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남북외교장관의 조우는 불과 '3분'이었다. 인사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눴지만 남북간의 현격한 입장차만 확인했다.
지난 6일 저녁(현지시각) 필리핀 마닐라 '몰오브아시아' 아레나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환영만찬 대기실. 언론에 비공개된 장소이고 각국 외교장관들이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자리였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도 악수를 나눴다.
강 장관은 리 외무상에게 "베를린 구상의 후속조치인 우리 측의 대북제안(적십자회담·남북 군사당국회담)에 대한 북한의 호응을 기대한다"며 "두 가지 제의는 시급하니 다른 정치적 사안을 다 제껴 놓고 당장 시행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을 건넸다. 리 외무상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남측이 미국과 대북압박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대북 제안에는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답했다고 외교부 당국자가 전했다.
강 장관은 다시 리 외무상에게 우리 측 제의의 진정성을 강조하고 북측의 호응을 재차 촉구했다. 이에 대해 리 외무상이 어떤 답변을 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외교부 1·2차관을 지낸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서로 대화가 이뤄진 것은 긍정적이나 양측이 모두 정해진 입장을 되풀이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남북 중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냐는 질문에 외교부 당국자는 "누가 먼저 다가간 것이 아니고 대기실에서 장관들이 악수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조우"라 설명했다. 하지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던 쪽은 강 장관이었다. 강 장관은 ARF참석 전 "이번 계기를 활용해 우리 정부가 북측에 제안한 (남북대화)제의에 호응해야 한다는 점을 전달했으면 한다"고 했다. 우리 측이 먼저 말을 건넸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강 장관은 리 외무상을 만나기 전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지극히 인도주의적인 남북 대화 제의에 미 측의 공감을 얻었다"며 남북 접촉 전 일종의'양해'를 구했다. 미국은 현재 북한이 유일하게 초청받는 다자안보협의체 ARF에서 북한을 제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ARF만찬장이 아닌 대기실에서 남북 외교장관간 조우가 이뤄진 것 역시 한미일이 함께 대북 압박 정책을 강화하는 현실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강 장관과 리 외무상의 악수 장면은 영상이나 사진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번 남북외교장관의 조우는 전임 정부 4년간 ARF에서 있었던 남북 외교장관 접촉과는 분명 달랐다. 2013년~2016년 ARF에 모두 참석했던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각 회의에 참석했던 박의춘·리수용·리용호 외무상과 악수를 하며 "반갑습니다" 정도의 인사말만 건넸다.
남북 교류가 활발했던 참여정부 기간 남북 외교장관은 ARF에서 만나 회동을 갖고 공동 보도문을 낸 적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2011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ARF에서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간 회담이 있었을 뿐 장관급 회동은 10년째 열리지 않고 있다. 2011년 북측 6자 수석 대표가 지금 리 외무상이었다. 리 외무상은 위성락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북한이 우선 핵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는 사전 조치를 취하고 6자회담을 재개하자고 설득하였고 리는 경청하고 협의여지를 보였다. 이후 남북과 미북이 번갈아가며 협상을 벌여 사전조치를 설득하여 결국 2.29 합의가 이룩 되었는데 그 최초 협상이 리 외무상과 있었다.
이번 강 장관의 남북 대화 제안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정부 출범 후 첫 '조우'라는 상징성에 주목했다. 다만 북한 도발 중단 촉구가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많았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북한이 강 장관의 대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긴장 고조국면에서 남북의 입장을 전한 '3분 장관급' 회담으로 볼 수 있지 않겠나"고 말했다. 하지만 외교부 2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강 장관이 북측의 호응을 촉구한 것은 의미가 있다. 다만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을 멈추고 비핵화에 나오라고 엄중히 말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강 장관과 ARF관련 아세안 회의가 진행되는 8일 오전까지 리 외무상과 마주칠 기회가 2~3차례 남았다. 7일 오후 열리는 ARF외교장관 회담에서 남북 외교 수장은 같은 회의실에서 4시간가량 함께 머물렀다. 8일 오전 아세안창설 50주년 기념행사에도 두 장관은 함께 초청을 받았다. 자연스러운 계기에 두 장관은 다시 악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 외무상이 이미 강 장관의 대화 제안에 '거절' 입장을 명확히 밝혔기에 우리가 북측에 다시 손을 내밀긴 어려운 상황이다. 자칫 북한에 매달리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고 대북정책에 있어 긴밀히 공조하고 있는 미국 등 우방국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외교부 소식통은 "장관이 또 한 번 대화를 제안했다 거절당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고 밝혔다.
[마닐라 = 박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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