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72번째 무료강의 시작 ⇛ 남북국시대에 북쪽의 후고구려와 남쪽의 후삼국의 왕조에 대하여 설명
■ 전체 제목: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 72번째 주 내용: 남북국시대에 북쪽의 후고구려와 남쪽의 후삼국의 왕조에 대하여 설명
■ 일자: 신축년(辛丑年) 단기 4354년 서기 2021.7.1.목요일.(음력 5.22.)
■ 장소=등재한 곳: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올려놓았음.
■ 강의자(講義者):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여러분께서 사업과 직장에 초석이 되고 밑바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무료강의는 1마당에서 13마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무료강의를 올리겠습니다.
정정당당한 미래를 위해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대홍익역사(大弘益歷史)배움터와 천지학당(天地學闛)터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힘찬하루 보내세요.
제11마당 설명 중 72번째 무료강의 시작
남북국시대에 북쪽의 후고구려와 남쪽의 후삼국의 왕조에 대하여 설명
◐ 남북국시대에 북쪽의 후고구려와 남쪽의 후삼국의 왕조에 대하여
역사는 그 당시 남북국시대인 북쪽에 대중상이 후고구려를 서기 667년에 세우고 난 후 225년이 지나서 남쪽에는 후삼국인 견훤이 892년에 후백제를 그 다음해인 893년에 궁예가 893년에 후고구려를 이어가고 있었다.
곧 신라는 라당연합국(羅唐聯合國)으로 남쪽만 통일했지 북쪽은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엄연히 고구려를 이은 후고구려를 667년~698년까지 32년간 먼저 이어가다가 그의 아들 대조영이 698년에 나라를 개명하여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으로 이어가게 되어 전체로 보면 이 시대는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이다라고 발해고(渤海考)를 지은 유득공께서 남북국시대 라고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발해(渤海)는 다른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 이름이다.
남북국시대에 멸망순서는 궁예의 후고구려는 918년에 대중상의 후고구려를 이은 대조영의 대진국=진국=발해는 926년에 신라는 935년에 견훤의 후백제는 936년에 멸망하였다.
그 후 역사는 남북국시대에 자력의 힘으로 왕건이 남북국을 통일하여 고려의 나라를 세워서 나아가게 되었다.
▣ 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 말하고 있는 남북국시대에 북쪽에 진정한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역대왕조(歷代王朝)
남북국시대에 북쪽에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진정한 역사는 고구려가 라당연합국(羅唐聯合國)에 멸망하기 한해 전인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667년에 후고구려를 세워 시작하여 698년까지이며 총재위기간은 32년간이다. 연호를 중광(重光)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후고구려의 역사이다.
그 후 대조영이 698년에 국호를 개명하여 대진국(大震國)=진국(震國)으로 개명하여 대중상으로 시조로 해서 16대로 총재위기간은 260년간이다. 발해는 다른 나라에서 부르는 나라 이름이다.
그 후 서기 926년에 당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중국의 오대십국시대에 거란=요나라에 대진국=진국=발해는 멸망하였다. 거란과 북송은 다시 1127년에 금나라에 멸망하였다.
▣ 남북국시대에 남쪽의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역대왕조(歷代王朝)
■ 1대 궁예(弓裔): 893년~918년 재위함. 총재위는 26년간이다. [서기 893년은 신라 51대 진성여왕 재위 7년이다]
■ 궁예의 후고구려의 재위는 901년~918년으로 18년간이다.
901년에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 904년에 마진(摩震) 911년에 마지막으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함.
서기 918년에 부양(斧壤)에서 피살되고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였다.
▣ 남북국시대에 남쪽의 후백제(後百濟)의 역대왕조(歷代王朝)
■ 1대 견훤(甄萱): 892년~935년 재위함. [서기 892년은 신라 51대 진성여왕 재위 6년]
■ 2대 신검(神劍): 935년~936년. 후백제는 2대로 총재위는 45년간이다.
역사는 라당연합국(羅唐聯合國)에 백제가 서기 660년에 멸망하고 고구려는 서기 668년에 멸망하고 고구려가 멸망하기 한해 전인 서기 667년에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북쪽에 후고구려를 세우고 32년 지난 후 대조영이 대진국=진국(발해)으로 국호를 개명하였다.
곧 대중상으로부터 225년이 지난 후며 대조영으로부터는 193년이 지난 후에 남쪽의 후삼국이 나와 궁예가 918년에 왕건에게 멸망하고 북쪽의 대진국=진국(발해)은 926년에 거란=요나라에게 멸망하고 후백제가 마지막으로 서기 936년에 고려 왕건에게 넘어가 고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기 936년에 고려 왕건이 남북국을 통일하였다. 곧 고려 왕건 재위 19년에 남북국(북쪽의 후고구려와 남쪽의 후삼국인 신라와 후백제와 후고구려)을 통일하였다.
대진국=진국(발해) 멸망한 서기 926년은 고려태조 9년 7월이며 요(遼)나라는 즉 거란(契丹)은 발해의 103개성 모두 점령하여 대진국(발해) 멸망하였다. ≪ 이때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시대로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기 전의 역사이다. ≫
대진국=진국(발해)가 926년에 멸망하고 10년 후 서기 936년에 고려 왕건이 남북국을 통일하였다. 곧 고려 왕건 재위 19년에 남북국(북쪽의 후고구려와 남쪽의 후삼국인 신라와 후백제와 후고구려)을 통일하였다.
좌우간(左右間)=자우간(自又間)에 대진국=진국(발해)의 총재위기간은 대조영의 아버지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후고구려를 개명한 대진국=진국(발해)의 시작은 서기 667년에서 시작하여 서기 926년까지 총재위기간은 대중상으로부터 시작하여 16대 애제까지 260년간이다.
고려 왕건이 남북국시대의 후삼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한 역사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918년 6월 궁예가 피살당하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918년 6월에 건국하였다.
역사는 대중상이 후고구려를 667년에 세우고 32년간 재위하다가 별세하여 아들 대조영이 698년에 후고구려를 개명한 발해 즉 대진국=진국은 926년(고려 왕건 재위 9년)에 거란=요나라에 멸망하고 일부는 고려에 망명하였다.
935년(왕건 재위 18년) 11월에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고
견훤이 935년 6월에 고려 왕건에 투항하고 936년(왕건 재위 19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도 항복하여 왕건은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들 장군들과 힘을 합해 자주적인 힘으로 고려를 건국하여 남북국시대에 북쪽의 후고구려 즉 대진국=진국=발해와 남쪽의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 후백제의 신검은 왕건에 항복하여 처음에는 목숨을 살려주어 작위(爵位)를 주었으나 그 후 죽은 날자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검(神劍)도 그의 동생들과 같이 살해된 것으로 짐작된다. 역사는 신검의 동생인 양검(良劍)과 용검(龍劍)은 유배되어 살해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이것이 바로 남북국시대의 후삼국의 진정한 역사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아래에 신라의 나라가 탄생과 멸망과 신라 마지막 경순왕과 낙랑공주와 안동의 삼태사와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부르게 된 역사를 올리옵니다.
▣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역사서가 아니다. 사로(斯盧)=신라(新羅)가 탄생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나라를 건국한 임금의 역사기록에 있어서 알에서 태어났다. 라는 것들과 신화(神話)나 설화(說話)들은 모두가 정확한 사실을 모르거나 정확한 문헌의 기록이 없거나 아니면 그 역사를 미화하여 목적을 달성할려는 데 쓰기 위해 그렇게 기록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은 어느 나라나 다 있다.
그러나 역사란 사실의 일들을 기록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사실에 있었던 역사들을 기록한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 의심스러운 것은 과연 삼국사기에서 이러한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을 기록 하였을까 하는 의심이갑니다.
삼국사기의 진본에도 과연 이렇게 기록을 하였을까 하는 것이 저의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는 일본의 왜곡, 조작, 변절, 단절한 짓이라고 봅니다.
삼국사기의 진본을 국가에서 다시 정확하게 정리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만일에 삼국사기 진본에도 이러한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으로 기록을 하였다면 역사의 대범죄를 지었다고 보아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라가 탄생하는 이 당시의 역사는 중국의 7대 한무제가 BC 87년에 별세한 후의 역사이며 사마천이 BC 86년에 운명한 이후에 신라가 탄생하는 것으로 이 당시 세계역사와 중국역사에서는 한사람도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에서 만이 이렇게 알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역사를 능멸하는 처사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일본이 왜곡하였는지 아니면 삼국사기 원본에도 이렇게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면 실로 삼국사기는 역사의 대범죄자로 그 죄를 영구히 물어야 한다.
저는 이곳에서 각 나라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기록하고 있는 황제헌원의 나라로부터 시작하여 요순(堯舜)나라 하(夏)나라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에서부터 시작하여 원 명 청(淸)나라 이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역사를 말하며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귀한 수 천년 수 만년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桓國)=환국과 한웅국(桓雄國)=환웅국=한웅시대(桓雄時代=신시시대=배달시대)와 단국(檀國)=단군조선시대(檀君朝鮮時代)와 이 단군조선의 역사는 삼한으로 다스렸으며 이 삼한(三韓) 즉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과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北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사로(斯盧)=신라(新羅) 그리고 고구려와 대중상의 후고구려와 후고구려의 국호를 개명한 발해(渤海) 즉 대진국(大震國)과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큰 줄기를 가지고 사실에 있었던 신라가 탄생하기 전에 사로(斯盧)의 나라에 대한 실록(實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사로(斯盧)에 대한 이야기의 기록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고구려국본기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로(斯盧)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왕이 되었는 것은 즉 사로란 신라로 부르기 전의 옛 사로(斯盧)의 첫 임금을 말하며 곧 나라 이름인 사로국(斯盧國)을 말한다.
사로(斯盧)가 왕이 되기까지의 사연은
사로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즉 훌륭한 성인 어머니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夫餘: 마지막 47대 단군을 이은 북부여를 일으킨 해모수의 나라를 말함) 왕실의 딸에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뱃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嫩水)로부터 도망쳐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눈수(嫩水)란 만주 흑룡강성에 있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나을촌(奈乙村)에 와 닿았다.
진한(辰韓)은 한웅국(환웅국)의 도읍인 신시(神市)에 있는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 송화강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당초의 도읍지이며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얼빈(하르빈: 안중근의사가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등박문을 사살한 곳)을 수도로 하는 삼한 중 진한을 말하는 것으로 즉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阿斯達)이 그곳이다.
사로의 어머니는 이러한 진한의 나을촌에 오게 되었다.
이때 소벌도리(蘇伐都利)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파소의 아들이 나이가 13살에 이르자 기개가 빼어나고 성숙하며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으로 높이니 도읍을 서라벌(徐羅伐)에 세우고 국호를 진한(辰韓)이라 부르고 즉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를 다시 부흥하기 위하여 진한 이라 부르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즉 사로가 왕이 되어서 나라를 사로(斯盧)로 불렀다.
이것이 바로 사로국(斯盧國)이 처음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로 즉 신라가 탄생하는 이때는 전한 7대 한무제 군사를 BC 108년에 물리치고 그 후 87년에 북부여의 5대 고두막한(高豆莫汗)=고두막(高豆莫)단제=동명단제(東明檀帝) 즉 동명왕(東明王)이 졸본(신의주 북쪽)에서 분릉(길림시)으로 옮긴 해는 BC 86년이며 이 분릉이 바로 사로=신라가 건국하는 시작의 근원이므로 이곳에서부터 남하하여 사로국의 나라가 탄생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연도를 따져보면 부여왕실의 딸 파소(婆蘇)가 그녀 아들이 사로이며 사로가 13년이 지난 후에 사로왕으로 처음 되었으므로 즉 신라로 부르기 전의 이름이 사로(斯盧)라고 불렀으므로
그러므로 13년 지난 후면 BC 73년이 된다. 곧 BC 73년이 사로왕이 즉위한 해 라고 봅니다.
곧 사로=신라의 처음나라와 임금의 이름은 사로(斯盧)이며 BC 73년에 사로(斯盧)나라가 즉 사로국(斯盧國)이 시작되었다.
즉 신라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록이 있는데 어찌하여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시작을 박만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는지 이 또한 누가 왜곡 위작하였는지 의문이다.
고로 태백일사의 역사서가 사리에 맞는 역사의 기록이므로 신라로 부르기 전의 이름은 사로(斯盧)가 맞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삼국 중 신라가 건국하기 전의 이름은 사로가 맞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전의 나라를 사로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대한 우리나라의 역사서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삼국사기도 저술할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제는 고귀하며 위대한 역사를 반드시 정립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곧 우리나라의 삼국역사가 탄생하게 되는 것도 반드시 그 전의 훌륭한 단군역사와 북부여역사와 고구려사와 백제사의 역사가 있었기에 사로(斯盧) 즉 신라(新羅)의 역사도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 삼국사기에서 제22대 지증왕(智證王)때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총 50권이며 이중 본기는 28권이며 이중 신라본기(新羅本紀)는 총 12권이다.
이중 신라가 12권 중 제4권인 이곳에서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지증왕(智證王)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에 대한 이야기의 기록이다.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지증왕(智證王)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3년 봄 3월에 영(令)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라 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별세하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금지하게 되었다.
■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말하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라 하였는데 신 등이 생각건대
新者德業日新(신자덕업일신) 즉 신(新)은 덕업을 일신한다는 것이요.
羅者網羅四方之義(라자망라사방지의) 즉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 국호를 정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이에 왕은 응종하였다.
그리고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만을 칭하고 존호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의 총의에 의하여 삼가 신라국왕 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 이에 왕은 응종하였다.
곧 22대 지증왕 때부터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 5년 여름 4월에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 6년 봄 2월에 왕은 친히 국내의 주, 군,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으니 군주의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받이기로 하였다.
우산국(于山國)은 명주(溟州) 정동쪽의 해도(海島)인데 혹은 울릉도 라고도 하며 땅은 사방 100리로 천험(天險)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자 우산국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위엄만으로는 항복시키기 어려우니 꾀로서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하고 나무를 깎아 사자의 우상을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 다면 곧 이 맹수를 풀어놓아 밟아 죽이도록 할 것이다.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바로 항복하였다.
■ 15년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법(諡法)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곧 시호(諡號)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 삼국사기에서 신라(新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당초의 이름은 사로(斯盧)라 했으며 그 후 신라 22대 지증왕(智證王) 4년인 서기 503년에 국호를 정식으로 신라(新羅) 라고 확정하였다.
사로란 신라(新羅)로 부르기 전의 옛 사로(斯盧)의 첫 임금을 말하며 곧 나라 이름을 말한다.
즉 신라로 부르기 전에 이두식으로 국명을 사로(斯盧) 사라(射羅) 서나(徐那)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伐) 서라(徐羅)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등 다양하게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47대 고열가(高列加)단군으로 이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를 해모수가 일으키고 북부여 4대 단제(단군=임금) 때 BC 108년에 한나라 7대 한무제를 물리치신 동명나라 고두막한=동명단제=동명왕께서 북부여를 5대로 BC 87년에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BC 86년에 졸본(卒本: 신의주 북쪽)에서 분릉(忿陵: 길림시)으로 도읍을 옮기고 이때에 사로(斯盧)의 어머니가 남하하여 사로가 13살 때인 BC 73년에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고도 하였으며 곧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이 성립하였다.
그 후 신라 22대 지증왕 4년인 서기 503년에 국호를 정식으로 신라(新羅)라고 확정하였다.
신라(新羅)의 뜻은 신(新)이라는 말은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라(羅)의 말은 사방의 영역을 올바르게 두루 망라 한다. 라는 뜻이다.
곧 원문으로는 新者德業日新(신자덕업일신) 羅者網羅四方之義(라자망라사방지의) 이다.
다시 말하여 신라로 부르기 전에는 신라의 나라이름이 사로(斯盧)로 불렀다. 이것이 신라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사로(斯盧)=신라(新羅)는 부여(夫餘)의 역사를 이어온 나라이며 신라의 당초 이름은 사로(斯盧)로 BC 73년에 시작하여 마지막 56대 경순왕으로 서기 935년까지이며 총재위기간은 1,008년간으로 왕실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시조를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이며 BC 5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곧 알에서 태어났다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을 신라의 건국기준으로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과 조작과 날조를 과연 일본이 했는지 아니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했는지 그 역사의 범죄를 영구히 물어야 한다. ≫
▣ 신라멸망과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과 낙랑공주에 대하여.
경순왕(敬順王: 38대 원성왕인 김경신의 후손)은 신라의 마지막 56대 왕이며 신라의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름은 부(傅)이다. 재위는 서기 927년~935년이다. 경순왕의 비(妃)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그 슬하(膝下)에 큰아들이 마의태자(麻衣太子)이며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경순왕은 서기 935년에 고려에 항복한 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혼인하였다.
즉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즉위하게 되었다.
경순왕은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져 결국 항복한 뒤 왕건은 신라를 경주(慶州)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조는 최초 시작은 사로(斯盧)가 BC 73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으로 서기935년 11월에 고려 태조 왕건에 투항함으로 멸망하였다. 총재위기간은 1,008년간이다.
≪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시조를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이며 BC 5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의 시대는 동서양의 역사가 생생하게 기록대는 시대이므로 이 또한 알에서 태어났다 고 하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진정한 역사서가 아니다. 또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 알에서 태어난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능멸하는 처사로 사로 즉 신라의 출발 기준점을 잡을 수가 없다. 삼국사기 진본을 확인하여야 하며 재조명 하여야한다. 좌우간에 삼국사기에서는 BC 57년에 시작하여 서기 935년으로 막을 내려 총재위기간은 992년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라의 역사는 사로에서 시작하는 BC 73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으로 서기935년 11월에 고려 태조 왕건에 투항함으로 멸망한 역사인 총재위기간은 1,008년간이다. 맞는 역사다. ≫
◉ 포석정(鮑石亭)에 대하여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 계류가에 위치하고 있던 연회장소이며 정자가 있다.
이 포석정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자는 없어졌으나 포어(鮑魚)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수구(水溝)가 남아있다.
포석정은 계수(溪水)를 받아들여 이것을 점복 모양의 수구(水溝)에 흐르게 하고 그것에 술잔을 띄워 문무백관의 품계에 좇아 열을 지어 앉아서 시를 옮고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술잔을 차례로 마시면서 연회를 즐겼던 곳이다.
◉ 안압지(雁鴨池)에 대하여
경주시 인왕동 소재 동궁(東宮)에 속한 연못이다.
삼국사기에서 신라를 통일한 30대 문무왕(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맏아들) 14년 2월에 의하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라고 하여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이 기록에 나타나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서부터 이므로 당시의 못 이름이나 동궁의 위치 등에 의문이 남아 있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년(조선 9대 성종 12년) 때에 편찬한 50권의 관찬지리서이다. 1530년(중종 25년)에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하여 완성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서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라하며 55권으로 만들었다. ≫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라고 하여 그 조성에 있어 신선사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示唆)해주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臨海殿)에 대한 기록으로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때인 931년 (경순왕 5년)에 왕이 고려 태조를 맞아 연회를 베푼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원지(苑池)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遺蹟)이다.
▣ 안동(安東)의 삼태사(三太師)와 팔공산(八公山)의 역사에 대하여.
역사에서 말하기를 경북 안동(安東)에 삼태사(三太師)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즉 신라 말엽의 55대 경애왕 때 삼태사(三太師)의 내막이 나오며 이때에 고려 왕건의 팔공산(八公山) 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역사 속에는 여러 가지 사연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구나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동(安東)은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즉 단군의 뿌리를 기록하고 있는 대역사가(大歷史家)이신 행촌(杏村) 이시며 또한 홍행촌(紅杏村)이신 고려 말 공민왕 때의 이암(李嵒)선생님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편찬하였다. 이분은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에서 태어나신 독립 운동가이며 초대 국무령이신 고성(固城) 이씨(李氏)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님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의 전반에 대하여 사맥(史脈)을 기록한 귀중하고 고귀한 역사서인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조선 중종 때 지으신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의 조상입니다.
또한 행촌(杏村) 이암(李嵒)선생님은 홍건적으로 1363년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 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였다.
아무쪼록 어느 고장이나 위대한 분을 발굴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좋은 역사와 문화를 길이길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데 서로 협력 합심합시다.
➜ 삼태사(三太師)와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부르게 된 사연에 대하여
안동의 역사에서 삼태사(三太師)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운 세 분을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린 것을 말한다.
세 분은 원래 경주 김씨(金氏)였으나 큰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에게 김씨(金氏) 권씨(權氏) 장씨(張氏)의 성을 하사(下賜)하였다.
즉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을 말한다.
삼태사의 사당인 태사묘(太師廟)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삼태사(三太師)의 내력은
신라 말엽 당시의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대진국=진국(발해)의 대조영을 이어 고려의 왕건이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하여졌다.
927년(신라 55대 경애왕 4년)에 포악한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경주까지 쳐들어 와서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이에 족제(族弟)인 경순왕을 마지막 56대 신라왕으로 즉위시켰다.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때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公山=팔공산) 동수(桐藪)싸움에서 대패하였다. 이때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등이 왕건을 위해 싸우다가 8명의 장수가 죽었다.
즉 팔공산(八公山)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 부악(父岳) 이라고 하였다. 신라 말에 즉 927년(신라 55대 경애왕 4년)에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당하게 되자 신숭겸(申崇謙)이 태조(왕건)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그때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부르게 하였다.
즉 견훤은 927년 경애왕 11월에 신라의 왕도를 급습하였는데 이때 왕은 비빈과 종척들을 대동 하고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하느라 견훤군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에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케 만들고 왕비는 능욕하고 나라는 회복 불능상태라 신하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견훤이나 왕건의 편에 가담하게 되었다.
막강했던 견훤의 세력은 서기 929년(경순왕 3년)이며 고려 태조 12년에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고창(안동의 옛 이름)을 공격하여 왔다.
고창군(안동의 옛 이름)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은 8천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전으로 점차 열세에 빠졌다. 이 당시의 고창군(안동)에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경애왕의 원수를 갚고 포악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여 견훤과 왕건이 고창 즉 안동에서 두 군사가 생사를 건 대전투에서 견훤(甄萱)은 8천명의 군사를 잃고 왕건(王建) 이 크게 승리하는데 큰 힘이 되어 견훤을 물리쳤다.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운 세 분을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리게 되었다.
김선평(金宣平)은 대광(大匡)으로 권행(權幸)과 장길(張吉)은 대상(大相)을 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렸다. 이분을 삼태사(三太師) 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 분은 원래 경주 김씨(金氏)였으나 큰 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에게 김씨, 권씨, 장씨의 성을 하사(下賜)하였다. 즉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을 말한다.
그 후 이 고을 군민들은 삼태사의 크신 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현재 삼태사(三太師)의 사당인 태사묘(太師廟)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 팔공산(八公山)에 대하여
위치는 대구직활시와 경북 군위군 영천군 칠곡군 경산군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193m 태백산맥의 보현산(普賢山) 1,124m에서 남서쪽으로 화산(華山) 팔공산(八公山) 가산(架山)으로 연결된다.
옛 이름은 공산(公山) 부악(父岳) 이라고 하였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당한 뒤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 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그때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부르게 하였다.
당시의 고창군(古昌郡: 안동의 옛 이름)에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경애왕의 원수를 갚고 포악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여 견훤과 왕건이 고창 즉 안동에서 두 군사가 생사를 건 대전투에서 견훤(甄萱)은 8천 명의 군사를 잃고 왕건(王建)이 크게 승리하게 되었다.
이에 김씨(金氏) 권씨(權氏) 장씨(張氏)의 성을 하사(下賜)받아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은 삼태사(三太師)가 되었다.
이 팔공산에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의 본산인 동화사(桐華寺)는 신라 때의 고찰이며 임진전쟁(임진왜란) 때는 유정(惟政: 사명당)이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다. 또 절 가까이에 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구세약수(救世藥水)가 있다.
그리고 고려대장경 판본을 소장하였던 부인사(符仁寺)를 비롯하여 파계사(把溪寺) 관암사(冠巖寺) 송림사(松林寺) 등의 사찰이 있고 거조(居祖) 등의 암자가 많이 있다.
그리고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은 제2석굴암이라 불린다. 또한 가산산성(架山山城)과 주위에 갓바위가 있다.
서기 1985년에는 동화사 입구에서 파계사까지 8.2km의 순환도로가 포장 완공됨으로써 교통이 원활하게 되어 시민들의 위락공간으로 크게 이용되고 있다.
▣ 홍건적 역사 속에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과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역사에 대하여.
역사에서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데는 즉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데는 나라가 혼란스럽고 나라가 비리와 부패할 때에 일어난다. 즉 반기나 반역이나 정변(쿠데타)이 성공하여 혁명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과 권력의 힘이나 또는 시위나 선동 등으로 나라를 중간에 탈취하는 것과 전 임금이 별세하거나 임기를 맡이고 선양(禪讓)=양위(讓位)하는 것과 권력의 힘으로 추앙받아서 선양=양위 받는 것 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것에서 실패를 하면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에는 반드시 큰원인이 있다. 그리고 큰뜻을 가지고 있다. 곧 반기나 반역이나 정변(쿠데타)이 성공하여 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명나라 주원장(朱元璋)과 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역사와 홍건적과 관련하여 글을 올리옵니다.
원나라 말기에 원나라의 귀족들은 많은 재물을 요구하고 조세와 부역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되자 한족들의 불만이 커져 저항의 무리가 생겨나게 되어 홍건적의 무리가 생겨났다. 이때 홍건적의 중심세력은 백련교(白蓮敎)와 미륵교(彌勒敎)가 생겨 신자들이 붉은 천조각으로 머리를 싸매어 동지의 표시로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 또는 홍건군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때에 황허강이 대범란을 맞아 농민과 노동자를 징발하였는데 너무나 가혹하여 원나라를 타도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홍건적을 이끄는 지도자가 여러 명 있었으며 고려를 2번이나 침략한 홍건적은 고려 31대 공민왕을 안동으로 피난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여 괴멸되었으며 단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은 점차적으로 착실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천하를 평정하는데 성공하여 명나라를 1368년에 세웠다.
곧 남방의 주원장(朱元璋)은 홍건군(紅巾軍)=홍건적(紅巾賊)의 장수 곽자흥(郭子興)의 대열에 들어가 공을 많이 세웠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양녀와 혼인하여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곽자흥은 동지간에 내분으로 군대가 분열되자 걱정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에 주원장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키워 장강 중류, 하류 일대를 전전하여 활동하다가 응천부[應天符: 지금의 남경(南京: 상하이 서쪽이며 난징시: 구글지도 검색)]에서 명(明)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때는 1368년이다.
고려 31대 공민왕시대에 홍건적이 2차 침입하였으나 2차에서 물리치고 난 후 반란이 일어나자 최영 등에 의해 제압되었고 또 홍건적 침입 때 물리치는 데 개경 수복에 공이 컸던 이성계의 존재도 부각되었다. 곧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반란과 변란을 퇴치하여 나갔다. 이러는 중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인하여 공민왕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신돈에게 정권을 맡겨 신돈의 힘이 너무커지자 권문세족들은 신돈의 역모를 고변하자 신돈을 유배시켜 결국 사형시켰다.
그 후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으로 결국 내시 최만생과 귀족의 아들인 홍륜(왕비와 같이 동침함) 일당은 공민왕을 도리어 죽이고 그 다음날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고 공민왕의 시비 반야 소생으로 장남인 이름이 우(禑)가 고려 32대 우왕(禑王)으로 1374년에 즉위하게 되었다.
역사는 명나라를 건국한지 20년 후인 서기 1388년(고려 32대 우왕 14년) 2월에 원나라를 물리친 명나라는 일방적으로 군사적으로 요충지역인 요동지역을 원나라를 물리친 명나라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정벌을 다행하기로 결정하자 이때에 모든 상황으로 정치나 사회나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물리칠 여력이 밀린 상황이었다. 이에 이성계의 사불가론(四不可論)으로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게 되어 반기를 들고 일어나 그 혁명이 성공하게 되어 1392년에 조선이 건국하게 되었다. 즉 원나라를 물리친 주원장이 서기 1368년 명나라를 세우고 25년이 지나서 이성계가 조선 나라를 1392년에 세우게 되었다.
◉ 요동지역과 요서지역은 군사적으로 나라를 건국하는 데 아주 주요한 땅이다.
중국에서 보면 요동지역이요 우리나라에서 보면 요서지역이다.
이 요동지역과 요서지역은 역사적으로 보면 그 주인이 누구냐 하면은
곧 이 요동과 요서는 신의주 북쪽을 말하며 곧 압록강 북쪽지역이며 연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지역이며 고구려의 수도였던 졸본(신의주 북쪽이며 압록강 북쪽)과 국내성의 지역을 말한다.
■ 단군조선시대에서는 이 지역이 바로 번한조선의 땅이며 그 후 위만이 번한조선을 찬탈하여 위만조선 이라고 하는 땅이다. 그 후 전한 7대 한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침범한 땅이다.
■ 북부여시대에서는 전한 7대 한무제 군사가 북부여를 침범하자 이를 물리친 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간 땅이다.
■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 제6대 태조시대에 요서지방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을 대비한 땅이다.
■ 고구려시대 제26대 영양왕시대에는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를 물리친 땅이다.
■ 고려시대 제8대 현종시대에는 강감찬장군이 거란=요나라을 물리친 땅이다.
■ 고려말시대 제32대 우왕 때에 요동 즉 요서지역의 땅이 명나라에 넘어가게 되었다.
≪ 역사는 기록하기를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기를 들고 즉 위화도회군으로 성공하여 이를 위화도혁명이 되어 조선나라가 탄생하게 됨. 즉 고려말에 가장 큰 실책은 고려땅인 요동 즉 요서지역을 원나라에 간섭을 받다가 명나라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즉 다시 말하여 고구려말 때 양만춘(楊萬春)은 645년 때 활약하던 고구려 마지막 28대 보장왕(642년~668년) 때의 명장이며 군사적으로 주요한 땅인 요동 즉 요서지역에 있는 안시성(安市城) 성주로 당나라 2대 태종을 안시성에서 물리치고 당나라 군사를 철군하게 함. ≫
역사적으로 이 주요한 요동지역 즉 요서지역의 땅을 언젠가는 우리나라가 찾아야 하는 일들이 남아있다.
▣ 이성계 아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 대하여.
역사는 충신들의 연속극이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는 것에는 반드시 충신(忠臣)과 폐신(閉臣) 즉 은신(隱臣)이 나오게 되어있다.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숙명이다. 즉 선비는 새로운 왕조에 협조를 하느냐 아니면 전의 왕조를 다시 살리느냐 아니면 불출(不出) 하느냐가 문제이다.
여기 고려 말기에 숙명적으로 고려 정권에 몸담았던 이성계와 정몽주와의 사연을 역사가 싣고 있는 것인 즉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세울려고 하고 정몽주는 고려의 나라를 다시 살리려고 하는 서로 상대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 당시 서로 각각의 입장에서 본 충신(忠臣)들의 충정을 올리옵니다.
➜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 대하여
역사는 변화하는 것이다. 이 극변하는 과정에 전의 사직(社稷)을 따르느냐 아니면 혁신 세력인 현 사직을 따르느냐 아니면 은거(隱居)하느냐에 따라서 운명(運命)이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 1392년 4월 4일에 절명하신 고귀한 해동(海東)의 유종(儒宗)이신 즉 유교의 으뜸이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님께서는 전의 사직을 따르므로 해서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목숨을 잃었다.
결국 고려 마지막 34대 공양왕 4년인 1392년 7월에 고려(高麗) 왕업은 475년으로 고려왕조의 문을 내렸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 조선의 3대 태종)은 1392년 3월 3일 즉 삼짇날에 포은 정몽주의 고견을 듣고 싶다며 초청을 하였다. 이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만든 자리였다.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이방원은 하여가(何如歌)로 떠보았다.
그리고 정몽주는 응답으로 단심가(丹心歌)로 읊었다.
이때 선죽교(善竹橋)에서 죽음을 알고 정몽주선생은 말을 거꾸로 타고 태연스레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 몸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맑은 정신에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나를 죽일 흉한이 앞으로 달려들 것이기에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어 말을 돌려 타는 것이다. 하며 선지교(善地橋) 즉 나중에 선죽교(善竹橋)로 하였다. 이 선죽교로 향하니 이방원이 보낸 무신(武臣)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역사를 배우므로 해서 우리는 더 좋은 방안을 찾을 수가 있다. 나라가 바뀔 때 전의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역사는 큰 발전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당면한 현실에서는 그렇게 행동 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좌우간에 나라가 편안하면 좋은 의견을 백성은 내 놓는다. 그렇치않으면 백성의 지혜는 숨거나 희생만 당한다.
자우간에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올리옵니다.
◉ 이방원(李芳遠)의 하여가(何如歌)
此亦何如(차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彼亦何如(피역하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성황당후원): 도읍지와 뒷담들이
頹落亦何如(퇴락역하여): 무너지고 떨어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아배약차위): 나와 그대들 같이 어울려
不死亦何如(불사역하여): 영원히 누리면 어떠하리.
◉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일백 번 다시 죽어
白骨爲塵土(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토 되어
魂魄有也無(혼백유야무): 혼백이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임 향한 일편단심을
寧有改理也歟(영유개리야여): 바꿔 편안함을 가질 수 있으랴.
◉정몽주선생님의 노소동락(老少同樂)의 뜻
노(老)는 소(少)의 용기(勇氣)를 배우고
소(少)는 노(老)의 사려(思慮)를 배워는 것이 수양의 요체다.
아아 역사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왕조도 혁명으로 또 처음 나라를 건국한 나라는 힘차게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들을 하지만 마지막 멸망하는 왕조는 부정과 부패와 가중한 조세와 혹독한 부역 등으로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여기 역사에서 배울점은 백성을 위해 나라존립을 위해 좋은제도를 만들어 놓는다면 나라를 오래 유지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봅니다.
곧 백성을 살리는 제도나 정책은 나라에 혼란과 재앙을 덜 당하나 백성을 죽이는 제도나 정책을 하게되면 결국에는 나라는 곧 그 정부는 망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아아 역사를 아는자만이 과거의 보고의 역사를 근거로 삼을 줄 알게되어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의 방향을 잡을 수가 있다.
백성을 죽이는 정책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는 정책을 세우는데 서로 지혜있는 역사를 만드는데 슬기를 모아봅시다. [72번째 무료강의 종(終)]
⇛ 제 강의는 무료강의로 혹 성공하시면 사회에 환원만 해주시면 됩니다.
각 대학교나 평생교육원이나 직장단체에서 제 강의 제목인 에 대하여 필수 교양과목으로 강의를 원하시면 협의 후 강의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 전자책 2020.4.29. 발간함.
구매 가능한곳 ⇢ 유페이퍼. 예스24 = yes24. 리디북스. 알라딘. 원스토어 외.
■ 층간소음 평생해소 할 수 있는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를 받음.
각 방마다 홍익방(곧 다락방과 같은 역할)을 만들고 특히 홍익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체력단련실과 또 공간을 잘 활용한다면 층간소음을 평생 해소는 물론 더 나아가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곧 세계에서 제일 멋진 주택(아파트)건축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서민을 위하고 또한 고급아파트 등을 짓고자 같이 사업하실분 연락주세요.
■ 그대가 대선에 승리할려면은 반드시 전세와 월세와 주택(아파트)값을 영구히 안정시키는 비법을 활용한다면 대선에도 승리할 수 있으며 힘들고 어려운 국민도 구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크게 이바지를 할 것이다.
전세와 월세와 주택(아파트) 등을 영구히 안정시키는 즉 주택대란을 영구히 안정시키는 비법 및 묘책을 알고자 하시는 분은 열락주세요. 협의 후 결정하겠습니다.
■ 다음 대선에 승리하는 비법 중 하나는 바로 무엇이 5.18폭동이고 무엇이 5.18민주화인지를 밝혀내겠다고 공약하는 자는 온 국민에게 호응을 받을 것이다. 곧 이러한 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자격이 된다.
♬ 역사란 자기나라의 역사를 기록, 보존, 연구하고 가르칠 때 올바른 얼이 올바른 나라가 힘찬나라가 되는 것이다. ♬
신축년(辛丑年) 단기(檀紀) 4354년 서기(西紀) 2021년 7월 1일 목요일.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용사(庸史)
➜ 제블로그: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역사실과 자료실과 홍보실을 운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