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러그드 보이, 오디션, DVD, 하이힐을 신은 소녀, 예쁜 남자, 좋아하면 울리는. 1990년대 말 윙크 공모 당선작 '탤런트’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신인 만화가는 천재 만화가란 별칭을 얻은 데 이어 만화잡지에서 웹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여전한 기세를 자랑했다. 일부 기성 작가들이 프레임(칸)이 일정하지 않은 세로형 웹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할 때 천계영 작가는 신진 웹툰 작가보다 더 기발한 상상력과 참신한 그림체로 무장해 웹툰의 젊은 독자층을 팬으로 끌어들이며 위력을 공고히 했다. 작가가 직접 '새로운 기술과 제작방식'을 강조할 정도로 늘 도전에 익숙한 그다.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은 지난 2014년 연재 시작부터 다음웹툰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난 3일 유튜브로 먼저 인사했다. 지난해 3월 건강 문제로 '좋아하면 울리는' 연재 중단을 알린지 약 1년3개월만이다. 여러 번의 수술 끝에 퇴행성 관절염 등으로 손가락을 편하게 움직일 수 없자 명령어를 이용해 목소리로 만화를 그리게 된 천 작가가 그의 작업 과정을 대중과 팬에게 소개한 것이다.
약 1시간 분량의 영상 초반, 천 작가는 "아 화면이 나오네요. 너무 반가워요. 잘 지냈어요?"라며 친구를 대하듯 반갑게 안부를 묻는다. 그는 "아파서 연재가 중단돼 있는 상태다. 독자에게 힘을 얻어야 다음 원고를 할 수 있는데, 힘을 받아 더 열심히 하는 게 방송의 목표"라고 밝혔다.
천 작가는 마우스 클릭이 힘들어 손가락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원고를 쓴다. 마우스를 클릭할수록 연골이 닳기 때문에 오른쪽 마우스로 좌표만 찾고 클릭은 명령어로 한다. 무심코 클릭하지 않도록 마우스 사이를 막았다. 왼손은 트랙패드를 사용해 최소로 클릭하는 데 쓴다.
천 작가는 "펜 타입이나 스타일러스 등 시중에 나온 모든 종류의 마우스와 입력 장치를 사용해봤다. 발 마우스·키보드는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해서 힘들다. (프로그램과)호흡을 맞춰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8 콘티 작업에 들어간 천 작가는 "프레임 한 개, 보통대사, 줄 바꿔서, 왼쪽 말칸, 더 크게" 등의 명령어를 거듭 외쳤다. 시청자에게 말을 걸며 작업을 하다보니 종종 이를 명령어로 인식해 오류가 났지만 작업 과정은 즐거웠다. 설정 완료 시 프로그램이 "됐냐?"라고 묻도록 한 것도 그의 유쾌함을 잘 드러냈다.
천 작가는 주요 등장인물 외 엑스트라를 '봉식이'란 명령어로 사용했다. 영상 썸네일 제목이 '봉식이 찾아줘'인 것도 이 때문이다. '좋아하면 울리는' 163화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이지만 천 작가는 거듭 봉식이의 표정을 살피고 입꼬리 오르내렸다. 이목구비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봉식이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말풍선 크기와 위치 역시 세심하게 살폈다.
천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펜이 아닌 3D 프로그램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표정이나 동작을 바꾸는 작업을 해왔다. 이날 작업 역시 '시네마 4D'를 이용해 기존에 만들어 둔 다양한 3D 캐릭터 모습을 명령어로 변화를 준 뒤 2D 그림체로 마무리했다. 수작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과거의 도전이 지금의 그에게 힘이 된 셈이다.
결국 이날 방송은 주요등장 인물인 몬순이의 얼굴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마쳤다. 프로그램이 일시적 오류로 거듭 다운되자 천 작가는 "왜 이러는지 아시는 분 연락주세요"라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번 생중계 방송에는 600여명의 독자가 참여했다. 현재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연재에 대한 기대감과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천 작가는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을 정기적으로 올리거나 하루종일 라이브 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장비와 명령어 프로그램 등도 소개할 계획이다. '좋아하면 울리는'은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돼 곧 방영된다.
천 작가는 “속도가 느리지만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 원고를 계속하는 게 목표"라며 "드라마 방영 전에 원고를 마쳐서 결말을 먼저 보여드리고 싶다"고 각오를 전했다.
[디지털뉴스국 배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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