삶은?
- 남파되기 전까지 제가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지령을 받고 움직였기 때문에 훈련이라는 건 무단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남한에 해상이나 육상 침투를 때 장비가 달라져요. 거기에 따라서 훈련을 다시 해야 하거든요.
▶ 훈련은 몇 년?
- 제가 거기 간 건 65년도에 그 부대 가서 본격적으로 훈련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그 전에는 다른 정찰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부대 자체가 남한을 혁명하는 부대이니까 거기 간 것이 65년부터 시작된 것.
▶ 그 때 자폭한 요원들. 나중에 시체로 만났는데 어떤 생각이었는지.
- 몇 시간 전만에도 혁명한 동지인데 나는 살아서 그 사람 시체를 봤을 때 마음은 편치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들은 혁명에서 싸우다가 자폭하고 총에 맞아 죽었는데 나는 내가 그 순간에 참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또 한 편으로는 사람이니까 너희들도 나처럼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이런 생각.
▶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한 결심의 계기는?
- 목회자는 그 나중 문제고 내가 사는 과정에 좋은 것도 많았지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 어떤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는지.
- 그 사건 자체가 컸기 때문에 그 모든 책임은 내가 혼자 져야합니다. 그걸 극복하는 게 힘들었고 이제 예비군도 그 때 창설했으니까 군대도 복무 연장, 유격훈련 시켰으니까 힘드니까 거기에 대한 게 김신조 원인이 너다. 이러고. 북한은 전 인민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자유를 지키려면 그래서 군인들 그렇게 만들고 그 때는 고등학교도 교련훈련 시켰습니다. 이런 문제점, 그래서 이러한 것이 화살이 나한테 오고 그 다음에 이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내가 북한의 전략전술 가지고 얘기하고 대비하고 하니까 이러한 문제점이 내 가족들에게 왔어요. 화살이. 부모님도 총살당했다, 형제가 잘못됐다, 변절자의 가족이라고. 그걸 접했을 때 물론 그런 각오는 했지만 그 때 힘들었고. 우리 아들, 딸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반공기윤리 시간에 나를 가르치니까 애들도 괴로워했고 우리 집사람도 공비 마누라라고. 공비 아닌데 여러 가지 많았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나를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 신변안전에 대한 두려움도.
- 많았죠.
▶ 남한에 간첩을 만난 적은 있었는지.
- 그건 많은데 그건 절대 보안입니다. 내가 일단 가서 받으면 그것이 끝나줘야 합니다. 만약에 잡혔다면 수사 과정 알면 다 깨져야 되요. 아까 이런 과정에 있다 보니까 우리 집사람이 신앙이 좋아서 신앙밖에 해결이 없다, 그래서 교회로 인도한 것이 우리 집사람이 다니던 교회로 나를 인도한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다가 은혜 받아서 목회를 시작한 거죠.
▶ 최근 KAL기 폭파 주범인 김현희 재등장.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 참 우리 대한민국 국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자유인지 아직도 안 풀립니다. 그저 없는 말 만들고 막 하는 게 자유가 아니에요. 그건 자기에게나 가정이나 나라에 해가 됩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떤지 알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도 지금 역 공작을 하잖아요. 걔들도 북한과 같은 맥락으로 역공격합니다. 남한에 있는 북한세력들로. 그런데 6.25가 다 밝혀졌는데 어떻게 북침입니까? 이북도 북침이다, 남한 세력들이. 그러면 김신조가 증인인데 나도 가짜입니까. 과거 군사정권 때 유신 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걸 싸잡아서 근본적인 걸 같이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즘도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데 자기네도 북한 정권에서도 그것을 자기네가 보호하기 위해서 또 남한에는 이북에서 만든 친북 세력들이 자기네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문제점이라는 것을 울타리 치는 거예요. 최근에도 그렇게 나오더라고. 김현희 사건도 사실, 나도 사실. 울진산 120명이 내 후배입니다.
▶ 이승복.
- 네. 그게 사실인데 그걸 북한에서 은폐하지 않습니까. 그니까 남한의 친북세력들이 북한과 같이 보호하는 겁니다. 그걸 입장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네가 임무 보안이라고 해서 그걸 끌었다고 최근에 그러더라고. 이게 북한의 전술이고 남한의 친북 세력들이 그 지령 받고 하는 거니까 같은 맥락에서 하는 거예요. 우리 국민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정치인들이 그걸 잘 알아야 합니다.
▶ 김정은 체제. 좀 바뀔 수 있는지.
- 아마 자기가 공부했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지만 자기가 바꾸려고 해도 바뀌지 않은 것이고. 지금 세계의 움직임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있죠. 물론 그 사람이 공부하는 것도 보고 느낀 거, 그 동안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옛날 같은 그런 시대는 아닙니다. 북한 정권의 김정은이 지금 많은 고민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 대화를 하려고 할까? 남북 간.
- 대화를 하겠죠. 왜? 어떤 대화가 되느냐, 그겁니다. 그러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그 체제가 자기 정권을 양보하고 양보라는 건 남한의 공산화 양보거든요. 진정한 대화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남한의 공산화 정권주의 한다면 북한이 안 될 겁니다.
▶ 알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