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당시 이화여대는 서울대 연세대 다음이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대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이 지난 2014년 8월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던진 ‘취임일성’이다. 그는 이화여대 사상 첫 이공계 출신 총장이자 1980년 이후 최연소 총장으로 교내외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젊은 총장의 야심찬 ‘이대복구 프로젝트’는 4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자마자 허무하게 무너졌다. 지난 8월 평생단과대학(미래라이프대학·이하 미라대) 설립에 반발하는 학생들 본관 점거 농성사태에 이어 ‘비선 실세’ 최순실(60)씨 딸 정유라(20)씨를 둘러싼 특혜 논란이 결정타가 됐다.
19일 1886년 개교 130년 만에 처음으로 교수들까지 강단을 내려와 공개적 ‘퇴진요구’에 나서자 그간 최총장의 버팀목이었던 학교재단마저 최총장에게 끝내 등을 돌렸다는 게 교내외의 분석이다.
미국 템플대에서 물리학 석사와 과학교육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총장은 지난 94년 사범대 과학교육과 임용 이후 학생처장, 연구처장, 산학협력단장, 사범대학장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정치·교육계를 망라하는 탄탄한 인맥을 쌓았다. 특히 이화학당 장명수 이사장은 이같은 최총장을 강력히 지지했다.
지난 8월 초 미라대 사태 최초 발생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비롯해 공개 성명까지 내면서 “총장이 일 하다 생긴 일이고, 사퇴 서명에 동참하지 않은 교수가 80%가 넘는 상황에서 이사회가 최 총장의 해임을 논의할 수는 없다”며 학생들과 일부 교수들의 최총장 퇴진요구의 ‘싹’을 직접 잘랐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총장은 재단의 가장 아픈 곳이었던 ‘재정’ 문제에 관한한 만능 해결사였다. 아울러 한동안 정체됐던 학교 성장에도 불을 붙였다.
취임초기 최 총장은 의예과를 11년 만에 부활시키고 ‘첨단자동차로봇공학과‘ 개설을 추진했고 2017학년도 입시부터 이화여대 공대를 ‘엘텍공대’로 재출범시키기도 했다.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2016년 교육부 소관 주요사업 재정지원현황’에 따르면 전체 사립대학 163개교 가운데 2016년 교육부 주요 재정지원사업인 9개를 5개 이상 지원받은 대학은 16개교로 나타났는데, 이화여대가 8개(사업선정 후 자진 철회한 평단사업 포함)로 가장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 ‘이화의 난’ 시발점이 된 미래라이프 대학을 비롯해 프라임, 코어, 여성공학인재 양성 등 교육부 공고가 나는 족족 사업을 따냈던 것이다. 그러나 고졸자들을 신입생으로 받아 2년 과정 후 정식 학위를 부여하는 미라대 사업은 학교위상 추락을 염려하는 학생들의 본관점거 사태를 불렀고 이공계 중심의 대학구조조정사업인 프라임사업 등은 인문학과 학생과 교수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총장의 ‘성장주의’가 학내구성원들과의 불통의 갈등을 낳고 있다는 뜨거운 비판이 쏟아졌다. 이런 ‘불통’ 지적에도 재단은 여전히 최총장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재단의 기류가 급변한 건 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60·여·최서원으로 개명)씨의 딸 정유라(20)씨에 대한 갖가지 특혜 의혹이 터져나오면서 부터다. 정씨(승마 전공) 입학을 전후해 나온 의혹들은 실제 겉잡을 수 없을 정도다. 정씨 입학을 압두고 체육특기생 선발 종목을 11개에서 23개로 늘려 승마를 포함시켰고 담당교수는 출석도 하지 않았는데 학점을 인정해줬다.
아울러 실기우수자 학생들에게 대회 실적이나 과제물 만으로 최소 B학점 이상을 주는 비상식적인 내규를 만들고 수준 미달의 과제물에 교수가 상전 모시듯 극진한 경어로 칭찬을 해주며 틀리게 쓴 맞춤법 등에 대해 첨삭지도까지 해주는 등의 모습들이 속속 드러났다. 학생·교수 모두 “차마 부끄러워 밖에서 ‘이화인’이란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 자조섞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장 이사장은 지난 7일 연이어 “구성원들이 사업 철회가 됐음에도 시위를 멈추지 않고 사퇴까지 요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최순실씨 딸과 관련한 진상은 무엇인지 총장이 이사님들께 진실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7일 최총장이 직접 교수·학생들에게 공식 해명을 한 이후에도 논란이 더 커지자 장 이사장은 “우리 학교가 이 학생(최순실 딸)과 관련해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이 사라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며 사실상 최총장의 사퇴를 압박하는 발언을 내놨다.
이날 최종장이 형식적으로는 자진사퇴를 발표했지만 사실상 재단의 결단이라는 얘기가 파다한 배경이다. 학내구성원들의 반발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감내하려 했지만 권력과 결탁된 각종 의혹과 부실한 학사운영 정황이 속속 터져나오면서 이화여대 자존심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상황을 재단으로서도 더이상 지켜볼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게 교내 구성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이날 최총장의 사퇴가 발표되자 당초 최총장 사퇴를 요구할 예정이었던 비상대책위원회 소속 교수들과 본관 점거 학생들은 본관앞으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며 자축했다. 학생들은 ‘해방이화’라 적힌 녹색 손팻말을 들고 속속 본관에 집결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모(22) 학생은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최총장 사퇴 소식을 알려주면서 사퇴의 변을 읽어줬다”며 “통쾌하지만 사안의 본질에 대해 사과없이 그냥 사퇴해 무책임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총장사퇴 이후 향후 학교 정상화 문제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새 총장 선출 전까지 송덕수(법학과) 부총장이 직무대행을 할 확률이 높지만 송교수 역시 최총장 측근으로 분류돼 학내 구성원들의 또다른 반발이 예상된다. 이화여대 관계자는 “갑작스런 총장 사퇴 결정에 경황이 없어 학칙 등에 근거에 향후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며 “이화여대를 둘러싼 의혹을 덮기 위해 총장이 사퇴하는 모습으로 비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연규욱 기자 / 유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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