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번호로 1200번을 받았는데 탑승할 때 이름을 불러서 답하지 않으면 그 다음 순번으로 넘어간다고 하네요. 공항에서 또 노숙하라는 말로 들리네요.”
25일 오전 10시30분 제주공항 3층. 1번 게이트 앞에 있는 티웨이·이스타·제주에어·진에어 등 저가항공사 발권 부스에는 1만명 이상(공항공사 집계 기준)의 승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섰다.
이처럼 장사진을 이룬 까닭은 현장에서 줄을 서야 대기표를 받을 수 있는데다 일부 항공사는 탑승시 호명해서 승객들이 없으면 그 다음번 대기표를 받은 승객으로 순번을 넘기는 이른바 ‘묻지마 대기 시스템’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주말을 맞아 휴가를 온 최건영씨(32세)는 불만을 토로했다. 최씨는 “진에어측에서 24일 오전에 문자로 ‘결항이 됐고 대기 발행이 안되니 공항으로 오지말라’고 문자를 해서 숙소에 머물렀다”면서 “하지만 전화도 없고 받지도 않아 이상해 공항에 가봤더니 공지와 다르게 선착순 대기발행을 해서 깜짝 놀랐다”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최씨는 가까스로 400번대 대기번호를 부여 받았지만 이날 공항 운영이 재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줄을 서야 했다.
다른 저가항공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이날 새벽부터 대기번호를 발부한 티웨이 발권 부스는 유독 심했다. 23일부터 줄을 섰다는 승객 중 일부는 대기번호를 발부할 당시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른 사람들이 앞에 길게 줄을 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 티웨이측은 대기번호를 발부한 뒤 탑승할 때는 문자로 안내하겠다고 승객들에게 공지를 했지만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제주항공 부스도 만원을 이룬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기번호를 받은 50대 김모씨는 “탑승 우선권이 대기번호를 받은 승객보다 당일 출발 예약을 한 승객들에게 먼저 있다는 말을 듣고 혹시 몰라 27일 항공권도 또 끊었다”면서 “돈이 이중으로 들어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날 제주공항은 ▲공지와는 다른 현장 대응 ▲결항 항공편 순이 아닌 선착순 발권 ▲무기한 대기 요구 ▲콜센터 연락 두절 ▲ 향후 일정 무계획 등 저가항공사의 허술한 대기 시스템 탓에 홍역을 치뤄야 했다.
일부 승객들은 특별기 증편 여부를 묻기도 했다. 60대 박모씨는 “대형항공사들은 오늘 특별기를 띄운다고 뉴스에 나오던데 왜 여기는 특별기 증편 여부를 발표하지 않냐”고 직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공항 곳곳에는 아예 채념한채 자리에 누워 있는 승객들이 많았다. 특히 미취학 아동이나 65세 이상 고령층, 장애인을 동반한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제주도와 공항측에서 모포나 귤 빵 등을 꾸준히 나눠주고 있었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 만큼 큰 고통은 없었다. 공항 화장실 곳곳에서는 머리를 감거나 세수 양치를 하는 승객들로 가득찼다.
이에 비해 대형항공사 발권 부스에는 승객 문의가 있었지만 비교적 한산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발권 부스가 비교적 한산한 까닭은 예약 순서에 따라 남는 좌석을 자동으로 배치해 알려주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어서다. 예를 들어 승객인 A씨가 탑승할 비행기가 결항이 됐다면, 예약 담당 부서가 A씨가 예약한 시간에 따라 정기편 잔여좌석, 임시편 좌석 순으로 일괄적으로 배치해 문자로 안내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측은 결항 승객들에게 대기 번호를 문자로 안내하고 탑승시 3시간 전에 문자로 공지했다. 현장에서 만난 대한항공 직원은 “현장에서 발권하지는 않는다”면서 “시스템에 따라 언제 탑승할지 3시간 전에 공지를 하니 3시간 범위 숙소에 있으면 된다”고 승객들에게 안내했다.
반면 저가항공사들은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공항 당국 운항 계획에 따라 조금 일찍 나오라는 안내 문자를 보내는 항공사가 있기는 했지만, 자동 예약변경 시스템까지 구축된 경우는 없다. 이 때문에 저가 항공사는 평소에도 운항 편이 취소된 경우 에는 카운터에 줄을 서거나 번호표를 뽑아서 그 순서대로 임시편 예약을 잡아야 했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저가 항공의 경우 항공편 절대 규모가 크지 않고, 결항 사태에 대한 노하우도 풍부하지 않아 대형 항공사에 비해 체계적인 시스템은 도입되어 있지 않다”면서 “이같은 상황이 항공권 가격에 모두 녹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가항공사 이용객 최건영씨는 “대형항공사보다 2~3만원 저렴한 항공권을 끊었을 뿐인데, 이런 수준 이하 대접과 불안감을 경험해야만 한다는 게 억울하다”면서 “저가항공이 가격은 저렴해 좋은데 위기시에 이런 서비스를 받을지 미처 몰랐다”고 덧붙였다. 이번 제주 공항 마비로 드러난 저가항공의 민낯인 셈이다.
[제주 =이상덕 기자 / 김정환 기자 / 이승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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