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사, 역대 가장 큰 재산피해 낸 태풍
강릉에 하루동안 870mm 비 뿌려
'강하게 오래 때리는' 태풍에 대비 필요
강릉에 하루동안 870mm 비 뿌려
'강하게 오래 때리는' 태풍에 대비 필요
태풍 카눈이 소멸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남해안부터 시작해 북쪽까지 관통하는 독특한 이동 경로 때문에 커다란 피해가 우려됐습니다. 정부와 시민이 나서 대비를 했지만, 군위군에서 60대 남성이 급류에 휩쓸려 숨지고 전국 곳곳에서 상가와 주택이 침수되는 등 크고 작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며칠 전, 카눈이 우리나라에 상륙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다시 주목받은 태풍이 있습니다. 바로 2002년 한반도를 강타한 '루사'입니다. 루사 역시 남해안부터 한반도를 가로질러 관통했습니다. 또 움직이는 속도가 느렸다는 점도 닮았죠. 태풍은 보통 시속 30~40km 수준으로 우리나라를 지나가지만 루사와 카눈은 모두 20km 안팎으로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천천히 내륙에 오래 머물며 강풍과 비로 한반도를 강타했습니다.
카눈도 아픈 피해를 입혔지만 루사가 남긴 상처는 카눈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그래서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분이 루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거겠죠.
태풍 루사의 모습 (기상청)
태풍 루사의 탄생
태풍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먼저 뜨거운 바다가 필요합니다. 태양열을 꾸준히 받는 바다는 온도가 높아 대기에 많은 수증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수증기는 태풍을 만드는 재료죠. 이 수증기가 상승하면서 계속 쌓이게 되는데, 이때 탑처럼 높게 생긴 적란운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적란운 근처에 소용돌이가 형성되고 이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다보면 태풍이 완성됩니다.
루사 역시 2002년 8월 23일, 괌 동북동쪽 약 1,800km 부근 해상에서 태어났습니다. 말레이시아말로 사슴이라는 뜻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루사는 사흘 만에 본격적으로 태풍의 모습을 갖춘 뒤 북쪽으로 서서히 올라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사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힐지 알아차리지 못했죠.
루사는 지치지 않는 태풍이었습니다. 태풍은 위로 올라오며 따뜻한 태평양과 멀어지고 비를 뿌리며 에너지를 소진해 세력이 약해지는 게 보통이지만 루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태풍은 중심기압이 낮을수록 강력한데, 루사는 960헥토파스칼 수준의 낮은 중심기압을 꾸준히 유지하며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8월 31일 오후 3시 30분, 루사는 전남 고흥군 해상을 통해 한반도 상륙했습니다.
역대급 피해를 남기다
루사는 자신이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를 하나씩 초토화시켰습니다.
재산피해가 5조 1,419억 원. 태풍으로 인해 발생한 역대 가장 큰 재산피해입니다. 심지어 루사가 발생한 게 2002년, 지금보다 물가가 훨씬 낮았던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였습니다.
인명피해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태풍이 상륙한 고흥군에서는 팔영산 계곡과 용반마을 하천에서 급류에 휩쓸려 시민들이 숨졌습니다. 전남 담양에서는 석고보드 업체 직원 2명이 담벼락에 깔려 숨졌고, 전북 지역에서도 감전이나 담 붕괴로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강릉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의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이때 강릉은 하루에 비가 870mm, 무려 87cm나 내렸습니다. 이 날이 우리나라 기상 관측 역사상 하루 동안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로 기록됐는데, 말 그대로 '역대급' 물폭탄에 강릉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강릉 대동2리 마을은 불어난 물이 제방을 넘쳐 흘려 마을을 덮치며 일가족 9명이 한순간에 실종됐습니다. 당시 주민은 "급류가 제방을 뚫고 지나면서 순식간에 온 마을이 초토화됐다"고 말했습니다. 왕산면 국도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차량이 10여대가 한순간에 매몰돼 인명피해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루사 단 하나의 태풍으로 전국에서 246명이 숨졌거나 실종됐습니다.
태풍 루사 경로 (기상청)
강하게 오래 때렸다
루사가 큰 피해가 입혔던 이유를 요약하면 '강하게 오랫동안 때렸다' 입니다.
먼저 '강하게' 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루사는 먼길을 지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수온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남해상의 해수면 온도 가 26°C로 평년보다 2~3°C 정도 높아 태풍의 발달을 촉진하는 에너지원이 충분히 공급됐습니다. 루사가 올라오며 바다에 비를 뿌렸고 이로 인해 체력이 떨어질 무렵 다시 우리나라의 따뜻한 바다의 수증기가 에너지를 보충해줘 세력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다음은 '오래'입니다. 루사는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렸습니다.
다른 메이저 태풍과 비교를 해볼까요. 루사는 우리나라에 8월 31일 오후 3시 30분 상륙해 9월 1일 오후 3시쯤 한반도를 빠져나갔습니다. 꼬박 24시간 동안 한반도에 머무른 겁니다. 이에 비해 매미는 2003년 9월 12일 오후 8시쯤 경남 사천시 부근으로 상륙한 다음날 오전 2시 30분쯤 울진 해안을 통해 동해로 빠져나가 약 6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나리는 2007년 9월 16일에 상륙해 약 6시간을, 곤파스는 2010년 9월 2일부터 약 4시간동안 우리나에 머물렀습니다. 4~6시간 정도를 머무는 다른 태풍과 달리 루사는 24시간 동안 천천히 이동하며 피해를 입힌 겁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루사가 머무른 이유는 먼저 이동경로가 길었기 때문입니다. 루사는 전남 고흥부터 강원도 속초까지 우리나라를 대각선으로 관통했습니다. 이동경로가 길었던 만큼 머무른 시간도 늘었겠죠. 또 태풍을 이동시키는 힘도 약했습니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고기압의 위치가 편서풍을 약화시키는 형태였고 태풍을 옮기는 역할을 하는 편서풍이 약하게 불고 있어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겁니다.
앞으로 우리는 루사처럼 강하게 오랫동안 때리는 태풍을 이전보다 자주 만날 가능성이 큽니다. 해수면의 온도가 높아졌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재난 대처 시스템이 이런 괴물 태풍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꼼꼼한 점검이 필요해 보입니다.
[ 강세현 기자 / accent@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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