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오른손은 온통 시커먼 검댕이로 물들어 있었다. 지난 35여년 간 맨손으로 구두약을 구두에 직접 칠하고 닦아 온 탓이다.
세제로 닦고 물에 씻어도 손에 스며든 세월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천으로 약칠하고 광내면 '빈틈'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고집스런 '장인정신'이 만든 얼룩이다. 흉하고 거친 손이지만 그의 구둣방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추운 겨울 날씨에도 수년 째 매일 아침 인근 로터리에서 교통정리 봉사를 자청하고 있다. 수차례 지역내 소외계층 고등학생들에게 수백만원씩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2~3평 남짓한 그의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구둣방 앞엔 때 마침 여러 명의 노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줄 서 있었다. 그는 십 수년째 벌이가 없는 지역 어르신들의 구두를 무료로 닦아주고 또 인근 장애인 복지단체들도 찾아 구두를 무료로 닦아주고 있다.
경안동 내 2~3평 공간에서 하루 열 시간 구두닦이가 밤늦게 끝나면 그는 복싱체육관 관장으로 일한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끝내 이루지 못한 '세계적 복서'로의 꿈을 후배육성을 통해 이뤄보기 위해서란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일등 한번 해본 적 없는 그의 이름은 박일등(54)이다.
박씨가 스스로 부르는 자칭 별명은 '구두닦이 박짱'이다. 일본 도쿄의 최고급 데이코쿠 호텔에서 42년간 구두를 닦고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도 단골로 찾아 일본의 '장인정신'을 배웠다고 한 '구두닦이 긴짱'을 존경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춥고 배고프던 시절 이렇게 구두를 닦는 10분 동안은 배고픔을 잊고 오로지 한 켤레 구두 광을 내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며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도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는 몇 일간은 똑같은 기분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구굿방에서 5시간에 걸쳐 들은 박씨의 54년 인생은 '7전8기'의 연속이었다. 부산의 한 빈민 농가에서 태어난 박씨는 장애인 어머니와 폭력 아버지 아래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행 열차에 무임승차 후 무작정 상경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국수공장에 취업했으나 한번도 국수를 배불리 먹어본 적 없었다고 한다. 열 아홉살 나이에 그는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복싱계에 입문했고 MBC신인왕전에선 주니어플라이급 3위로 화려하게 프로복서로 데뷔했다. 한동안 그는 11전10승에 이를 정도로 무적의 주먹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한계가 닥쳤다.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에 결국 체력전에서 버티지못하고 패가 쌓이면서 권투를 포기하고 글러브 대신 구둣통을 들어야 했다.
그는 이제 구둣방과 함께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내와 함께 음식점도 경영한다. 한마디로 먹고 살만해진 것이다.
그는 지난 2011년 코레일에 "30년 전 가진 것이 없어 열차에 무임승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때 진 빚을 갚고 싶습니다" 라며 현금 7만원이 든 봉투를 보내 잔잔한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산전수전 다겪은 박씨지만 최근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촛불집회를 보면서 평생 가장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그는 분노에 가득차 거리로 나선 젊은 청춘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저와 달리 그런 곱고 하얀 손을 가지신 분들이 모범이 되지는 못할 망정 나라를 뒤흔들고 국민들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며 "정직하게 살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는 서민들의 '희망'을 꺾어버린 게 가장 큰 죄"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 역시 거리를 전전하던 시절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박탈감으로 일탈의 유혹이 많았다"며 "흙수저로 태어나 그래도 작은 구둣방과 체육관까지 갖게 된 내인생을 돌이켜 보면 결국 노력은 마지막 순간에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 다는 걸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금수저·빽수저 탓에 절망이 넘치는 '헬조선'이지만 젊은 청춘들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도전'을 포기해선 안된다는 게 그의 당부다.
좁은 구둣방에서 박씨의 새로운 도전 역시 싹트고 있다. 최근엔 한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틈틈이 인터넷강의를 들으며 만학도로서 꿈을 키우고 있다. 또 하나 그의 도전은 구두닦이라는 타이틀에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시장'이다. 그는 벌써 지금까지 4번이나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2018년엔 또다시 시장직에 도전할 거란다. 사실 출마해서 지금까지 딱 한번 10% 득표한 것 빼고는 큰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에게 '왜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단순 명료했다. "구두닦이가 정치를 하면 뭐가 바뀌느냐고 하겠지만 구두닦이가 정치를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바뀌는 것 아닌가요. "
[경기 광주 =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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