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도전 영광의 순간으로 이어진 100년 세월
‘아시아 변방’에서 ‘세계 10강 반열’에 올라
올림픽 등 5대 메가 이벤트 모두 치러낸 5개국 자리매김
야구 축구 등 프로스포츠 활성화…육상, 수영 등 기초종목은 저조
[MK스포츠] ‘건민과 신민, 그리고 저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출범한 대한체육회가 오는 7월 13일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대한체육회는 일제 강점기엔 조선체육회라는 이름으로 스포츠를 통한 극일의 구심체 역할을, 광복 후에는 우수선수 발굴과 양성을 통한 국위선양으로 대한민국을 세계 스포츠 10강의 반열까지 끌어올렸다. 동, 하계올림픽, 월드컵 축구, 세계육상선수권, 세계수영선수권 등 5대 메가 스포츠이벤트를 모두 개최한 지구촌 5개국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대한체육회의 1세기 역사는 바로 고난과 도전, 영광의 순간으로 점철된 한국스포츠 100년의 역사다. 여명기와 개화기, 전성기로 나눠 한국체육 100년을 되돌아본다.
조선체육회 창립이어 제1회 전조선야구 개최
여명기(1920~1945년): 한국 체육의 근대적 의미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선교사들을 통해 각종 스포츠가 소개되기 시작했고 1895년 2월 2일 고종이 반포한 ‘교육입국조서’에서 덕육(德育) 지육(智育)과 함께 건강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자는 뜻에서 체육(體育)을 3대 강령으로 포함한데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에 맞선 저항 의식이 표출되면서 민족주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체육협회에 맞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가 창립됐다. 1920년 7월 13일 오후 8시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고원훈 보성전문 교장, 장덕수 동아일보 주필 등 70여 명이 창립총회를 갖고 조선체육회를 출범시킨 것. 이날 채택된 ‘보라 반공(半空)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으로 시작하는 창립취지서는 당대 명문으로 이름난 장덕수 주필이 쓰고 낭독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첫 대회로 그해 11월 4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현존 전국체전의 기원(紀元)이 된 제1회 전(全)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그 뒤 조선체육회는 하나씩 종목을 늘려 축구 정구 육상 빙상 등 대회를 개최했으며 1929년 6월에는 경성운동장에서 야구 정구 육상 3개 종목을 한데 묶어 종합대회인 제10회 전조선경기대회를 주최했다. 조선체육회는 또 씨름 역도 탁구 농구 등 여타 종목에 대해서도 언론사, 경기단체 등과 공동주최 또는 후원하면서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민족 자존감을 드높이는 극일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했다.
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우승…양정모 올림픽 첫 금
개화기(1945~1979년): 8.15 광복과 함께 조선체육동지회(위원장 이상백)는 7년 전 해산된 조선체육회를 재건하고 그해 10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10종목 4100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5일간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개회식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우남 이승만 박사는 운동장 선수단 맨 앞에 서 있던 기수 손기정을 보고 “저기 태극기를 든 선수가 손기정선수 아닌가? 내가 미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방랑의 슬픔을 맛보고 있을 때 손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 소식을 듣고 우리 민족이 아직 기개를 잃지 않고 있다고 여겨 얼마나 고무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선체육회는 정부수립도 하기 전인 1948년 1월 30일 스위스 생모리츠 제5회 동계올림픽에 ‘KOREA’로 처음 참가했으며 1948년 7월 29일 런던 하계올림픽에도 나가 김성집(역도) 한수안(복싱)이 각각 동메달을 땄다.
대한체육회는 1955년 4월 7일 서울시청 앞 관재청 건물을 불하받아 자체 건물을 소유하게 됐고 1955년 6월 13일 이기붕 대한체육회장이 한국 최초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선임됐다. 1966년 6월 28일에는 태릉선수촌, 30일에는 서울 무교동에 체육회관을 각각 준공했다. 1976년 8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양정모가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우승,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의 영예를 안았다.
올림픽 월드컵 성공 개최…프로스포츠도 활짝
전성기(1980~2020): 1980년대는 ‘스포츠 공화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한국 체육에 활기가 넘쳤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등 세계 5대 메가 스포츠이벤트가 모두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지구상에서 5대 메가 스포츠이벤트를 치러낸 나라는 한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 등 5개국뿐이다. 경기력도 1984년 LA올림픽 이후 2000년 시드니올림픽(12위)만 제외하고 모든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한국이 따낸 올림픽 금메달 모두 121개
한국이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부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까지 따낸 올림픽 금메달은 모두 121개(하계 90개, 동계 31개), 은메달은 112개(하계 87개, 동계 25개), 동메달은 104개(하계 90개, 동계 14개)로 메달 총수는 337개다. 서울올림픽의 완벽한 개최로 국운 상승의 계기를 만든 한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에서도 빈틈없는 깔끔한 대회진행으로 세계의 호평을 받았으며 경기 역시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강호를 꺾고 4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 체육은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프로씨름, 1990년대 프로농구, 프로배구가 각각 출범, 프로스포츠 시대를 활짝 열었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세계 스포츠가 휴업상태인 가운데 한국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프로골프 등 K-스포츠가 ESPN, BBC, NHK 등 외국 방송을 통해 현지에 중계돼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한편 엘리트 체육 육성에 힘써온 대한체육회는 2016년 3월 7일 생활체육 중심의 국민생활체육회와 통합, ‘스포츠 강국’에서 국민건강증진과 대표선수 경기력 강화를 함께 추구하는 ‘스포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종세(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아시아 변방’에서 ‘세계 10강 반열’에 올라
올림픽 등 5대 메가 이벤트 모두 치러낸 5개국 자리매김
야구 축구 등 프로스포츠 활성화…육상, 수영 등 기초종목은 저조
[MK스포츠] ‘건민과 신민, 그리고 저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출범한 대한체육회가 오는 7월 13일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대한체육회는 일제 강점기엔 조선체육회라는 이름으로 스포츠를 통한 극일의 구심체 역할을, 광복 후에는 우수선수 발굴과 양성을 통한 국위선양으로 대한민국을 세계 스포츠 10강의 반열까지 끌어올렸다. 동, 하계올림픽, 월드컵 축구, 세계육상선수권, 세계수영선수권 등 5대 메가 스포츠이벤트를 모두 개최한 지구촌 5개국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대한체육회의 1세기 역사는 바로 고난과 도전, 영광의 순간으로 점철된 한국스포츠 100년의 역사다. 여명기와 개화기, 전성기로 나눠 한국체육 100년을 되돌아본다.
조선체육회 창립이어 제1회 전조선야구 개최
여명기(1920~1945년): 한국 체육의 근대적 의미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선교사들을 통해 각종 스포츠가 소개되기 시작했고 1895년 2월 2일 고종이 반포한 ‘교육입국조서’에서 덕육(德育) 지육(智育)과 함께 건강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자는 뜻에서 체육(體育)을 3대 강령으로 포함한데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에 맞선 저항 의식이 표출되면서 민족주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체육협회에 맞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가 창립됐다. 1920년 7월 13일 오후 8시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고원훈 보성전문 교장, 장덕수 동아일보 주필 등 70여 명이 창립총회를 갖고 조선체육회를 출범시킨 것. 이날 채택된 ‘보라 반공(半空)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으로 시작하는 창립취지서는 당대 명문으로 이름난 장덕수 주필이 쓰고 낭독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첫 대회로 그해 11월 4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현존 전국체전의 기원(紀元)이 된 제1회 전(全)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그 뒤 조선체육회는 하나씩 종목을 늘려 축구 정구 육상 빙상 등 대회를 개최했으며 1929년 6월에는 경성운동장에서 야구 정구 육상 3개 종목을 한데 묶어 종합대회인 제10회 전조선경기대회를 주최했다. 조선체육회는 또 씨름 역도 탁구 농구 등 여타 종목에 대해서도 언론사, 경기단체 등과 공동주최 또는 후원하면서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민족 자존감을 드높이는 극일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했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이런 가운데 일본인과 비교해 한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한 스타플레이어들이 속출했는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대회 최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2시간29분19초2)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2시간31분42초), 사이클의 엄복동, 축구의 김용식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체육회는 1938년 7월 4일 조선총독부가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하면서 1945년 광복까지 모든 활동을 접어야했다.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우승…양정모 올림픽 첫 금
개화기(1945~1979년): 8.15 광복과 함께 조선체육동지회(위원장 이상백)는 7년 전 해산된 조선체육회를 재건하고 그해 10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10종목 4100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5일간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개회식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우남 이승만 박사는 운동장 선수단 맨 앞에 서 있던 기수 손기정을 보고 “저기 태극기를 든 선수가 손기정선수 아닌가? 내가 미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방랑의 슬픔을 맛보고 있을 때 손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 소식을 듣고 우리 민족이 아직 기개를 잃지 않고 있다고 여겨 얼마나 고무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서울운동장에서 1945년 10월 열린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 개회식에서 태극기를 든 기수 손기정이 감격에 겨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모든 선수와 관중이 숙연하게 이박사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 손기정은 감격에 겨워 흐느껴 울었고 이 모습이 언론을 통해 사진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1947년 4월에는 24세의 청년 서윤복이 제51회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25분39초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는 낭보를 전해왔다. 이 기록은 1935년 4월 3일 손기정이 일본에서 수립한 세계기록(2시간26분42초)을 12년 만에 1분03초 단축한 것. 한국은 3년 뒤 1950년 4월 함기용이 제54회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32분39초로 우승했고 2, 3위도 송길윤, 최윤칠이 차지했다.조선체육회는 정부수립도 하기 전인 1948년 1월 30일 스위스 생모리츠 제5회 동계올림픽에 ‘KOREA’로 처음 참가했으며 1948년 7월 29일 런던 하계올림픽에도 나가 김성집(역도) 한수안(복싱)이 각각 동메달을 땄다.
김성집(오른쪽)이 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 미들급 동메달 시상대에 서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조선체육회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4일 종로 YMCA에서 총회를 열고 명칭을 대한체육회로 변경했고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이름도 전국체육대회로 바꾸었다, 그해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3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서울운동장과 보조구장에서 정부수립경축대회 겸 제29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대한체육회는 1955년 4월 7일 서울시청 앞 관재청 건물을 불하받아 자체 건물을 소유하게 됐고 1955년 6월 13일 이기붕 대한체육회장이 한국 최초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선임됐다. 1966년 6월 28일에는 태릉선수촌, 30일에는 서울 무교동에 체육회관을 각각 준공했다. 1976년 8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양정모가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우승,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의 영예를 안았다.
올림픽 월드컵 성공 개최…프로스포츠도 활짝
전성기(1980~2020): 1980년대는 ‘스포츠 공화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한국 체육에 활기가 넘쳤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등 세계 5대 메가 스포츠이벤트가 모두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지구상에서 5대 메가 스포츠이벤트를 치러낸 나라는 한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 등 5개국뿐이다. 경기력도 1984년 LA올림픽 이후 2000년 시드니올림픽(12위)만 제외하고 모든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한국선수단이 1988년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 맨 마지막으로 입장하고 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특히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일본 나고야를 52대27로 꺾고 유치한 서울올림픽은 한국 스포츠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중심에 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북한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 전 세계 166개 IOC회원국 가운데 북한, 쿠바 등 6개국을 제외한 160개국이 참가, 동서화합의 한마당을 이뤄 ‘평화올림픽’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이 동서 냉전으로 반쪽대회로 치러져 더욱 높은 점수를 받은 것. 한국은 금메달 경쟁에서도 12개를 따 소련, 미국, 동독에 이어 4위에 올라 경기력을 인정받았다.한국이 따낸 올림픽 금메달 모두 121개
한국이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부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까지 따낸 올림픽 금메달은 모두 121개(하계 90개, 동계 31개), 은메달은 112개(하계 87개, 동계 25개), 동메달은 104개(하계 90개, 동계 14개)로 메달 총수는 337개다. 서울올림픽의 완벽한 개최로 국운 상승의 계기를 만든 한국은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에서도 빈틈없는 깔끔한 대회진행으로 세계의 호평을 받았으며 경기 역시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강호를 꺾고 4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한국과 독일의 준결승 경기가 열린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 모습.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축구는 세계 최초로 올림픽 9회 연속진출(2020 도쿄올림픽 포함)의 쾌거를 이루기도했다. 한국체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황영조가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수영의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막대한 대회 경비를 쏟아붓고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우리나라 체육은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프로씨름, 1990년대 프로농구, 프로배구가 각각 출범, 프로스포츠 시대를 활짝 열었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세계 스포츠가 휴업상태인 가운데 한국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프로골프 등 K-스포츠가 ESPN, BBC, NHK 등 외국 방송을 통해 현지에 중계돼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한편 엘리트 체육 육성에 힘써온 대한체육회는 2016년 3월 7일 생활체육 중심의 국민생활체육회와 통합, ‘스포츠 강국’에서 국민건강증진과 대표선수 경기력 강화를 함께 추구하는 ‘스포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종세(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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