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 가슴을 열고, 공기를 들이켰다. 와락, 달려드는 상큼한 향. 와인이다. 부르고뉴와 함께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보르도.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40km 가면 보르도 와인의 본향이자 성자의 마을로 불리는 생테밀리옹(St. Emilion)이다. 와인 마니아라면 이 마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뛸 터. 세계 최고의 와인 페트뤼스나 슈발 블랑, 오존의 포도밭이 이곳에 있어서다.
역시나, 심장이 뛰었다. 생테밀리옹은 얕은 구릉을 넘나들며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을 너머 계곡 사이에 요새처럼 자리해 있었다.
생테밀리옹. 도르도뉴 계곡의 가장 높은 언덕바지에 있는 이 마을은 전체가 하나의 요새다. 성당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로마의 원형극장 처럼 둥글다. 그 위에 듬성듬성 붉은 점의 행렬. 지중해풍 붉은 기와를 얹은 집들이다. 이 마을 인구라 해 봐야 7000여명. 평화로울 수 밖에 없다.
마을 길을 따라 걷는 건, 마치 다양한 와인향을 맡는 것 같은 느낌이다. 주먹 만한 잔돌이 촘촘히 깔린 골목길. 무른 돌이 세월에 깎여 곰보처럼 패인 담벼락. 하늘로 치솟은 성당의 첨탑. 온 종일 맑은 햇살이 내리는 광장이라니. 굳이 와인 맛으로 표현한다면 ‘라운드’한 감촉이랄까.
생테밀리옹의 상징은 와인 저장고(카브)다. 이게 지하로 이어진다. 그러니깐, 이 길, 아래, 바로 지하에는 인공으로 파서 만든 동굴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굴의 총길이만 무려 10여km. 본래 적의 침입에 대비한 은신처로 만들어졌다가 훗날 와인을 저장하던 카브로 사용된 거다.
생테밀리옹 여행은 첨탑이 솟은 모놀리스 성당에서 시작된다. 이 성당은 온종일 무반주 찬송가 합창을 틀어놓는다. 성당에는 부드러운 아리아가 조용하게 흘러 누구나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성당의 전면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화려한 창이 만들어졌다. 좌우로는 성자들의 조각상이 놓여 있고, 수백개의 촛불이 온종일 타오른다. 성당의 오른쪽에는 정사각형의 회랑이 있다. 그리스의 신전을 받치는 기둥처럼 사방에 기둥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놓였다.
성당에서 나와 첨탑을 찾아가면 생테밀리옹의 풍경이 발아래 펼쳐진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의 참화도 굳게 견뎌낸 마을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거닐던 거리와 집과 광장의 반질반질한 돌에는 인간의 숨결이 배어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이 ‘보석같은 돌’이라 칭송하는 마을의 풍경은 한없이 아늑하고다. 영화나 소설 속에 그려졌던 중세의 유럽 마을 풍경 그대로다.
첨탑을 지나면 마을 속으로 든다. 비좁은 골목은 수십 갈래로 흩어졌다 모였다가를 반복한다. 이 마을 지하에 조성된 카브처럼 지상의 길도 하나같이 곧은 게 없다. 그 골목을 따라 거니는 맛이 좋다. 계단도 없이 가파른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절반은 레스토랑이고 절반은 와인숍이다. 상점들은 하나같이 골목의 풍경과 어울리게 꾸며졌다. 가정집의 대문도 꽃과 화분으로 장식되어 있다. 벽에 붙여놓은 가로등만큼 아담하면서 장식적인 호텔 간판들도 이 오래된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테밀리옹의 고풍스런 향기에 취해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다니는 것도 지칠 때면 노천에 자리한 레스토랑을 찾으면 된다. 햇살이 강렬한 광장에는 파라솔을 이어 그늘을 만든 곳에 수십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사람들은 자리 하나씩 꿰차고 앉아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화이트와인으로 타는 속을 달랜다. 또 이 마을을 찾아 행복해 하며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며 이심전심의 마음을 읽는다.
저물녘이 되면 오렌지빛 햇살이 모놀리스 성당의 종탑에 스민다.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종탑에서 울려 퍼지면 관광객들도 하나둘씩 돌아가고 마을은 점점 더 깊은 고요에 잠긴다. 이 때쯤이면 마을을 벗어나 포도밭을 거닐 때다. 노랗게 타는 불빛이 초록으로 열지어선 포도밭을 물들일 때, 돌담을 따라 거니는 맛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밀레의 그림 ‘만종’에서 느껴지는 평화가 이 포도밭에 재현된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에서 포도나무들은 여름의 태양을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또 타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 뿌리는 석회질과 진흙으로 된 땅속 깊은 곳을 더듬어 내려갈 것이다. 태양과 땅의 기운을 모두 빨아 들여 포도는 검붉게 영글고, 농부들은 그 포도를 정성스럽게 수확해 와인을 빚는다. 그렇게 생테밀리옹 사람들은 와인을 빚으며 한없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던 성자를 추억할 것이다.
■ 김산환 작가는…
길의 작가다. 길이 좋아 ‘캠핑폐인’이란 책을 냈고, 길이 좋아 출판사도 운영중이다. 출판사 이름도 길과 엮인 ‘꿈의 지도’. 오늘도 어느 길 위에서 자신의 길을 꿈꾸고 있다.
▶▶ 생테밀리옹 와인 투어 100배 즐기는 Tip
1. 가려면 = 보르도까지는 파리에서 떼제베(TGV) 기차로 3시간, 항공은 1시간 남짓 걸린다. 보르도에서 생테밀리옹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 생테밀리옹을 비롯해 보르도 5대 샤또가 있는 메독이나 귀부 와인이 나는 소테른 등의 와인산지를 여행하려면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2. 와인 투어 하려면 = 보르도관광청에서 제공하는 와인 투어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보르도에 있는 샤또는 1만여개. 이 가운데 600여 곳이 관광객에게 샤또를 개방한다. 와인 투어는 반나절 도보 코스, 당일부터 1박2일까지 다양한 코스가 있다. 가격은 투어에 따라 제각각이다. 당일 이상은 차량과 식사가 제공된다. 개별적으로 샤또를 찾아갈 때는 투어 시간 등을 미리 알아보고 가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3. 숙박은 샤또에서 = 보르도의 이름난 샤또에서 숙박을 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성주가 머물렀던 침실에서 자면서 원하면 그 샤또에서 나는 와인을 곁들인 만찬도 할 수 있다. 숙박료는 1인당 150~250유로 내외. 저녁과 조식 가격도 합리적인 수준이다.
4. 이것만은 꼭 = 보르도의 와인과 여행 정보는 보르도관광청(www.bordeaux-tourism.com), 프랑스 농식품진흥공사(SOPEXA 02-3452-9492 www.sopexa.co.kr)에서 얻을 수 있다.
[글·사진 = 김산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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