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달이 되어 준 홋카이도의 대자연
심플한 여행을 위한 자전거 캠핑
심플한 여행을 위한 자전거 캠핑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나만의 교통수단을 이용해 기차나 버스가 갈 수 없는 곳을 탐험한다는 점이다. 여느 교통수단에 비해 시간은 다소 더디게 흐르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홋카이도의 대자연을 보기 위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단순한 여행을 원해서 자전거를 탔다
“왜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나요?”“왜 홋카이도를 택했나요?”
자전거를 타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처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뭔가 주저리주저리 여행의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자전거를 타는 시간이 점차 늘어날수록 머릿속 설명이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페달을 돌리면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간단명료한 메커니즘이 자연스레 몸과 마음을 감쌌기 때문이다. 심플한 여행을 하고 싶었다. 홋카이도를 택한 것은 사실 만만하게 봤다는 것이 솔직한 이유다. 그러나 홋카이도의 면적(8만 3,424㎢)이 대한민국(10만 188㎢)의 약 83%에 달할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인지했다. 어쩌면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3주간의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을 마친 상황에서 돌이켜보면, 가장 힘들고 막막했던 순간은 단연코 여행의 시작점이었다. 더욱이 자전거를 포장해 비행기에 싣고 해외로 이동하는 건 고역 중에 고역이다. 유튜브에서 배운 자전거 포장법은 눈으로 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자전거 앞 바퀴와 페달, 안장, 핸들바를 분리해 포장박스에 넣어 보니 그의 프로다운 손놀림에 사기 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유튜버의 프로다움은 결코 흉내내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생애 처음 자전거 포장을 완수했으니 그 보람과 뿌듯함은 말해 무엇하리.
박스에 포장된 자전거와 짐을 넣은 자전거 가방, 왓카나이로 향하는 기내에서 내려다본 홋카이도의 대자연
인천공항에서 삿포로로, 다시 홋카이도 최북단 지역으로 가는 두 번의 비행기를 타고서 마침내 왓카나이공항에 도착했다. 왓카나이는 일본 본토보다 러시아와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 소도시다. 러시아와 불과 50~60km 떨어져 있을 정도로 지척이다.대략적인 자전거 여행의 루트는 다음과 같다. 일단 왓카나이공항에서 북쪽으로 약 30km가량 떨어진 일본의 최북단 지점인 소야곶(Cape Soya)을 첫 목적지로 여정을 시작한다. 홋카이도 북부에서 남부까지, 왓카나이에서 하코다테까지 총 800km 거리를 자전거로 달린순풍을 맞으며 시작된 여정 다. 이를 실행하려면 포장된 자전거를 꺼내 조립부터 마쳐야 한다. 고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순풍을 맞으며 시작된 여정
왓카나이의 환영식은 실로 대단했다. 공항 주차장 한편에서 자전거를 조립하는 동안 온몸에 불어 닥친 차디찬 바람의 강도가 심상치 않았던 것.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가깝다는 점이 확 와닿는 순간이었다. ‘첫날부터 이 거센 바람을 뚫고 자전거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자전거 조립은 오히려 식은 죽 먹기처럼 느껴졌다. 자전거 앞뒤 바퀴에 가방을 고정하고 짐 정리까지 마치고 나자 짐을 실은 자전거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모든 짐을 버리고 싶었다.소야만 해안을 따라 라이딩을 즐겼다.
미세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청명한 하늘 아래 청정자연의 내음이 마구 풍겨나는 공항 주변 풍경과 달리 머릿속은 뿌옇게 변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어서 빨리 페달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바람의 방향이 ‘순풍’이라는 것. 고맙게도 페달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그 바람결에 나를 에워싼 부정도 씻겨나가길 간절히 바라면서 페달을 밟았다.공항을 벗어나자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다. 사람 한 명 다니지 않는 인도 위를 장악한 채 페달을 밟는다. 두 다리는 계속해서 쉼 없이 물레방아 돌 듯 돌아가고 있는데 어째 비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인적은 제쳐두고 차량도 드문 도로, 변방의 행성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지친 기색을 덮어버린다.
피곤을 느낄 새가 없으니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영 서지 않는다. 그렇게 한 10여km를 달려온 지점에서 드디어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형체다. 반대편 인도에서 걷고 있는 초등학생 서너 명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비현실에서 깨어났다. 그제서야 다리와 팔, 허리 등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비현실적인 의식에 빠져드는 게 낫겠다 싶다.
(좌)첫 번째 목적지인 소야곶으로 향해본다. (우)반대편 인도에서 걷고 있는 일본 초등학생들과의 반가운 만남
소야곶은 일본 홋카이도는 물론 일본 전체의 최북단 지점이다. 최북단 기념비를 중심으로 등대와 전망대, 동상, 공원 등이 자리한다. 소야곶은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기도 하다. 1943년 10월 11일 80명을 태운 채 침몰한 미국 잠수함을 추모하는 기념비와 함께,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007편 사고로 사망한 269명을 추모하기 위한 기도의 탑도 위치해 있다.‘오늘’만 생각한다, 그렇게 온천에 닿았다
간밤에 이슬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확인하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잘못이었을까. 새벽녘 텐트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이 끝도 없이 내릴 줄은 미처 몰랐다. 빗방울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여러 번 반복하며 그에 따라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다.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 첫날밤의 캠핑, 그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고 예상치 못한 빗소리에 호되게 당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움텄고, 앞으로의 텐트 생활에 기대가 샘솟았다.일본 전체의 최북단 지점에 있는 소야곶 기념비(위)와 소야곶에서 맞이한 자전거 여행 첫 일몰의 순간
캠핑의 긍정적인 영향력은 하나 더 있다. 평소 나라는 인간은 ‘새벽형 인간’이 절대 아닌데, 일출과 동시에 눈을 뜨고 텐트 정리까지 후다닥 마친 후 자전거 페달을 밟을 준비 태세를 갖춘다는 것. 그래 봤자 오전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비가 온 뒤의 소야곶의 오전 풍경은 검은 구름이 잔뜩 드리워진 데다 저 바다 깊숙한 곳에서 귀신이 금방이라도 솟아날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만연하다. 미련 없이 쿨하게 작별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그렇게 여정 2일 차를 맞이했다.어제 왓카나이공항에서 소야곶까지 이동했던 238번 국도를 따라 반대방향으로 다시 페달을 밟는다. 최북단에서 출발한 2일 차가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의 최종목적지인 하코다테까지 닿는다. 계획은 그러한데 현실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위로부터)노샤푸곶 등대, 바다 조망이 가능한 온천 토우무 전경. 온천 인근 풀 숲에 텐트를 쳤다(마지막 사진).
이번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 자신에게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 여정 가운데 최종목적지까지의 거리나 날짜 등을 절대 미리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말자는 것. 오직 ‘오늘’만 생각하고 오늘의 가능한 이동거리를 계산하고 계획을 세울 것. 약 800km에 달하는 총 이동거리에만 신경 쓰다 보면 여행이 아니라 고역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왓카나이 도심까지 약 15km를 한달음에 달렸다. 카페와 음식점, 게다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활기찬 발걸음까지, 사람 사는 동네에 왔다는 기쁨은 도심에서의 시간을 정처 없이 흐르게 했다.그럼에도 다시 이동해야 한다. 역시나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황무지다. 왓카나이에서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일본의 최동단 노샤푸곶에 닿은 뒤 그곳에서 또 얼마간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다시 힘겹게 페달을 밟았다.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온천 토우무’까지의 여정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목적지 장소가 온천이 아니었더라면 도로 중간쯤에서 냅다 텐트를 쳤을 것이다.
(위로부터)바다 조망이 가능한 온천 토우무 전경 (하단 사진)온천 토우무 주변에서 만난 에조사슴 무리들
하루 동안 70km를 달렸다 쉬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면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자전거를 계속 타게 만드는 건 육체의 힘뿐만이 아니다. 지금 당장 자전거를 타야 하는 이유가 끊이지 않고 등장해야 하는데, 뭐가 되든 상관없다. 45km를 달린 2일 차, 여정 초반이라 몸이 자전거에 적응하느라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럼에도 내일의 이동거리와 캠핑 및 식사 장소 등을 물색하는 동안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보면 자전거는 운명인가 싶다. 온천 토우무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바라다본 일몰의 신비하고 힘찬 기운이 내일의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만든 동력이 되어준다.
지난밤은 빗소리 대신 사슴의 울음소리 때문에 또 잠을 뒤척여야 했다. 온천 인근 풀 숲에 텐트를 칠 때는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사슴 똥 천지다. 기상과 동시에 텐트 주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들과 모닝인사를 나눴다. 녀석의 구역을 무단 침범한 죄를 받아 마땅하다.
홋카이도에는 꽃사슴의 아종인 ‘에조사슴’이 섬 전역에서 서식한다. 수컷만 나는 뿔은 다른 꽃사슴 아종에 비해 크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그 뿔을 실제로 보면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한데,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오묘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홋카이도에서 3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며 길에서 사람보다 사슴을 더 많이 만난 것 같다. 사슴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자전거를 타게 만든 또 하나의 이유였다.
서부해안도로에 세워진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오로론 새의 동상
한데 사슴이고 뭐고 3일 차에 이동거리 50km를 넘기고 나자, 어떠한 이유도 먹혀 들지 않았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는, 기존에 맞닥뜨린 황무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106번 국도를 따라 나 있는 서부 해안도로는 그야말로 사막과도 같다. 해안도로다 보니 바다를 끼고 라이딩을 하는 즐거움은 좋으나 바닷바람에 자전거가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내 옆으로 대형 트럭이 지나가고 나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자전거가 뒤집어질 것 같은 소용돌이가 친다.우여곡절 끝에 3일 차에 이동거리 70km를 찍었다. ‘Welcome to Teshio(데시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간판을 보는 순간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 3일 차에 처음으로 노천이 아닌 홋카이도 정부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에 텐트를 친다. 일몰 직후 잠이 들어 일출과 동시에 눈을 떴다. 3일 만에 숙면을 취했다. 하루 동안 70km를 달린 보람을 숙면으로 보상받았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는, 기존에 맞닥뜨린 황무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106번 국도를 따라 나 있는 서부 해안도로는 그야말로 사막과도 같다. 해안도로다 보니 바다를 끼고 라이딩을 하는 즐거움은 좋으나 바닷바람에 자전거가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내 옆으로 대형 트럭이 지나가고 나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자전거가 뒤집어질 것 같은 소용돌이가 친다.”
하보로 마을 주택가에 텐트를 쳤다.
한밤중 산타클로스가 나타났다 데시오 마을 이후부터는 10~20km 구간마다 마을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어제와 같은 사막 라이딩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마을마다 편의점이나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으로 비상용 음식을 모조리 해치웠다. 조금이나마 짐의 무게를 줄이고 싶은 마음에서. 4일 차의 이동거리는 총 65km다. 데시오 마을에서 출발해 엔베쓰, 쇼산베쓰 두 개의 마을을 지나 세 번째 마을인 하보로까지 간다. 이미 하루 70km를 찍어봤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지만 70km 이상은 자신 없었다. 무엇보다 하보로 마을 선셋 비치에 자리한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싶었다.
매일, 매 순간이 새로운 기록이다. 4일 만에 처음으로 오르막을 오른다. 오르막길의 개수는 한둘이 아니다. 어제 70km를 찍은 건 도로가 평지였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분명히 아침에 확인한 지도상의 고도는 평지가 대부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이 ‘전부’는 아니니 잘못된 정보는 아닐지도. 더 이상의 사막 라이딩이 없다고 좋아했건만 등산 라이딩이 등장할 줄 누가 알았을까.
오르막을 끝도 없이 올랐다.
첫날 이후로 또다시 모든 짐을 당장 버리고 싶었다. 묵묵히 오르막을 올랐다고 표현하고 싶지만 실상은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입에서 온갖 욕이 다 튀어나왔다. 씩씩거리며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커다란 선물처럼 내리막이 반드시 나타났다. 오르막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세상도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합일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이다.믿었던 정보가 또 한번 다른 결과를 불러왔다. 기대했던 하보로 마을 캠핑장이 문을 닫은 것. 이것만 믿고 달려왔기에 인근 주변 공원이나 다른 장소를 물색하지 않았다. 플랜B가 없었다. 그런데 이미 일몰은 시작된 상황. 울고 싶은 심정이다. 시골마을은 오후 5~6시가 되면 일몰 직후 칠흑 같은 밤이 시작된다. 어둠을 뚫고 마을 어귀를 몇 차례 돌고 나서 주택가 주변 잔디밭을 용케 찾아냈다. 귀뚜라미 소리 위에 텐트를 친다. 오늘밤은 귀뚜라미와 함께다.
하보로 마을 산타클로스로부터 받은 선물
침낭 안에 몸을 넣자마자 스르륵 잠에 들었는데, 텐트를 비추는 환한 조명 빛에 눈을 떴다. 꿈인가 싶었다. 그리곤 이내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깨우는 것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조명 빛. 바로 맞은편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평화로운 자신의 동네에 난데없이 등장한 텐트가 궁금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 그들은 캠핑장이 문을 닫아 하는 수 없이 이곳에 텐트를 쳐야만 했던 내 사정을 듣고서는 오히려 깨워서 미안하다며 재차 사과를 건넸다.자신의 동네는 안전한 곳이라면서 편안하게 잠을 자라며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렇게 그들과 “오야쓰미 나사이(おやすみなさい,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하며 해프닝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한 십여 분 지났을까. 다시 또 조명 빛이 텐트를 비췄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자전거 여행자를 응원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과자와 초콜릿, 음료수 등을 챙겨온 것. 우리는 또다시 “오야쓰미 나사이”를 말하며 헤어졌다. 한밤중 나타난 산타클로스들에 감사를! 자전거를 타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3호(24.11.0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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