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취업난으로 졸업을 미루거나 졸업 후에도 1년에서 2년 가량 취업 재수·삼수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입사 연령이 점차 고령화되면서 나이 어린 상사와 나이 많은 부하 직원의 조합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이에 따라 나이 어린 선배를 모셔야 하는 부하 직원은 물론 나이 많은 후배를 관리해야 하는 상사들의 고충도 만만찮다.
◆ 어제의 후배가 오늘의 상사 "안녕...하십니까?"
지난해 취업에 성공한 늦깎이 직장인 박정훈(30·가명)씨는 회사에서 머쓱한 일이 많아졌다. 고시 공부를 하다 뒤늦게 취업한 탓에 동기들보다 많게는 5살까지 많은 건 물론이고 나이 어린 선배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털털하게 넘어갔던 박씨에게 마침내 위기가 찾아왔다. 대학교 2년 후배 A가 사무실에 턱하니 앉아있었던 것.
낯선 곳에서 만난 익숙한 얼굴에 반가운 것도 잠시 뿐 금세 민망함이 밀려왔다. 대학 시절 선배라는 핑계로 인생에 대한 일장연설을 했던 술자리며, 전공 관련 조언을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굉장한 어른인 양 굴었던 이른바 '흑역사'가 떠오르면서 '상사'로 마주하기 왠지 부끄러웠던 것이다. 입사 전 후배가 이 회사에 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하필 같은 부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큰 난관은 후배이자 상사인 A의 한마디였다. 탕비실에서 마주친 A가 "형, 오랜만에 보네요. 근데 회사에서는 아무래도 제가 선배니까 서로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보는 눈도 많고요"라는 말을 건넸던 것이다.
이후 박씨는 A를 마주하기가 더 불편해졌다. 회사 복도에서 만나면 "안녕...하십니까"라고 쭈뼛거리기 일쑤다. 박씨는 "예의를 안 차리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는데 굳이 먼저 잘하라고 하니까 관계가 더 위축된 것 같다"며 "나이 많은 대접을 받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고나니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고 말했다.
◆ "후배만 불편한가요? 저도 엄청 힘들거든요!"
5년차 직장인 김지현(28·女·가명)씨는 요즘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다. 지현씨는 소위 말하는 '칼졸업'을 해 휴학 없이 직장에 입사한 케이스로 2010년 입사 당시에도 어린 축에 속했다. 회사 생활은 벌써 5년차로 접어들지만 어린 나이 탓에 후배들을 대하는 게 영 쉽지만은 않다는 게 지현 씨의 설명이다.
특히 올해 초 배치된 신입사원 B(29·男·가명)의 사수를 맡은 이후에는 스트레스도 늘었다. 워낙에 왜소한 체격에다가 앳된 얼굴의 지현씨와 달리 나이도 많고 체격도 큰 B와 같이 다니다보면 대체 누가 선배이고 후배인지 알 수가 없다는 주위의 농담부터 시작해서 후배의 미묘한 말대꾸까지 신경 써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얼마전 회식자리서 B가 동기들에게 하는 얘기를 듣고는 더 불편해졌다. B가 "늦게 입사한 게 죄 아니겠냐"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던 것이다. 이후 지현씨는 업무 지시를 내릴 때도 왠지 모르게 껄끄럽고, B가 자신의 말을 잘 따르지 않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현씨는 "나이 많은 후배가 저를 '모시는' 게 불편할 거라고 걱정의 눈길을 많이 보내지만 사실상 불편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며 "은근슬쩍 나이도 어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편하게 대하려는 후배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사람인이 직장인 108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64.6%가 나이 많은 부하와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이 중 49.9%가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또 스트레스는 여성(55.8%)이 남성(46.7%)보다 더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의 이유로는 '업무 지시가 어려워서'(42%, 복수응답), '내 의견을 무시하거나 따르지 않아서'(36.2%), '잘못을 지적하기 어려워서'(35.6%), '나이 많은 걸 은근히 과시해서'(26.1%), '말을 놓기 어려워서'(20.1%) 등을 들었다.
한편 나이 어린 상사와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48.5%였고 이들 중 절반 이상(54.6%)이 '스트레스를 받은 적 있다'고 답했다.
이들의 경우 '상사가 나이를 의식해 권위적으로 행동해서'(29.4%, 복수응답) 스트레스를 받는 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밖에 계속해서 '상사가 리더십이 없어서'(28%), '호칭을 부를 때마다 어색해서'(27.3%), '어린 상사에게 조아려야 해서'(25.5%), '내 의견을 무시하거나 면박을 줘서'(19.6%), '자존심이 상해서'(19.6%) 등의 의견이 있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회사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선후배 관계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오만한 행동보다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매경닷컴 김잔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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