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재창업에 나선 벤처업체 대표 A씨는 재기에 나선지 벌써 6년째지만 여전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스타트업에 대한 정부의 거창한 지원 약속을 믿었지만 역시 장밋빛 허상에 불과했다.
국내 유명 공대 석사, 창업대회 수상 등 한때 스타벤처인으로 꼽히기도 했던 A 대표는 "스타트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늘었지만 지원받는 기업 숫자 늘리기에 치중해, 정작 실속은 없는 지원제도가 많았다"면서 "민간 자금도 단기에 고수익을 요구해 유치하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간신히 따낸 금융지원도 1년 단위 단기 대출이 대부분이라 연구•개발(R&D)과 제품생산과 양산화까지 긴 안목으로 진행할 수 없다.
그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 1년 내내 서류 작업에 매달리다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평가지표를 맞추는데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정부 지원이 잠재력 있는 기업을 선별해 지원하기보다 실적을 내기 위한 '나눠먹기식' 지원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겉모습만 번지르한 채 나라 예산도, 기업도, 기술도, 창업 열정도 모두 곪아가는 B급 국가 바이러스의 생생한 현장이다.
◆ ‘스타 벤처’ 못내놓는 창업 지원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걸면서 창업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체질개선 없이 몸집만 커진 전형적인 ‘비만아’ 양산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단기 실적쌓기에 내몰린 정부는 선택과 집중 없이 몰리는 돈을 시장에 뿌리기에 바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반강제적으로 내몰린 청년층의 ‘스펙용’ 창업 열풍이 맞물리며 전형적인 ‘고비용·저효율’ 창업구조를 낳았다.
매일경제신문이 대학 알리미의 각 대학별 창업 관련 공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대학 창업기업 한 곳당 평균 지원 금액은 4472만원에 불과하다. 이들의 고용창출능력은 1명도 채 되지 않는 평균 0.8명에 그쳤다. 정책자금 지원을 위한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한 벤처기업 대표는 “우수 창업을 고를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현금을 살포하는 식의 자금지원이 이뤄지고 있다”면서 “오히려 진짜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이 예산을 못 받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경쟁력도 높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매년 2조원이 넘는 예산을 벤처에 쏟아붓고 있지만 뚜렷한 스타 벤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1000억 벤처(매출액 1000억원을 넘는 벤처기업)’에 지난해 기준 474개사가 이름을 올렸지만, 이 가운데 2010년 이후 창업 기업은 13곳에 불과하다.
실속없는 지원제도와 행정편의주의가 낳은 참사라는게 업계의 중론이다. 그나마 정부가 내놓은 창업자 연대보증 폐지, 기술 금융 확대 등 창업 대책도 현장 체감도는 낮다. 고영하 한국엔젤투자협회장은 “은행 창구에선 창업자의 기술을 평가하는 대신 창업자에게 담보와 보증을 요구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듯 기업가정신을 보여주는 지표도 여전히 주요국 기준에서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세계기업가정신발전기구(GEDI)가 최근 발표한 ‘2016 글로벌기업가정신지수(GEI)’에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만 가운데 중하위권인 22위로 처져있다.
오히려 한국보다 오히려 1년 늦은 2014년 창업에 시동을 건 중국은 규모와 속도에서 벌써부터 한국을 성큼 앞서가는 모양새다. 리커창 총리 취임 직후인 2014년‘대중창업 만인혁신(大衆創業·萬人創新)’ 구호를 높인 중국 정부는 무려 600억 위안(약 10조5000억원)을 내놓는 ‘통 큰’ 지원으로 1위안(약 165원)만 있어도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그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최소 3만위안(약 500만원)~최대 500만위안(약 8억2875만원)이라는 등록자본금 규정과 현금출자 비중 최소 30%라는 문턱 조항을 단숨에 삭제했다. 그렇다보니 최근 들어 샤오미, DJI 등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를 넘는 벤처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미국에 이어 2위 규모다.
‘벤처 1세대’인 이민화 카이스트 초빙교수는 “한국에선 창업 성공에 대한 보상은 작고, 페널티는 무한한 구조”라며 “정부지원도 중요하지만, ‘투자→창업→성장→자금회수→재투자·재창업’으로 이어지는 창업 생태계 선순환을 마련하는게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 ‘장롱특허’만 양산하는 정부 R&D 지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2014년 기준 4.3%로 세계 1위다. 심지어 이스라엘(4.1%)이나 미국(2.7%)보다도 높다. 이 가운데 공공 R&D 예산은 2000년 3조8000억원에서 올해 19조1000억원으로 6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R&D 지원에 대한 전문성이나 안목없이 현금살포식, 나눠주기식 예산지원에 집중하다보니 정책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소액 예산 지원만 늘어나고 있다. 2013년 기준 5000만원 미만 과제건수는 31.8%에 달한다. ‘선택과 집중’ 없이 R&D과제만 늘다보니 상위 7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 1인당 과제만 평균 6건, 최대 34건을 맡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보다는 서류작업에만 파묻힌 연구원들이 제대로 된 연구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김경수 더민주 의원이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연구원 280명을 대상으로 지난 6~12일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정부 R&D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응답자 66.8%(187명)가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간섭’을 꼽았다. 이와 함께 ‘R&D 컨트롤타워 부재’ ‘과제 기획부터 선정, 평가 과정 불투명성’을 꼽은 의견이 10.4%(29명)로 같았다.
정부 R&D가 질적 개선없이 몸집만 불리다보니 정작 연구에 쓰이는 예산보다 관리비 지출만 늘고 있다.
그렇다보니 정부 R&D 사업의 성과물의 대다수는 실효성 없는 ‘장롱특허’에 머물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공공연구기관의 기술보유건수는 2014년말 기준 27만건을 넘어섰지만, 이 가운데 민간에 사업을 위해 기술이전된 건수는 8만5000건에 불과했다. 21만건은 사장된 셈이다. 특히 정부 R&D예산의 65%가 집중되는 대학·연구소의 기술 사업화 비율은 4.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기술경쟁력 약화는 잠재성장률 하락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잠재성장률과 생산요소별 기여도를 분석한 결과 2001~2005년간 평균 4.7%였던 잠재성장률은 최근 5년간 3.2%까지 추락했다. 1.5%포인트에 달하는 성장률 추락 가운데 1%포인트가 기술경쟁력 추락 때문이라는 것.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은 “오히려 공공 R&D 투자가 민간 R&D를 저해하는 ‘구축효과’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공공 R&D의 방향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 사업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 조시영 기자 / 고재만 기자 / 이상덕 기자 / 전정홍 기자 / 정의현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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