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직후 출입이 통제된 이태원 거리 / 사진=연합뉴스
지난주 토요일 밤,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했습니다. 조금 일찍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죠. 눈이 슬슬 감기던 그때, 카카오톡 단체방에 누군가 지금 이태원에 큰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처음 몇 분간은 차마 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그 후로 수많은 메시지가 날아 왔고, 결국 다음 날 오전까지 부서원 전원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야. “아 정말 큰일이 났구나” 싶었습니다.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 거지? 10명? 20명? 설마 50명까진 안 되겠지?” 당장 다음 날 새벽에 출근을 해야 했기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억지로 잠을 청했습니다.
그냥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밤사이 이태원 한 곳에서 156명이 사망하고 200명에 가까운 사람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4일 기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폭 3.2m의 비극...'폭 4m 미만 골목' 우리 주변에도 수두룩
초대형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고작 폭 3.2m, 길이 40m 좁은 골목에서 벌어졌습니다. 이태원에 이런 골목이 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죠. 좁고 경사진 골목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사고가 터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그 골목 앞에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골목이 서울에 얼마나 있는 걸까? 다른 곳은 위험하지 않을까?
지난해 7월 서울시 산하 연구기관인 ‘서울연구원’은 <서울시 생활도로 관리 실태와 개선방안>이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기본적으론 폭이 12m 미만인 ‘생활도로’를 연구한 보고서이지만, 지리정보시스템(GIS)를 이용해 폭 4m 미만 도로의 데이터도 따로 분리해냈습니다.
여기서 나온 데이터를 저희 취재팀이 조금 더 가공해봤는데요. 서울 시내 전체 도로는 8,282km. 이 가운데 폭 4m 미만의 좁은 도로는 1,907km 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23%. 그러니까 도로 길이를 기준으로 보면 4곳 중 1곳은 폭 4m 미만이란 뜻이죠.
이런 도로는 어디에 가장 많았을까요? 서울시 자치구 25개를 기준으로 비교해봤는데요. 가장 비율이 높았던 자치구 상위 10곳을 뽑아 아래 지도에 표시했습니다.
MBN 방송 캡처11
1위는 서울시 중구였습니다. 전체 도로 114km 중 54km가 폭 4m 미만 도로네요. 비율로 따지면 무려 47%입니다. 그 뒤를 종로구, 은평구, 서대문구, 동작구, 동대문구, 강북구, 용산구, 구로구, 관악구가 이었습니다. 용산구는 8위였습니다. 전체 도로 중 29%가 폭 4m 미만의 도로였습니다. 이번 참사가 일어났던 그 골목 역시 포함됐습니다.한강 이남 지역보다는 강북 지역 그 중에서도 사대문을 중심으로 한 도심 지역의 비율이 높았는데요. 대표적인 구시가지들이죠.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에 걸쳐 형성된 길이기에 당연히 좁고 구불구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골목 개선 필요”...각 자치구에 반영됐나?
그렇다면 서울연구원이 이 보고서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뭘까요?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보고서의 마지막 파트 <생활도로에서의 시설물 관리 개선방안> 부분을 보겠습니다. 폭 4m 미만 도로를 콕 집은 내용이 있네요.
MBN 방송 캡처
소방차 등 구급 차량 진입이 어려운 만큼 이런 좁은 도로가 대형 재난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걸 지적한 겁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는데요. 바로 경사진 도로입니다. 보고서는 좁은 도로에 경사가 있는 경우 넘어짐이나 미끄러짐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미끄럼 방지 포장’ 등의 조치가 시급하다고 지적합니다. 굳이 이번 이태원 참사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죠.연구는 서울시 각 자치구가 이런 좁은 도로에 대해 높은 정책적 우선 순위를 두고, 정비 및 재생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이 보고서는 서울시 안전총괄실에 제출됐습니다. 보고서가 나온 지 1년 반이 다 돼 가지만, 정책에 제대로 반영 되진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 골목들은 여전히 좁고 위태롭습니다. 서울시 안전총괄실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첫 번째 핵심사업은 ‘365일 재난과 사고로부터 안전한 도시 서울’입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좁은 골목
좁았던 그 골목만큼이나 참사 이후로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들도 구불구불하고 답답합니다. 시민의 안전에 책임을 져야 하는 기관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고, 불확실한 책임 소재 위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피해자들을 조롱하거나 참사를 분열의 대상으로 삼는 움직임까지 보입니다. 그 사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뒷전이 되고 있습니다.한 작가는 거리와 길은 구분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길은 도착이라는 목적에 충실하다면, 거리는 경험이라는 과정의 성격을 지닌다.”(『도시를 걷다』, 이훈길) 돌이켜보면 이번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좁든 미끄럽든 상관하지 않고 바삐 길을 걸었던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사로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겨있는 지금, 길이 아닌 거리에 서서 이런저런 경험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차분하게 조망하고 하나하나 고쳐야할 때가 아닐까요.
[민경영 기자 business@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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