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지난달 15일 오후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의 한 마을이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초토화된 가운데 실종자 수색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올여름은 유독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예년보다 양이 많고 시기도 집중된 호우에 이어 최근에는 태풍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며 많은 비를 뿌렸죠.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는데 가장 큰 피해가 난 곳이 경북 예천군에서 발생한 산사태였습니다. 무려 15명이 숨졌고, 산사태 발생 한 달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실종자 2명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거론되는 게 사방(砂防)시설, 즉 모래나 돌, 흙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 시설을 설치하는 겁니다. 사방시설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사방댐, 돌을 쌓는 석축 등이 있습니다.
사방댐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건 지난 2011년 일어난 서울 우면산 산사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16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된 게 예천군 산사태와 판박이였죠. 이에 우면산 일대에 사방시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2년이 흐른 지금, 이 우면산 사방시설이 법적 공방에 휘말렸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산사태 예방 시설 철거 요구한 땅주인
산사태가 일어난 지 8년이 흐른 지난 2019년, 국내 최대 종파 소속인 서울 성동구 소재 한 사찰이 서울시와 서초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우면산 일대 중 사찰이 소유한 ‘사유지’에 시와 구가 멋대로 사방댐 등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사찰 사유지는 6,000제곱미터 정도였고, 사방시설이 설치된 면적은 200제곱미터를 조금 넘었습니다. 사찰 측은 사유지에 만들어진 사방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사방시설로 얻은 부당이득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서초구는 2011년 우면산 산사태 이후 당시 사방사업법에 따라 해당 지역을 ‘사방지’로 지정하고 외부에 공고했습니다. 서울시는 이후 사방시설 설치 공사를 시작했고, 사방시설과 함께 해당 지역에 조경용 나무도 심고, 산책로도 만들었습니다. 시설들이 완성된 뒤 서초구는 현재까지 이 땅들을 점유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보상도 안 하고 멋대로 사유지에”
우면산에 설치된 사방댐 (사진=MBN)
사찰 측은 서울시와 서초구가 자기네 사유지에 멋대로 사방시설을 지어놓고도 법이 정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사업 전 소유자와 협의 의무도 법에 명시돼 있지만 소유자인 자신과 협의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방사업법 10조
시는 사방사업에 관한 토지 변경이나 구조물 설치 등으로 손실을 입은 자에게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
사방사업에 필요한 경우 토지소유자와 협의하거나 신청을 받아 사방지 토지를 매수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시는 사방사업에 관한 토지 변경이나 구조물 설치 등으로 손실을 입은 자에게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
사방사업에 필요한 경우 토지소유자와 협의하거나 신청을 받아 사방지 토지를 매수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아마 이 사찰은 사업이 시행될 당시에는 사방시설이 만들어지는 걸 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찰 소재지와 우면산 사이 거리가 있는 만큼 보상이나 매수협의없이 시설이 만들어졌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 걸로 보입니다.
“땅주인의 의무를 대신 해준 것”
반면, 서울시와 서초구는 정반대 주장을 했습니다. 사찰 측이 의무적으로 사방시설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자체가 대신 만들어줬다, 이에 따라 오히려 사찰 측이 설치비용을 부담해야 하는데 지자체가 공익차원으로 시설 설치를 대신 해줬다는 겁니다. 서울시와 서초구가 내세운 법적 근거도 있었죠.
당시 재난안전법 31조
재난발생 위험이 높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소유자로 하여금 보수나 보강 등 안전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당시 급경사지법 17조
붕괴위험이 있는 급경사지에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관계인에게 보수나 보강 등 안전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당시 자연재해대책법 12조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로 지정된 지역 소유자에게 재해 예방 조치를 명할 수 있다.
재난발생 위험이 높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소유자로 하여금 보수나 보강 등 안전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당시 급경사지법 17조
붕괴위험이 있는 급경사지에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관계인에게 보수나 보강 등 안전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당시 자연재해대책법 12조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로 지정된 지역 소유자에게 재해 예방 조치를 명할 수 있다.
“절차 문제 있더라도 철거는 안 돼”
서울중앙지법 (사진=연합뉴스)
법원 판단은 어땠을까요?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허준서 부장판사)는 지난 6월 1일 “서울시와 서초구는 사찰 측에 1억 6,000만 원을 지급하고, 추가로 월 188만 원씩 내라”고 선고했습니다. 보상과 부당이득을 돌려주긴 하되 철거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철거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근거로 법원은 사방사업법의 이 조항을 들었습니다.
사방사업법 13조
누구든지 사방사업을 시행하거나 사방시설을 관리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방사업을 시행하거나 사방시설을 관리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재난 예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조항이겠지만 ‘누구든지’ 거부할 수 없다니 언뜻 보기엔 토지 소유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조항으로도 보이죠. 이 조항을 근거로 법원은 “행정처분이 위법하더라도 중대한 게 아니라면 처분의 효과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쉽게 말해 산사태 예방이라는 효과가 크니 사방시설을 만드는 과정에 위법이 있었더라도 철거까지는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대신 법원은 오히려 사찰 측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것인데 보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서울시와 서초구 주장은 억지라고 봤습니다. 사방시설이라는 큰 공사가 토지소유자의 보수·보강 의무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만약 사찰 측이 원래 했어야 할 안전조치였다면 이런 안전조치를 명령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 서초구가 명령한 근거가 없으니 서울시와 서초구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법원은 판단했습니다. 이어 "손실보상은 하지 않고 점유해 얻은 이익은 법적 근거가 없다"며 서울시와 서초구가 사찰 측에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결국 소유자 동의 없이 사유지에 지어진 시설임에도 철거를 하지 못하게 된 사찰 측도, 억대 보상금과 함께 매달 사실상 사용료를 내야 하게 된 서울시와 서초구도 만족하지 못한 판결이 나오자 양측 모두 항소해 2심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재난 예방’ 만큼 중요한 건 ‘절차’
사찰 측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대법원 판단까지 나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난 2012년 산사태 위험지역으로 분류돼 사방시설이 만들어진 서울 구룡산 일대 토지 소유주였던 A 씨의 경우입니다. 당시 지자체가 잘못된 주소로 사방지 지정 공고를 보내는 바람에 A 씨는 사방시설 공사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주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지자체는 공사를 강행했고, A 씨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2016년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A 씨 사건을 심리한 법원 역시 시설 철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앞에서 본 사찰 측과 같았습니다. ‘누구도 사방사업을 거부할 수 없다’는 법 조항과 함께 ‘지자체가 공고를 잘못하긴 했지만 중대한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1심과 2심까지 A 씨에 대한 보상도 인정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대법원이 “보상 책임은 있다”고 판단해 보상만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긴 했죠.
최근의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한 곳에도 정부나 지자체는 사방사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산사태라는 재난을 막기 위한 사업이 필요하다는 건 부인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다만, 사찰이나 A 씨처럼 동의 없이 사유지에 사방시설이 만들어지는 경우나, 이로 인해 지자체가 비용을 물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적법한 절차에 따른 사업 진행 역시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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