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A양(15)은 얼마 전 '대리입금'을 통해 돈을 빌렸다.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공연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A양은 문득 트위터에서 본 대리입금 광고가 생각났다. A양은 자신이 원하는 금액과 상환 기간 등을 제시한 사람과 접촉한 뒤 12만원을 빌려 열흘 뒤 15만원에 갚겠다고 흥정해 거래가 성사됐다.
최근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이른바 '대리입금'이 성행하면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대리입금은 급전이 필요한 곳에 대신 돈을 지불해 주고 고금리의 이자를 받는 행위를 뜻한다. 한 번에 돈을 빌리는 규모는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30만원 안팎이지만, 제때 갚지 못하면 협박 전화에 시달리거나 원치 않게 개인 정보가 공개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 SNS로 은밀하게…이자는 '수고비', 연체료는 '지각비'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 등 SNS에 `대리입금`, `댈입`(대리입금의 약칭), `댈구`(대리입금 구함) 등의 단어를 검색하면 나타나는 게시물들. [사진 출처 =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 캡처]
대리입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카카오스토리 등의 대리입금 모집 광고 계정은 '#대리입금' '#댈입' '#돈빌려드려요' 등의 해시태그를 단 글을 게재한다. 급전이 절실한 청소년들은 계정에 쪽지(메시지)를 보낸다. 대리입금 모집인은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을 상대로 흥정을 벌인다. 모집인은 원금을 포함해 가장 많은 수고비(이자)를 제시하는 사람을 낙점한다. 가령 돈을 빌리는 사람이 "15만원을 빌리고 20만원을 갚겠다"고 흥정할 경우, 15만원은 원금이고 5만원은 수고비다.이에 따라 돈을 빌리는 사람은 전화번호, 거주지 주소, 신분증 사본 등 자신의 개인 정보를 대리입금 모집인의 계정에 보낸다. 상대의 요구에 따라 부모나 친·인척의 개인 정보를 보내기도 한다. 각서나 차용증을 써야 돈을 빌려주는 사례도 있다. 이렇게 상대방 개인 정보를 확인한 대리입금 모집인은 요청 받은 계좌로 돈을 부친다. 대리입금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 기간은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 주어진다. 약정한 기간 안에 돈을 못 갚을 경우 지각비(연체료)를 물어야 한다. 금액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상환 기한을 초과한 시점부터 돈을 빌려준 사람은 '1분당 1500원', '시간당 1만원' 등의 방식으로 지각비를 매긴다.
◆ 전화·문자 독촉은 기본, SNS에 '신상 공개'까지
청소년들이 대리입금을 이용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거나 인기 가수 공연 티켓과 굿즈(기념품)를 사거나 심지어는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구매할 목적으로 자신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을 찾는다.
제도권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을 길이 막힌 청소년들은 부모나 지인, 친·인척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대리입금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고등학생 B양(17)은 "한 반에 두세 명씩 대리입금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부모님이나 이모, 고모한테 돈을 빌리려니 눈치 보일 때가 많고 그렇다고 우리가 은행에 찾아가서 대출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대리입금에 빠진 청소년들은 불법 추심 피해를 겪기도 한다. 지난해 9월 제주에서는 고교생 29명을 상대로 연이율 2600~8200% 수준의 폭리 대출을 해준 뒤 이를 못 갚은 청소년들의 부모에게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채무 상환을 독촉한 20대 무등록 대부업자 등 5명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지난 1월 광주에서는 고교생 3명이 빌려준 돈을 받아내려고 친구의 집을 찾아가 현관문을 걷어차는 등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입건된 사례도 있었다.
약정한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면 개인 정보가 SNS에 공개되는 피해를 당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고등학생 C군(17)은 "몇 주 전 부득이한 상황으로 '페이스북 친구'로부터 15만원을 빌리면서 일주일 안에 25만원을 갚겠다고 약속했는데 기한 내 돈을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내 얼굴 사진과 이름을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다"라며 "나는 아직 청소년이고, (제때 갚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기 때문에 개인 정보가 공개된 피해를 감수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가 신고꺼려 실태파악 어려워"
대리입금 과정에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수고비 명목으로 대출 규모의 30%를 웃도는 이자를 요구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법정 최고 이율 '연 24%'를 웃도는 폭리로, 사실상 소액 고금리 대출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10만원 미만의 대출은 이자제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대리입금이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SNS 메시지를 통해 소액으로 대출이 진행되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대리입금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리입금 원금 액수가 적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초고금리 대출'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신고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경찰청에서는 지난 5월 한 달 동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대리입금 피해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했다. 학생이 피해를 당했을 때 학교전담경찰관이나 교사에게 신고하도록 안내하는 교육도 진행했지만 접수된 신고 건수가 전무한 실정이다.
경기 고양시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는 학교전담경찰관은 "한 반에 몇 명씩은 (대리입금을) 한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신고가 들어온 적은 거의 없다"며 "휴대폰을 이용해 음성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증거를 남기기가 쉽지 않고, 빌리는 학생 입장에서도 부모 몰래 하는 것이라서 자진 신고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양자 간의 거래라면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금전 대여 행위가 꾸준히 이어질 경우, 이때 돈을 빌려준 사람은 대부업법(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게 된다. 대부업을 하면서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하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대리입금을 내세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쩌다 한 번' 거래하는 것인지, 지속해서 활동하는지 여부를 당국이 판단하고 규제하기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법무법인 세종 백대용 변호사는 "두 사람 사이에 돈을 빌리고 갚는 행위를 놓고 단순히 사인과 사인 간의 일회성 거래인지, 사실상의 '비즈니스'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며 "대리입금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규제하기에는 현실적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강조했다.
◆개인정보 공개는 불법
현재로서는 대리입금 광고를 발견하면 즉시 경찰을 비롯한 관련기관에 신고하는 것이 최선이다. SNS에서 불법 금융광고를 발견할 경우 금융감독원 불법사금융피해신고센터(1332번)에 연락하거나 홈페이지에 접속해 신고해야 한다.
특히 상환을 연체했다는 이유로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행위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
백대용 변호사는 "개인정보보호법상 당사자 동의 없이 제3자에게 개인 정보를 공유 또는 제공하거나 수집한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 개인 정보를 활용할 경우 '목적 외 이용'에 해당한다"며 "이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청소년들에게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시민단체 금융소비자연맹 강형구 금융국장은 "청소년은 수입과 지출에 대한 개념 등 경제관이 미약하게 형성돼 있다"며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용 금융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금융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디지털뉴스국 박동우 인턴기자 / 최서진 인턴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