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바다에서 목적지를 향해 항로를 나아가는 것. 대한민국 연출 사진의 시작을 연 구본창 작가의 일대는 ‘항해’로 비유된다.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사진계와 미술계에 일대 파란을 연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는 전시가 열렸다. 모험을 시작하거나 꿈꾸는 이들을 위한 등대가 되어줄 만한 전시다.
몇 주 전, SNS에서 구본창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게시물을 발견했다. 그 게시물이 누군가의 SNS에서 파도를 타듯 내 SNS까지 넘실거리며 넘어오기까지는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게시물 속 그의 작품과, 수집품들은 보는 이들의 눈길을 한번에 사로잡기 때문이다. 오래됐지만 세월이 멈춘 듯 사진 속의 흐릿한 풍경, 키치한 감성의 디자인 작업물, 날것의 표상 같은 연작 시리즈 등…. 작품은 뉴트로가 트렌드라는 뻔한 감상을 남기는 대신 1980~90년대 디자인과 사진작품이 현대에서도 이만한 에너지와 매력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를 이끈 구본창 작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구본창의 항해’(2024년 3월10일까지)는 2024년 서울시립사진관의 개관을 기념해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이다. 독일 유학시절을 비롯해 한국에서 활동, 최근작과 그의 소집품들을 한 곳에 모은 전시로 구본창 작가가 제작한 50여 개 작품 시리즈 중 총 43개 작품 시리즈를 선별했다. 특히 1968년 중학생 때 제작한 ‘자화상’부터 최근 ‘익명자’(1996~)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에 걸친 작품을 최초로 선보이는 기회로,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다양한 인쇄물과 사물, 작품과 전시 관련된 주요 자료를 총망라한 전시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돕는다.
에디터가 전시장을 찾은 날 공개된 구본창 수집품에는(전시 기간 중 2회에 걸쳐 전시품 변경 예정), 대학생 때 명화를 모사한 습작과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가져온 인쇄물, 1967년 발매된 밥 딜런의 [Bob Dylan’s Greatest Hits] 레코드판, 1974년 작 『Graphic Design of the World 2–History』, 매거진 「라이프」 같이 진귀한 사물들과 함께, 마당에서 발견한 그릇 조각이나 여행을 다니며 모은 듯한 각종 알록달록한 패키지의 일회용 조미료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도 어엿한 ‘수집품’으로 변모해 있다.
그중 대표작인 ‘일 분간의 독백’(1980~1985)은, 1984년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중 당시 흠모했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작품 비평을 받은 후 완성한 작품이다. “유럽식 사고가 아닌, 한국 유학생의 사고로 사진을 만들어 보라”는 겔프케의 조언은, 구본창 작가의 사고와 작업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은 완벽한 조형미의 A컷이 아닌, 조금 더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느낌을 준다. 네 장을 하나로 엮은 사진들은 마치 영화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담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존재에 대한 의구심, 유학 중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점철된 6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이 마치 일 분간의 짧은 꿈처럼 느껴졌음을 표현했다.
Tip ‘모험의 여정’ 섹션에서는 작품과 연동한 자료들이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 구본창 작가의 컬러 사진이 실린 『대한민국 헌법』(현암사, 1987) 실물과, 현대춤 신인 발표회 ‘김승근의 춤’(1987)의 공연 홍보 리플릿 사진을 비롯한 영화, 연극, 무용 포스터 등 구본창 작가가 참여한 다양한 작업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자아에 대한 탐색과 더불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지속했던 구본창 작가의 작업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해갔다.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시각적 작품이나 매체적 실험에 집중했던 작품보다는, 자연의 순환을 주제로 한 고요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응축한 작업, 작품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그물처럼 엮여 순환하고 상생해, 하나의 세계를 향하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1998년 탈을 촬영하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구본창은 이후 조선백자, 곱돌 공예품, 지화 등 다양한 사물이 품고 있는 ‘삶의 흔적’을 담은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간다. 특히 각기 다른 박물관에 있는 달 항아리를 피사체로 삼아 다양한 흑백조로 촬영해 마치 달이 뜨고 지는 듯한 풍경으로 재해석한 작품 ‘문라이징Ⅲ’(2004~2006)은 이번 전시장에서 주목해볼 작품이다.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만이 아닌, 한국 현대사진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구본창 작가의 발상과 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작품으로 꼽힌다.
오랜 일기장을 덮고, 새 일기장을 펼치듯 이번 회고전 역시 그가 새로운 항해의 시작으로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글 시티라이프부 이승연 기자(lee.seungyeon@mk.co.kr)] [사진 및 자료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14호(24.1.23) 기사입니다]
몇 주 전, SNS에서 구본창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게시물을 발견했다. 그 게시물이 누군가의 SNS에서 파도를 타듯 내 SNS까지 넘실거리며 넘어오기까지는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게시물 속 그의 작품과, 수집품들은 보는 이들의 눈길을 한번에 사로잡기 때문이다. 오래됐지만 세월이 멈춘 듯 사진 속의 흐릿한 풍경, 키치한 감성의 디자인 작업물, 날것의 표상 같은 연작 시리즈 등…. 작품은 뉴트로가 트렌드라는 뻔한 감상을 남기는 대신 1980~90년대 디자인과 사진작품이 현대에서도 이만한 에너지와 매력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를 이끈 구본창 작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구본창의 항해’(2024년 3월10일까지)는 2024년 서울시립사진관의 개관을 기념해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이다. 독일 유학시절을 비롯해 한국에서 활동, 최근작과 그의 소집품들을 한 곳에 모은 전시로 구본창 작가가 제작한 50여 개 작품 시리즈 중 총 43개 작품 시리즈를 선별했다. 특히 1968년 중학생 때 제작한 ‘자화상’부터 최근 ‘익명자’(1996~)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에 걸친 작품을 최초로 선보이는 기회로,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다양한 인쇄물과 사물, 작품과 전시 관련된 주요 자료를 총망라한 전시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돕는다.
‘구본창의 항해’ 전시전경(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기심의 방에서 모험의 여정으로
전시는 구본창 작가의 생애, 작품 시리즈별 제작 계기, 국내외 전시 개최 배경 등을 정리한 연보를 최초로 제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의 시작인 ‘호기심의 방’ 섹션은 작가의 유년시절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중학생 때 제작한 최초의 ‘자화상’을 포함한 사진들부터, 내성적이었지만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 수집해온 사물과 이를 촬영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에디터가 전시장을 찾은 날 공개된 구본창 수집품에는(전시 기간 중 2회에 걸쳐 전시품 변경 예정), 대학생 때 명화를 모사한 습작과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가져온 인쇄물, 1967년 발매된 밥 딜런의 [Bob Dylan’s Greatest Hits] 레코드판, 1974년 작 『Graphic Design of the World 2–History』, 매거진 「라이프」 같이 진귀한 사물들과 함께, 마당에서 발견한 그릇 조각이나 여행을 다니며 모은 듯한 각종 알록달록한 패키지의 일회용 조미료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도 어엿한 ‘수집품’으로 변모해 있다.
‘호기심의 방’ 섹션 내 구본창 작가의 수집품(사진 이승연 기자)
섹션2 ‘모험의 여정’에선 사진 작가 구본창의 본격적인 시작을 보여준다. 평범한 모범생이자 직장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자아를 찾아 독일로 먼 항해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 사진을 전공하며 즐거움을 찾았고, 스승 기젤라 뷔어만에게 작업의 기초를 배웠다. 해당 섹션에서는 유학 시절의 작품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촬영한 사진들을 만나볼 수 있다.그중 대표작인 ‘일 분간의 독백’(1980~1985)은, 1984년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중 당시 흠모했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작품 비평을 받은 후 완성한 작품이다. “유럽식 사고가 아닌, 한국 유학생의 사고로 사진을 만들어 보라”는 겔프케의 조언은, 구본창 작가의 사고와 작업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은 완벽한 조형미의 A컷이 아닌, 조금 더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느낌을 준다. 네 장을 하나로 엮은 사진들은 마치 영화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담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존재에 대한 의구심, 유학 중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점철된 6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이 마치 일 분간의 짧은 꿈처럼 느껴졌음을 표현했다.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의 항해’는 구본창 작가가 귀국한 후 제작한 실험적인 사진 작품과 전시 개최의 여정 소개로 이어진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급격히 변화하는 서울에서 느끼는 낯섦과, 다시 이방인이 돼 느끼는 고독감을 분출하고,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과 표현 영역을 확장해나갔다.Tip ‘모험의 여정’ 섹션에서는 작품과 연동한 자료들이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 구본창 작가의 컬러 사진이 실린 『대한민국 헌법』(현암사, 1987) 실물과, 현대춤 신인 발표회 ‘김승근의 춤’(1987)의 공연 홍보 리플릿 사진을 비롯한 영화, 연극, 무용 포스터 등 구본창 작가가 참여한 다양한 작업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탈의기 06’, 1988, C-프린트, 111×83cm(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구본창은 전시 ‘사진 새 시좌視座’(1988, 워커힐미술관, 서울)에 기획자이자 작가로 참여해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의 작품과 함께 ‘탈의기’(1988) 시리즈를 전시한다. 구본창은 직접 퍼포먼스를 하면서 촬영한 중형 크기의 필름을 긁거나 두 개의 필름을 겹치거나 콜라주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진용 물감을 이용하여 조색한 뒤에 합친 하나의 필름을 다시 인화해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후 ‘연출사진making photo’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사진계와 미술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사진이 객관적 기록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뛰어넘어 주관적인 표현이 가능한 예술 세계가 된 것이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 존재를 확장하다
섹션3 ‘하나의 세계’와 섹션4 ‘영혼의 사원’에서 만나보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은 이전 섹션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만난 작품에서는 눈에 보이는 시각적 강렬함과 역동적인 개체가 우선시되었다면, 이곳에선 마치 ‘고요’라는 유약 속에 빠진 도자기처럼 표면에서 느끼는 분위기가 변화를 맞는다.자아에 대한 탐색과 더불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지속했던 구본창 작가의 작업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해갔다.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시각적 작품이나 매체적 실험에 집중했던 작품보다는, 자연의 순환을 주제로 한 고요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응축한 작업, 작품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그물처럼 엮여 순환하고 상생해, 하나의 세계를 향하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구본창의 항해’ 섹션4 작품 ‘문라이징Ⅲ’(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일본 교토의 대웅전 외벽을 통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시간의 그림’(1998~2001)과, 사물이 빠져나간 빈 곳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인테리어’ 시리즈(1998~2015) 등은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구본창 작가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런 채움과 비움의 미학을 그는 더욱 근원적으로 탐구해갔고, 이후 평소 그가 지녔던 오래된 사물에 관한 관심은 전통문화 유산의 재발견과 탐구로 연결되었다.1998년 탈을 촬영하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구본창은 이후 조선백자, 곱돌 공예품, 지화 등 다양한 사물이 품고 있는 ‘삶의 흔적’을 담은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간다. 특히 각기 다른 박물관에 있는 달 항아리를 피사체로 삼아 다양한 흑백조로 촬영해 마치 달이 뜨고 지는 듯한 풍경으로 재해석한 작품 ‘문라이징Ⅲ’(2004~2006)은 이번 전시장에서 주목해볼 작품이다.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만이 아닌, 한국 현대사진이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구본창 작가의 발상과 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작품으로 꼽힌다.
‘익명자 71’, 2019,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5×19cm(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979년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 유학생은 낯선 유럽 도시의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고,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다시 이방인이 되어 생경하게 느껴지는 도시의 사진을 담았다. 그 외에도 많은 도시를 여행한 작가는 꾸준히 자신의 발이 닿은 곳을 촬영해갔다. ‘익명의, 미지의, 미행의’라는 뜻을 가진 ‘Incognito익명자’(1996~ongoing) 시리즈는 구본창 작가 자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양한 곳을 다니며 발견한 대상, 풍경을 포착해온 그의 기록이자 일기장은 이번 전시의 마지막 섹션 ‘열린 방’에 꾸몄다.오랜 일기장을 덮고, 새 일기장을 펼치듯 이번 회고전 역시 그가 새로운 항해의 시작으로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구본창의 항해’ 포스터(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의 항해 Koo Bohnchang’s Voyages]
기간: ~2024년 3월10일(일)
장소: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 2층 전시실
시간: 평일(화~금) 10:00~20: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기간: ~2024년 3월10일(일)
장소: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 2층 전시실
시간: 평일(화~금) 10:00~20: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글 시티라이프부 이승연 기자(lee.seungyeon@mk.co.kr)] [사진 및 자료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14호(24.1.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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