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 팬데믹(COVID-19 전세계 대유행)이 한창인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국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유엔(UN)에 공식 통보했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백악관 참모진과 친조카의 '트럼프 폭로' 저서 출간이 이어지고 코로나19 재확산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WHO 탈퇴를 위기 모면을 위한 지렛대로 삼는 모양새다. 다만 WHO는 전세계 각 국으로부터 코로나19 발생·현황 은폐 의혹을 받아온 중국을 오히려 감싸고 '초기 대응에 성공했다'고 극찬해와 WHO사무 총장 퇴진 운동이 벌어지는 식으로 국제 사회 빈축을 산 바 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과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외신들은 트럼프 정부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WHO 탈퇴서를 공식 제출했다고 7일(현지시간) 일제히 전했다. 미국이 WHO탈퇴를 통보한 것은 WHO가입 72년만의 일이다. 미국 측 탈퇴 통보는 지난 6일부터 공식적인 의사 표시로서의 효력을 가지게 된다. 미국이 최종적으로 WHO에서 탈퇴하는 시점은 2021년 7월 6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코로나19 초기 대응에 실패해 전세계가 고통받게 됐는데 WHO는 중국을 찬양하면서 국제 기구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미국인 세금만 축냈다"는 식으로 강한 불만을 표시해 국제 사회 눈길을 끈 바 있다. 지난 5월 18일에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에게 보낸 탈퇴 의향 서한을 직접 트위터를 통해 직접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은 서한에서 "앞으로 30일 내에 WHO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성 확보 등 개선 방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기여금 영구 동결(납부 중단)과 더불어 미국의 회원국 지위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WHO '탈퇴' 공식 통보는 실제 탈퇴보다는 정치적 지지를 높이려는 선언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WSJ 등 현지 언론은 이번 통보가 정치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미국 내 정치 구도와 WHO 탈퇴 조건을 감안하면 앞으로 더 먼 길이 남았다. 일단 부채 문제다. 지난 1948년 미국 연방 의회는 미국의 WHO 가입을 승인하면서 통과시킨 공동 결의안에 따라 미국이 WHO에서 탈퇴하려는 경우 서면으로 1년 전에 유엔 등에 통지하고, 정부가 WHO에 밀린 기여금 등 남은 부채를 해결해야 한다. 다만 정부가 이 돈을 마련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은 WHO에 연간 5억 달러 이상을 부담해 기여금을 가장 많이 내는 회원국이다. WHO에 따르면 회원국 기여금 중 미국이 22.0%로 지분이 가장 크다. 이어 중국 12.0%, 일본 8.6%, 독일 6.1% 순이다. 2020~2021년 WHO 예산은 약 48억달러다. 다만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경상비와 기여금 등이 약 2억 달러어치 밀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WHO에 대한 미국의 '기여금 지불 중단·회원국 탈퇴' 의사를 여러 번 공개 표명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회원국으로서 WHO에 내는 기여금을 영구 중단할 것이라고 해왔지만 그러려면 지난 1974년 제정된 미국의 '의회예산 및 지출거부통제법'(Congressional Budget and Impoundment Control Act)상 의회를 거쳐야 한다. 다만 공화당 내에서도 일부 반발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하원을 주도하는 민주당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 예상된 바 있다.
7일 트럼프 정부의 WHO탈퇴 통보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반격에 나섰다. 미국이 최종적으로 WHO에서 탈퇴하기 까지 1년이 남은 시간 동안 미국에서는 오는 11월 대선이 열린다. 바이든 전 부통령은 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내가 당선되면 대통령으로서의 첫 날에 WHO에 재가입하고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지도력을 회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취임 이후 파리 기후변화협정과 이란 핵 공동 합의,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서 줄줄이 탈퇴하는 식으로 '국제 사회 발빼기' 행보를 이어왔다. 다만 이 때문에 오히려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중국 영향력만 커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미국 내외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WHO탈퇴를 단순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행보로만 볼 수는 없다. 국제 보건기구인 WHO가 정작 팬데믹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지난 1월 말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중국 코로나19 사태로 미국 등 각 국 정부가 자국민 송환 작업에 들어가자 "(미국 등)이 우한 체류 자국 시민을 자국으로 송환하는 것은 과민 반응이니 자제하길 바란다"고 발언한 바 있다. 총장은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빠르게 번지던 지난 1월 28일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을 만난 후 "시 주석의 과감한 조치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고 미국에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되기 직전인 3월 초에는 "아직 팬데믹 상황까진 아니다. 중국은 전세계 공동체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중국에 치우친 발언을 해 국제 사회 분노를 샀다. 또 WHO의 베이징 파견팀은 "중국이 코로나19를 빠르게 막았다. 전세계가 중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공개 발언을 해 눈총을 받았다.
미국 사우스햄튼 대학은 중국이 3주만 더 빨리 코로나19 대응에 나섰다면 전세계 피해가 95% 줄어들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기도 했다. 코로나19 발병은 지난해 12월 WHO에 공식 보고됐지만 실제로는 우한에서 11월께 발병 보고가 있었다.
한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WHO탈퇴 통보 이후 중국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하루 전날인 6일 저녁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우한이 의심스럽다"면서 집중적으로 중국을 겨냥했다. 그간 국제사회에서는 유럽연합(EU)과 영국, 일본 등 주요국도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중국 측 은폐 의혹을 제기하며 책임을 요구해왔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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