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는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던 19세기-20세기 초반 1세대 여성주의에서 20세기 중반 이후론 여성의 정치,사회참여 확대를 주장하는 2세대 여성주의로 그리고 근래에는 3세대 여성주의로 진화중이다. 이 3세대 여성주의를 ‘포스트모던적 여성주의’로 명명하는게 맞을지 아직 공식화된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작금의 우리사회에 일고있는 이른바 ‘여혐’ 논란 같은것도 우리사회도 어느덧 3세대 여성주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증거다. 3세대 여성주의 또는 ‘포스트 모던적 여성주의’의 핵심은 한마디로 남성위주로 (어쩌면 태초에서부터) 만들어진 세상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는게 그 핵심 사상이다. 여혐논란은 사실 그와같은 ‘포스트 모던적 여성주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작금의 우리사회는 이제 겨우 3세대 여성주의의 도입부에 들어갔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드라마에는 ‘흥행공식’이란게 있다. 하지만 ‘드라마 흥행공식’이란게 무슨 드라마 작법 같은데서 가르치는 개념은 아니다. - 드라마나 영화가 무슨 수학문제나 화학기호도 아닐진대 공식이란게 존재할리 없지 않은가. - 다만 대체로 2천년대 초,중반 무렵부터 네티즌들끼리 가령 재벌2세와의 사랑이야기라던가 뒤바뀐 출생의 비밀 혹은 고부간의 갈등 이런 것을 극단적으로 다룬 드라마들이 시청률이 잘 나온다고 해서 그런 설정을 ‘드라마 흥행공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막장드라마’란 개념이 생긴것도 대략 비슷한 시기로 보통 2천년대 중반경부터 역시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꼬인 4각관계등을 중심으로 등장인물간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을 ‘막장드라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지고보면 드라마 흥행공식이나 막장드라마 공식이나 대개는 공통분모로 지니고 있는 요소들이 있다.
사실 90년대까지만 해도 드라마에서 가난하지만 개념있게 살아가는 여주인공이 시건방진 재벌2세를 만나 사랑을 이루고 신분상승을 하게되는 스토리는 잘 있지 않았다. 오히려 7,80년대에는 사회에서 나름 전문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남성이 부잣집 딸을 만나 연애하게 되는 식의 드라마가 많았다. 산업화가 한참 진행중이라 특히 시골에서 상경했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전문직이든 대기업이든 진출을 해서 출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그 시절의 시대상이 대략 반영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 헌데 요즘은 오히려 7,80년대엔 전형적인 남성주인공 캐릭터였던 사회적으로 출세한 남자가 부잣집 딸과 결혼하게 되는 설정이 오히려 요즘은 저런 설정의 남자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7,80년대엔 전형적인 성공한 남자주인공 캐릭터가 요즘은 힘들고 가난할 때 함께 고생한 여자를 저버리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 팔자 고치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뒤바뀐 셈이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개념녀가 시건방진 재벌2세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라던가 역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며 전문직 여성으로 성공하는 ‘캔디형 성공 스토리’가 드라마 흥행공식이 되어버린 것은 역시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그와같은 취향의 드라마가 통하기 때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목소리는 가면 갈수록 높아지는 시대에 오히려 드라마에선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여성이 잘사는 집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하는 ‘신데렐라형 스토리’가 전형적인 드라마 성공스토리 공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근 10년 이내에는 저와같은 재벌2세와의 사랑이야기의 또다른 진화버전도 있다. 가령 집에서 남편밖에 모르고 살아가던 평범한 여성(대략 한 30대 초,중반 정도)이 남편의 바람과 배신으로 이혼한다. 이후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다가 다시 새로운 남자를 만나 팔자를 고치고 아이들까지 되찾게 되는 신종 ‘신데렐라 드라마’ 또는 신종 ‘막장드라마 흥행공식’인 셈이다. 그리고 이 이혼한 여자의 팔자를 고쳐주는 남자 주인공은 대개 마찬가지로 재벌2세다. 이 재벌2세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 여자의 과거는 물론 그녀의 아이까지도 사랑으로 품어주는 전형적인 훈남 캐릭터로 변화되어간다.
요즘은 한술더떠 이혼녀를 사랑하게 되는 재벌2세가 그냥 재벌2세가 아닌 ‘숨겨진 재벌2세’인 경우도 많이 나온다. 보통 뒤바뀐 출생의 비밀과 관련있는 설정인데 가령 이런식이다. 가령 변희재(가명)랑 고재열(가명)이란 남자가 있다고 치자. 드라마 초반엔 변희재가 재벌2세로 나오고 고재열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남자다. 근데 사실 변희재 집안인 재벌가에 어릴 때 잃어버린 숨겨진 자녀가 있었다. 변희재(가명)는 사실 그 재벌가애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신분을 속여 ‘제가 이 집 어릴 때 잃어버린 아들입니다’하고 살게된다. 변희재에게 졸지에 자리를 빼앗긴 고재열(가명)은 드라마 중,후반부쯤에서부터 ‘뒤바뀐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고재열이 원래 신분인 재벌2세 자리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재열의 사귀는 여자가 대개는 연상의 애딸린 이혼녀다. (설명하기 쉽게 순서를 좀 뒤바꾸긴 했지만 바로 그 ‘연상의 애딸린 이혼녀’가 실제 ‘신종 막장드라마’의 전형적인 여주인공 캐릭터다)
물론 드라마가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 아닌 다음에야 여주인공의 상대는 당연히 남성이 될 수밖에 없다. 헌데 중요한 문제는 그와같은 드라마의 스토리 구조 상당수가 결국 여주인공은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일에 성공하거나 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버렸다는데 있다. 그것도 정작 세상은 갈수록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목소리가 커지는 세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7,80년대 정도엔 이런식의 편견적 사고가 하나 있었다. ‘집에서(그런대로 먹고살만한 집에서) 딸네미들 사회나가 성차별 안 받고 적당히 돈벌다 시집보낼수 있는 직업이 (1) 교사 (2) 간호사 그리고 (3) 방송작가’라고. 그래서일까. (간호사야 당연히 여성이 하는 직업이고) 학교교사의 경우 여성 성비가 너무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야기는 이미 80년대부터 나왔던 이야기고, 그리고 방송작가 역시 (드라마 작가든 구성작가든)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아진지 꽤 되었다. - 요즘은 PD도 여성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나 방송작가중 여성비율에 비해 현역PD의 경우 여전히 남성 PD가 압도적이다. - 실제 필자가 방송작가 교육원에서 수강할때도 수강생중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심하게는 남자 수강생은 필자 한명뿐이었던적도 있다.
사실 드라마에서 가난한 집 소녀가 재벌2세를 만나 사랑 이루고 신분상승 하는식의 스토리가 드라마의 한 흥행공식화된 것은 대체로 2천년대 들어서부터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류의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가난한집 남자가 자기만의 재능이나 전문기술을 활용 사회적 지위를 얻고 돈많거나 잘난 부잣집 딸을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그런식의 스토리를 많이 볼수 있었다. 또한 일일극이나 주말극 같은 경우엔 대체로 대가족이 부대끼며 살면서 형제,자매간 아웅다웅 갈등하며 살다가도 결말에 가서는 그 많은 갈등을 극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다시 일구는 소시민적 스토리가 대다수였다. (사실 저런식의 가족극이 대개는 가부장 중심 스토리거나 가부장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 여성 시청자들 입장에선 보기 불편한 드라마가 되었겠지만)
드라마속 여주인공의 행복이 마치 재벌2세를 만나 사랑을 이루어야만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작품이 아니면 드라마가 되지 않는 것은 아직 21세기 초반부라고 봐야할 이 시대에 어떤 아이러니마저 느끼게 된다. 재벌2세와의 사랑결실이 아니면 해피엔딩이 되지 않는 드라마가 다수가 된 이상 그저그런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하지만 그런대로 건전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남자를 만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시청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구조적으로 여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의 상당수가 여성이 된지는 꽤 되었다. 헌데 그러한 구조속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의 상당수가 결국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여성이 재벌2세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거나 한술더떠 이혼하고 혼자 아이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는 여자가 ‘숨겨진 재벌2세’를 만나 급반전의 신분상승을 이루는 이런식의 드라마라는 점은 확실히 아이러니다. 여성 스스로가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만드는 ‘여성의 행복 스토리’가 결국 이런식의 구조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