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현지시간) 대낮에 도심 한 가운데서 영국의 젊은 여성정치인 조 콕스(41)가 괴한의 총격에 무참히 사망한뒤 영국이 충격에 빠졌다. 23일 브렉시트(영국 EU탈퇴) 국민투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오늘은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보도했고 가디언지는 “문명국에서 미개국으로의 추락은 상상했던 것보다 빠르다”고 사설을 통해 야만적인 피습행위를 규탄했다. 영국은 총기규제가 매우 엄격해 총기테러자체가 드문 일인데다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지난 1990년 남부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집앞에 둔 차량에 설치한 폭탄 테러로 보수당 이언 고 의원이 목숨을 잃은 이후 처음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더했다. 특히 사망한 콕스가 지난 3개월간 브렉시트 찬성파 또는 극우세력으로부터 수백건의 ‘블랙메일’(협박편지)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나면서 브렉시트 표심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고든 브라운 전 총리 고문으로 활동했던 고(故) 콕스 의원의 남편인 브렌단 콕스는 트위터에 템즈강을 배경으로 환한 미소를 띄고 있는 콕스의 사진을 올린뒤 “조는 더 나은 세계를 믿으며 생전에 매일 이를 위해 열정을 갖고 싸웠다”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증오’와 나도 싸울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은 벌써 수만명의 네티즌들이 퍼다 날랐다. 가디언지는 이날 칼럼에서 “콕스 의원 죽음이 수면 밑에 소용돌이치고 있던 국론분열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끄집어냈다”며 “브렉시트 찬·반 진영의 어떤 유력 정치인들의 말보다 이번 투표에 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투표를 불과 일주일 앞둔 유권자들의 심리는 살해 용의자인 토마스 메어(52) 범행 동기에 좌우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단 메어가 일정한 직장도 없이 이웃과 교류를 단절한 ‘외톨이’인데다 오래전부터 정신분열을 앓아 왔다는 점에서 영향이 미미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앨런 러스킨 도이체방크 글로벌 외환시장부문 공동수석은 “투표 하루 이틀전에 터진 일이라면 모르지만 아직 투표가 일주일이나 남은 상황에서 국민들 판단에 직접적 잣대가 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메어가 장기간 극우성향을 이어왔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제도)를 지지한 단체 ‘스프링복’은 2006년 그를 “오랫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 애국자들(극우성향 잡지)’을 후원한 인물”이라 소개한 글을 홈페이지에 남겼다.
메어가 콕스 의원을 총격하면서 “영국이 먼저(Britain First)”라 외친 탓에 ‘브리턴퍼스트’라는 이름의 영국의 극우정당은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이 정당은 EU탈퇴를 주장하고 반EU·반이민 정책을 표방해왔다. 브리턴퍼스트는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사건은 끔찍한 일”이라며 “하지만 범인이 외친 것은 우리 정당 이름이 아니라 ‘구호’ 일뿐”이라며 의미 축소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건 직전까지 공표된 여론 조사에서는 브렉시트 찬성이 반대를 앞서는 형국이었다. 16일(현지시간) 공표된 여론조사(입소스 모리 조사)에서는 브렉시트 찬성이 49%, 반대가 43%로 나왔다. 같은 날 ICM이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도 찬성(49%)이 반대(44%)를 5%포인트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17일 당초 여론조사를 발표 예정이었던 BMG는 조사결과 발표를 하루 늦췄다. 가뜩이나 콕스의원 피살 사건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영국 정부도 만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국민투표 자체가 연기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치인들의 찬·반 캠페인이 모두 중단되고 투표에 대한 국민의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깜깜이’ 투표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칫 투표를 연기했다간 브렉시트 반대 전선의 캐머런 정부가 더욱 ‘궁지’에 몰릴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번 사건으로 브렉시트를 둘러싼 영국 내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투표연기시 대립만 더 격화될 수 있다. 또 브렉시트 투표제안 자체가 캐머런이 지난해 총선시 던진 공약이기 때문에 당초 책임 자체가 캐머런 정부에게 있다는 비난 또한 빗발치고 있다.
[이지용 기자 / 문재용 기자 /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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