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잘 살고 있는 걸까 걱정될 때 가는 곳

남해 가을 여행
다랭이마을의 옥토버페스트
느긋한 게스트하우스에 앉아보다

남해에 다녀왔다. 늦가을이었지만 봄 같은 날씨 속에서 여행했다. 독일마을에서는 옥토버페스트가 열렸는데 신나는 축제였다. 다랭이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은 여전했고, 보리암 일출은 가슴이 저밀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이가 든다는 건, 아니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시시한 일이 아닐까?’ 남해 독일마을 야외 천막 속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남해 독일마을은 파독 근로자와 그 가족들 가운데 한국으로 오고 싶었던 이들이 2001년 돌아와 만든 마을이다. 독일마을이라는 이름답게 집들은 독일식 건축방식으로 지어졌다. 마을이 생겼을 당시 가본 적이 있는데, 마을 집들 대부분이 독일식 펜션과 민박 등을 운영하며 햄과 소시지, 빵, 독일 맥주 등을 팔고 있었다. 지자체에서도 파독 근로자 출신 및 그 가족 등이 여기 거주하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것을 조건으로 각종 지원을 해주고 있다.

독일마을에서 만난 신나는 축제

독일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주황색 지붕을 이고 있는 하얀색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 이국적인 풍경에 와! 하고 감탄을 했다. 마을 아래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독일에서 해마다 10월에 열린다는 옥토버페스트가 이곳 독일마을에서도 열리는데, 남해를 찾은 날 때마침 축제가 열리길래 왔다. 마을에는 차들이 줄을 이었다.

옥토버 페스트의 신나는 축제 현장, 옥토버 페스트 축제현장

마을 이곳저곳에서 울려 나오는 커다란 소리와 여기저기 서 있는 커다란 천막과 기념품 가게들, 축제장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인파 때문에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주눅이 들고 말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여행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타고난 성격을 어떡할 수 없는 일.
그래도 호기심이라는 건 있어 음악이 나오는 곳으로 따라가 보았는데, 오후 네 시 무렵이었지만 손에 플라스틱 맥주잔을 든 사람들이 커다란 천막 아래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천막 나이트 클럽이라고나 할까. 1980~90년대의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통’ 독일 맥주라고 안내 문구를 크게 써 붙여 놓은 가게에서 콜라 한 잔(운전을 해야 하니까) 홀짝이며 열정적인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와 함께 오질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고 춤을 추라고 부추겼다면 상당히 난처해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국적인 풍경의 독일마을, 남해 독일마을의 집들은 독일에서 가져 온 자재로 지었다.

콜라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천막 나이트’에 있었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즐거움이란 이처럼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춤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각자의 걱정거리와 고민 같은 게 있겠지만, 여기는 음악이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축제장이니까, 칵테일 셰이커처럼 몸을 신나게 흔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걱정거리 같은 건 셰이커에 담긴 얼음처럼 알 수 없는 형체로 부서지거나 녹아버린다.
축제장을 나오니 다시 마을 전경이 펼쳐졌다. 주황색 지붕 위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아, 나도 언젠가는 이런 멋진 집에서 살고 싶다’.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내 미래를 잠깐 상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당의 풀도 뽑아야 하고, 지붕도 시시때때로 고쳐야 하고(언젠가 양평으로 전원주택을 사서 이사 간 선배가 “통화가 안 되면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줄 알아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튼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 엄청나게 많을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니라 훗날 제주도에 가서 살게 되더라도, 이마트 옆 바다가 보이는 오피스텔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지내고 싶다. 역시 나이가 든다는 건, 아니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시시한 일인 것 같다. 떠들썩한 축제에서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 앞에서도 늘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좌로부터)바닷가 비탈을 일구어 만든 다랭이논, 다랭이마을 내려 가는 길, 바다 앞에 자리한 다랭이마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다랭이마을
다랭이마을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기모가 든 짚업 후디를 벗고 반소매 차림으로 다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해무 때문인지 초록보다는 조금 더 옅어 보였다. 바다 건너편 산자락은 연둣빛으로 따스했다. 여긴 가을이 오려면 아직 좀 기다려야겠구나. 느리게 차를 운전해 가다 마음에 드는 바다 빛을 만나면 차를 세우고 내려 셔터를 눌렀다. 500분의 1초, 조리개 8.0에 바다의 푸르고 영롱한 일렁임이 갇히곤 했다.
남해 남면에는 다랭이논으로 유명한 마을이 있다.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3위에 오른 곳이다. 남해는 섬이지만 산비탈이 많은 지형 탓에 사람들이 산 경사면을 개간해 계단식 논을 일구고 살았다. 산비탈 급경사에 층층이 들어선 밭이 120층이라고 한다. 다랭이마을에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니까 이 풍경을 만드는 데 꼬박 400년이 걸린 것이다. 필리핀 바나우에와 발리에서 계단식 논을 본 적이 있다. 다랭이마을이 그곳에 비할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풍경 앞에 서 있노라면 새삼 인간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평산2리 마을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 해 저물 무렵 평산2리마을을 산책했다.

다랭이마을은 이십 년 전 여행기자를 막 시작한 무렵 찾았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전이었다. 이장님께 소개받은 마을의 민박집에서 만 원을 내고 하루를 묵었고, 아침 일찍 소여물을 끓이는 할머니를 촬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시사철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지금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 반 되를 얻어 와 민박집에서 마셨다.
다랭이마을은 생각보다 사람이 적다. 옥토버페스트 중이라 사람들이 축제장으로 다 몰려갔나 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마을을 걸었는데, 풍경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세련되게 정비된 느낌이지만, 이런 풍경도 나쁘지 않다. 정자가 서 있는 바닷가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해 질 무렵이 되어서인가 등 뒤로 부는 바람이 서늘했다. 다랭이마을. 앞으로 또 올 일이 있을까. 이번 방문으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답을 알 수 있겠지.

평산마을에서 묵은 하룻밤

상주은모래비치

상주해수욕장이었다가, 지금은 상주은모래비치로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찾는 이 없는 늦가을 해변은 적요하다. 저녁이 오고 있고 부드럽고 흰 모래밭에는 푸른 파도만이 한가롭게 드나든다. 상주 해변을 나와 평산2리 마을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 ‘생각의계절’이라는 곳이다. 바다가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을 칠한 낮은 슬레이트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편에 하얀색 2층 건물이 우두커니 서 있다. 어느 편집자가 차렸는데, 서울 생활에 힘들어하다가 어머니 고향 남해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하기로 결심하고 내려온 곳이다.
주인은 방을 청소하고 틈틈이 걸려 오는 전화로 예약을 받고 가끔 카페에서 여행자들과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손님들에게 횟집을 소개해 주거나 드라이브 코스를 안내해 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저녁이 된다. 노을이 왔다 가고 그 자리에 별이 뜬다. 저녁을 챙겨 먹고 청소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게 전부다.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며 사는 삶은 어떨까. 바다가 보이는 도심 속 오피스텔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다.

게스트하우스 생각의계절

생각의계절 건너편에 노을을 보기 좋은 곳이 있다. 주인이 일러준 곳이다. “저녁이면 붉은 노을이 섬을 집어삼킬 듯 덮쳐와요.” 하늘 한편이 물감을 뿌린 듯 붉게 물들고 있다. 서둘러 언덕에 오르니 시야가 확 트이며 불현듯 바다가 나타난다. 바다 건너편으로 여수가 보인다. 컨테이너선이 불을 밝히고 느리게 지나간다. 바다로 나갔던 어선들은 포구로 돌아가느라 바쁘다.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이토록 평화롭고 안온하다. 생활에서 한 걸음 비켜선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닐는지.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생각의 계절 주인에게 이런 생활이 지겹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런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어요. 지금보다 더 외로워도, 더 고독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니, 더 좋을지도 모르죠.” 문득 버트런드 러셀이 쓴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한 해 한 해를 맞을 때마다 나의 삶은 점점 즐거워질 것이다.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中)

인증샷을 찍기 위해 줄을 선 여행객들, 보리암 너머 바다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보리암 일출, 해수관음상 앞에서
바다를 등지고 산을 올려다보면 꼭대기 바로 아래에 건물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산은 금산이고 건물은 보리암이다. 금산은 이성계가 조선을 열고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약속했던 산이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조선을 열었다. 애초에 ‘보광普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성계가 비단 대신 비단 ‘금錦’ 자를 내리면서 금산으로 바뀐다. 비단으로 덮는 대신 이름을 바꾼 것이다. 금산 정상 턱밑에 자리한 보리암은 국내 3대 기도처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좋다.
새벽 다섯 시 반, 보리암을 가기 위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제2주차장은 차들로 빼곡하다.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일 것이다. 국내 3대 관음 기도처 때문이기도 할테고.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꼭 하나는 이루어준다고 한다. 사람들이 제법 많다. 하늘 한편이 어느새 밝다. 곧 해가 뜰 것 같다. 걸음을 더 빨리 재촉한다. 가면서 ‘부처님께 뭘 빌어볼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딱히 빌고 싶은 게 없다. 다만 해 뜨는 시간에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리암 해수관음상

보리암에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바다가 보이는 요사채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이렇고 있는 것 같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계속 줄을 선다. 줄을 서서 찍는 인증샷이라… 아마도 내 인생에서 인증샷을 찍는 날이 올까? 아마, 절대 없을 테지.
이런 저런 생각들과 함께 해 뜨는 걸 보고 해수관음상 앞으로 왔다. 바다를 향해 선 관음상 앞에서 삼배를 드렸다. 절을 할 때마다 뭔가를 빌지는 않았는데, 삼배를 마칠 때쯤 ‘바닷속 멸치 떼가 돌아다니는 소리는 쌀알이 구르는 소리 같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남해에 온 보람이 있어, 오길 잘했어. 내려가서는 아침을 먹고 앵강마켓에서 커피를 마셔야겠다. 앵강마켓 옆은 백년유자라는 가게인데 이곳 유자원액이 좋다. 잊지 말고 사 가야지. 참, 내년 옥토버페스트에는 누군가와 함께 오는 게 좋겠다. 나이가 든다는 건, 산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시시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행 정보

남해를 주제로 한 다양한 상품을 파는 스토어 비,  물건방조어부림의 울창한 숲

기념품 & 맛집 남해 여행 기념품은 남해를 주제로 한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는 ‘스토어 비’에서 찾아보자. 물회가 먹고 싶다면 ‘남해전복물회’를 추천한다.
방조어부림 독일마을에서 바다 쪽으로 바라보면 바닷가 앞에 초승달 모양으로 울창한 숲, ‘방조어부림’을 만난다. 이름 그대로 ‘고기를 부르는 숲’이다. 세찬 바닷바람을 막고 숲 그늘로 물고기를 유인하는 역할을 한다. 천연기념물 1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말채나무 가마귀밥여름나무, 누리장나무, 화살나무 등 귀한 나무들이 자란다.

(위)아침빛으로 물드는 금산 (아래)요즘 가장 떠오르는 여행지인 남해보물섬전망대

금산 보리암과 금산산장 보리암은 승용차로 제2주차장까지 갈 수 있는데 보리암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린다. 보리암에서 맞는 일출도 좋지만, 10분 정도만 더 발품을 팔면 금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곳 봉수대에서 맞는 일출이 더 드라마틱하다. 보리암 가기 전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르면 암봉 아래 위태롭게 자리 잡은 ‘금산산장’이 있다. 컵라면 같은 걸 판다.
남해보물섬전망대 스릴 만점의 스카이워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투명 강화 유리를 공중에 설치한 스카이워크가 아찔하다. 하네스를 착용하고 스카이워크에 오르면 유리바닥 아래로 절벽과 바다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인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4호(24.11.1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