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살얼음을 걷는 국제정세와 오락가락한 한반도 상황이 겹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대 치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을 먼저 성공시킬 수 있었던 기회도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 직후부터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을 본격 추진했다. 남북 고위급회담과 적십자회담 등 남북 해빙무드가 고조됐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플루토늄 생산량이 신고 내역과 다르고 핵폐기물처리장이 의심스럽다며 영변 핵시설 두 곳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선언이라는 강수를 들고나왔다. 이어 ‘서울 불바다’ 발언까지 하면서 오히려 북한 핵 위기에 따른 제2의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마저 대두됐다. 미국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 추진설도 나돌며 한반도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런 가운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대북특사로 방북해 김 주석과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제1차 북핵위기는 일단락됐다. 이 과정에서 김 주석은 김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주선해줄 것을 카터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남북정상회담 재개가 급물살을 탔다.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김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 주석과 만난다는 상세계획까지 확정됐다.
그러나 정상회담 불과 2주전인 7월 8일 김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결국 남북정상회담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남북관계는 냉각기로 돌변했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 미국대표단 단장을 제네바의 북측 대표부에 보내 조문한 반면 김 전 대통령은 국내 김일성 참배 비난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이후 남북관계는 냉·온탕을 오가며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일보의 전진도 이뤄내지 못했다.
정부는 1995년 북측에 쌀 15만t 규모의 식량을 지원했으나 이듬해 9월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했다. 1997년에는 황장엽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해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북측 전쟁준비상황을 설명해 남북이 처해있는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다.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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