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다시 찾다
황룡사지와 분황사 찾아 나서는 새벽
황룡사지와 분황사 찾아 나서는 새벽
경주는 일 년에 서너 번은 찾는다. 찾을 때마다 같은 패턴으로 여행을 하지만 지겹거나 싫증이 나지는 않는다. 경주에 대한 느낌을 말하자면 ‘좋다, 그냥 좋다.’ 텅 빈 황룡사지와 안개 가득한 분황사의 모전탑이 떠오르고 보고 싶어 새벽녘 먼 길을 나설 때도 있다.
걸어서, 걸어서 더 좋은 경주
경주에서는 주로 걷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뒷짐을 지고 때로는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걸어서 저녁 무렵에는 황룡사지를 찾고, 아침이면 대릉원을 찾는다. 황룡사지를 어슬렁거리며 무너진 석탑과 절이 있던 자리와 부처가 앉았던 자리, 무심히 서 있는 당간지주 등을 바라보고 천천히 쓰다듬다 보면 천년 왕국의 비밀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다.
절터는 넓다. 동서 288m, 남북 281m. 이 자리에 구리 3만 근과 황금 1만 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이 있었고 9층 목탑이 있었다.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터에는 불상을 올려놓는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가 있던 황룡사지
광활한 폐사지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그 옛날 거대한 절을 떠받쳤을 돌무더기로 가서는 돌들을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황룡사지 서쪽 끝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 절을 짓는 데 사용됐던 돌들이 오글오글 앉아 있다. 황룡사를 떠받쳤던 커다란 주춧돌도 있고 맷돌도 있다. 세숫대야로 쓰였던 돌도 있다. 어떤 돌은 연꽃을 새겼고 어떤 돌은 부처님 얼굴을 새겼다.그 돌들 앞에 서서 황룡사지에 천천히 깃드는 어둠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러면서 우리네 삶은 곧 저러한 모습으로 외로워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젖기도 하고,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하며 약간은 유치한 다짐 같은 것도 해본다.
경주의 상징 첨성대
아침 산책은 주로 신라대종이 있는 태종로에서 시작한다. 신라대종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을 재현한 종이다. 신라 경덕왕 때 만들기 시작해 혜공왕에 이르러 완성한 이 종은 1,200여 년 동안 서라벌의 아침을 깨웠고, 저녁의 고단함을 위로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종을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 마음을 짐작해 보지만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 종소리를 상상하며 대릉원 방향으로 걷는다.옛사람들의 흔적 사이에서 지금 사람이 산다
경주는 세계 최고의 고분 도시다. 죽은 왕들의 무덤 사이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산책한다. 노서·노동동 고분군을 비롯해 대릉원이며 황오리 고분군, 황남리 고분군, 내물왕릉, 오릉 등 무덤들 사이에 도시가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다. 경주 사람들은 무덤들 사이에서 아침을 맞고 산책을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전혀 기괴하지 않다. 죽음 역시 우리네 무덤덤한 일상의 한 부분이니까.
황룡사지 앞 분황사. 분황사 탑을 돌고 있는 경주 사람들.
대릉원에 들어서서, 달항아리를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의 곡선 사이를 걸어간다. 그러다가 능이 겹치며 만들어 내는 어느 햇빛의 음영 앞에서는 오래 서 있어 본다. 마치 도자기나 조각품을 감상하듯, 조금은 진지한 자세로 말이다. 가끔 새소리가 날아들어 내 발등 위에 떨어지고 시원한 바람이 뜀틀처럼 이마를 짚고 간다. 나는 대릉원의 소나무 숲 사이를 걸으며 스스로가 오래된 경주 사람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대릉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고, 미추왕릉을 지나면 황남대총이 나온다. 대릉원에서도 가장 큰 고분이다.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북쪽보다 남쪽 봉분이 더 크다. 그래서 봉분이 높은 남분은 왕이, 북분에는 왕비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누구의 무덤인지 특정할 수 있는 부장품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동마을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
대릉원에서 나오면 황리단길이다. 경주에서 가장 트렌디한 곳이다.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독립서점 등이 몰려 있다. 저녁 무렵부터 많이 붐빈다. 십오 년 전, 전국의 골목을 취재한다고 돌아다닐 때, 이곳을 찾았다. 경주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었다. 조금 낡은 듯한 골목길은 여유롭고 평화로움이 넘쳐났던 것으로 기억한다.황리단길을 건너면 첨성대고, 첨성대를 지나면 계림이 나오고 곧 월성에 닿는다. 월성은 신라의 궁궐이 있던 자리인데, 이곳에 오르면 대릉원과 황오동 등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눈에 보이는 곳이 신라가 천 년 동안 번성했던 자리다.
(위로부터)걷기 좋은 대릉원 산책길, 최부잣집이 있는 교동마을, 옛것과 새것이 잘 어우러진 황리단길
신라 천 년의 밤을 바라보다나는 날 저물 때 다 되어서 노서· 노동리 고분군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 첨성대를 등지고 계림으로 가는 길, 내가 항상 서 있는 자리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능 뒤로 지는 노을과 황오동 집들의 기와지붕이 어울려 신비로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능의 곡선은 또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다운지. 무덤들이 예쁘다면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해가 능 뒤로 슬금슬금 넘어갈 때쯤이면 능 주변으로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는데, 느긋한 능의 곡선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그려낸다. 게다가 뒤편 선도산의 곡선까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깊고 그윽한 한 장면은 사진 찍는 이의 밝은 눈이 아닌 무지렁이 여행객도 감탄하게 만든다.
대릉원의 봉곳한 고분
고분군을 지나 동궁과 월지에 왔다. 동궁은 태자가 살던 별궁,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이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나는 지금 월지에 비치는 동궁을 바라본다. 밤이 와서 어둠이 짙고 그만큼 별이 밝다. 조명을 받은 동궁의 처마가 환하다. 신라 천 년의 밤은 얼마나 화려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소설가 강석경은 경주에 머무르면서 만든 책 『이 고도를 사랑한다』(난다)에서 “허무를 알면서 우리는 성년이 된다”라고 썼다.
해국길의 좁은 골목
산다는 것조차 허무한 일이다. 삶에는 끝이 있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래를 꼭 쥐고 서 있는 것을 떠올려본다.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있지만 모래는 결국 흘려내려 손을 빠져나가고 만다. 손바닥에 남아있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점점 사라져 가는 그 감촉을 아쉬워하는 것. 이것이 곧 사는 것이 아닐까.문무대왕의 서슬 퍼런 전의가 서린 곳
경주 시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바닷가로 왔다. 경주 동해바다를 가까이서 보는 ‘감포 깍지길’이 있다. 감포항을 중심으로 해안과 마을 등을 잇는 길이다. 그중 해국길은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인 건물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600m 정도로 길지 않지만, 이름처럼 벽마다 그려진 해국(海菊)을 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좌)감포 앞바다 해변에서 말라가는 오징어, (우)감은사 탑의 새벽
비좁은 길바닥에는 거친 시멘트를 발랐다. 골목 양옆으로 작은 집들이 있는데,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설 법한 대문이 달렸고 창문은 도화지만 하다. 골목을 따라가는 벽마다 해국이 그려졌다. 색깔이며 모양이 전부 다르다. 하얀 해국도 있고, 보랏빛을 뽐내는 해국도 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색깔이 바랜 해국도 눈에 띈다.해국길 건너편 감포항에서 북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송대말등대가 있다. 송대말은 ‘소나무가 우거진 대의 끝부분’이라는 뜻. 이름처럼 절벽 끝에 용틀임 하듯 휜 소나무들이 있고, 그 사이로 푸른 동해가 흰 파도를 일으키며 넘실댄다. 송대말등대에서 나와 경주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탑을 보고, 불국사를 보고 돌아오는 코스를 잡으면 된다.
문무대왕릉의 감동 어린 아침 풍경
문무대왕릉은 삼국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묻힌 곳. 일출 여행지로도 유명하다. 문무대왕릉에서 경주 시내로 가는 길에 완벽한 조형미로 ‘신라 탑의 전형’이라 불리는 감은사 탑이 자리한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감은사 탑의 조형미가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아름다움을 알게 될 때 어른이 된단다
불국사 가는 길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단체버스를 타고 수학여행을 왔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어느새 오십 중년이 되었다. 길은 뱀처럼 똬리를 틀며 나아간다. 30여 년 전 풍경이 떠오른다. 희미하고 아련하다. 이제는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때맞춰 어김없이 온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안다.예를 들자면, 천년 세월을 이기고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 봄이면 피는 벚꽃과 상강에 어김없이 내리는 서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 앞에 서면 마음이 괜히 뭉클하고 대견스러워할 수 있다면 눈을 한 번 더 맞추고 쓰다듬어 보려고 한다.
언제 찾아도 좋은 불국사,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다보탑
불국사 불이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오솔길이 시작된다. 숲길 따라 만나는 불국사는 변한 것이 없다.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단체사진을 찍었던 청운교와 백운교도, 친한 친구들과 어깨를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석가탑, 다보탑도 그대로다.다보탑과 석가탑, 두 탑만으로도 책 한 권을 거뜬히 만들 정도로 이야기가 많다. 10원 동전에도 나오는 다보탑은 우리나라 탑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아름답다. 돌을 마치 나무처럼 깎아 만들었다. 사각형의 받침돌 옆으로 계단이 놓여 있고 다시 5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그 위에 팔각형, 다시 꼭대기는 원으로 돼 있다. 사각형에서 팔각형, 다시 원하는 변하는 것은 성불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불교에서 원은 완성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건축 당시의 모습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상 원형을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했다 복원했는데 돌들이 남았다고 한다. 부속품이 남았다는 것은 뭔가 잘못 맞췄다는 것이다.
다보탑에서 바라본 석가탑
반대편의 석가탑은 완벽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4:2:2의 비율이다. 2층과 3층은 크기가 같지만 탑 중간의 동판을 처마처럼 깎아 3층이 더 작아 보이도록 했다. 이런 기법은 비록 돌탑이지만 아름다운 처마의 곡선미를 느끼게 한다. 그 시절 수학여행 때는 불국사든, 석가탑이든, 다보탑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여행을 왔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찾은 이 탑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살다 보면 나이가 하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을 아는 것, 그 앞을 떠나기가 왠지 아쉬워 자꾸만 서성이고 맴돌게 되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나는 다보탑 앞을 한참 동안 서성이다가 석가탑을 오래도록 뱅뱅 맴돈다. 다행이다.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인생과 아름다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 글과 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36호(24.07.02) 기사입니다]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