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 ·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치명적인 스포일러는 지양하겠지만 예민한 분은 독서 후 읽기를 권장드립니다.
1992년 발표된 중국 작가 위화의 장편소설 <인생>이 지난 연말 오랜만에 우리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한 판사가 피고인에게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한 후 현금 10만 원과 함께 '이 책'을 건넸다던 미담 기사 덕분입니다.
피고인 A씨는 노숙인. 지난해 9월 새벽 부산의 한 편의점에서 다른 노숙인과 술자리 말다툼을 벌이다 흉기를 꺼내 그를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① 이내 흉기를 스스로 밟아 부러뜨려 실제 공격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② 전과가 없는 데다 ③ 피해자도 처벌을 원치 않던 점이 양형에 참작돼 실형을 면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 전 조사를 통해 A씨가 30대 초반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27년째 노숙 생활을 하며 폐지·고철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왔고, 주민등록이 말소돼 연락하는 가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합니다. 또 가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는 게 취미란 내용도요.
책과 함께 “나가서 어머니 산소에 꼭 찾아가 보시라”는 위로를 건넨 판사는 분명 선고 전날밤 눈을 감고 A씨가 혼자 지새웠을 수많은 밤 거리의 어둠을 가만히 상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A씨에게 권한 소설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 노인’도 홀로 견뎌내야 했던 모진 운명에 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입니다.
1992년 출간된 <인생>은 작년 중국에서만 80만 부, 그간 총 2000만 부가 팔린 흥행작입니다. 위화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중국의 거장으로 우리나라에는 <허삼관 매혈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장예모 감독의 <인생>은 1994년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늙은 농부 ‘푸구이’와 농촌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나’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푸구이는 ’나‘에게 자신이 지나온 파란만장한 생을 다시 살아보듯 생생하게 전해주는데, 그 내용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하나를 겪을까 말까 한 온갖 비극의 집합체입니다. 몇은 그가 자초했고, 몇은 시대적 배경 또는 악의없는 타인의 실수가 불러왔습니다.
푸구이는 자신을 ‘집안을 망친 놈’이라고 소개합니다. 여유로운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잘나가는 집의 고운 딸 ‘자전’과 결혼도 했지만 이내 여자와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농민 신분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워진 상황 속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까지 지병을 앓으며 푸구이는 잠시 정신을 차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픈 어머니를 의원에 보낼 돈을 동냥하러 다니던 중 국민당에 끌려가 전쟁 포로가 되고, 2년여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난을 겪습니다.
온갖 수모를 겪고 겨우 가족 곁으로 돌아왔지만, 속만 썩여드리던 어머니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밝기만 하던 큰아이 '펑샤'는 큰 열병 이후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가 되어 있고, 뱃속에 있던 아들 ‘유칭’은 아비 없이 5년을 자랐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자식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고 안도했다는 푸구이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푸구이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겨우 학교에 보낸 아들 '유칭'은 교장 부인을 도우려는 선의로 나선 헌혈에서 과다 출혈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누군가가 참척 (자식 잃음의 고통)은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라고 했던가요. 삶은 그에게 쉼없이 가혹합니다.
그후로도 푸구이는 아내와 딸과 사위, 손자마저 모두 앞다투어 떠나보냅니다. 아내는 구루병으로, 딸은 손자를 낳던 중, 사위는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손자는 배가 고파 삶은 콩을 너무 많이 먹다 어이없이 세상을 등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상실의 터널을 지나 무사히 늙은 노인의 곁에 남은 건 자신의 이름을 본딴 소뿐. 화자인 ‘나’를 마주한 노년의 그는 온전히 혼자입니다.
여기서야 요약해 건조하게 서술했지만 독자들 사이에서는 눈물을 참고 읽기 어려운 소설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하지만 눈시울이 벌개졌을 독자들과 달리 이야기를 전하는 당사자의 목소리는 담담합니다.
모든 가족을 잃은 푸구이는 어떻게 이토록 처절한 삶을 '평범했다'고 회고할 수 있었을까요? 작가는 의아할 독자들을 위해 비극적인 설정 속 '새옹지마' 를 곳곳에 숨겨뒀습니다.
노름에 이겨 푸구이의 전 재산을 차지한 '룽얼'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됐지만, 그 후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악덕 지주로 몰려 공개처형됩니다. 전 재산을 잃은 덕분에 푸구이는 죽음을 면한 겁니다. 아들 '유칭'의 목숨을 앗아간 헌혈 덕분에 국공내전을 함께한 전우 '춘성'의 아내는 목숨을 구합니다. 딸 '펑샤'마저 출산중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와 동시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쿠건'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삶을 견디게 했던 건, 극한의 가난과 불운 속에서도 생전 가족들과 서로 의지하며 나눈 온기와 사랑이었습니다. 작가는 비극의 사이사이에 읽는 사람까지 뭉클해질 여러 애틋한 순간들을 끼워뒀습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즐거움으로 가득찼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건 그들이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 처음 소개될 당시의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 작가는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글쓰기 과정에서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순간에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계속 살아가는 것 뿐. 그 과정에선 끝없는 고통도, 영원한 기쁨도 없습니다. 푸구이 역시 그 모든 비극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 고통 역시 삶의 일부임을, 그것아 ‘살아간다는 것’임을 온몸으로 견디며 받아들인 것일 겁니다. 그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는 절대적 비극 속에서도 운명을 긍정하며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침엔 나른한 기분으로 90년대 영국 락밴드 오아시스의 노래를 자주 듣습니다. 그 목소리가 하루를 더 잘 살고 싶게 해서입니다.
영국의 ‘국가’로 통하는 ‘Don’t look back in anger’ 등 여러 명곡으로 알려진 이 밴드의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는 친형제. 희망적인 멜로디로 흘러가는 곡 대부분의 분위기와 달리 이들의 유년시절은 지독한 가난과 친아버지의 심각한 아동학대로 얼룩져 있습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자식은 없기에 이는 자초한 적 없는 명백한 불운입니다. 하지만 노엘 갤러거는 훗날 자신의 유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네가 한 번 네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아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바닥에 버려지고, 그러고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지난 2006년 한 TV쇼에서 이런 환경을 두고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궁금하다"며 극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남긴 답변도 놀랍게도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내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노래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기자들은 항상 ‘상처받지 않았냐, 화나지 않았냐’라고 묻지만 제겐 그저 우리 형제가 성장한 과정일 뿐이에요. 너무 이상하게 들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전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멋진 일이 생길까’하며 즐겁게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들은 과거의 고통을 뒤로 하고 "We see things they’ll never see, You and I are gonna live forever" (우리는 그들이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을 봐. 너와 난 영원히 살거야- 'Live forever' 中)라고 외칩니다. 내일을 기대하는 삶에 유년의 그림자가 들어설 자리는 충분치 않습니다.
<인생>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대해 썼다”고 밝혔습니다.
그들과 작가 위화가 만들어낸 ‘푸구이 노인’은 어쩌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해도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들의 연속일 것입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이 삶의 모퉁이에서 갑자기 우리를 덮칠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비극은 한 개인의 과오에 대한 응징적 성격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이같은 본질적 속성에 대해 작가 위화는 ‘복’은 고통을 비껴나가는 행운이 아니라 예기치 못했던 아픔 후 속으로 혼자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는 듯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푸구이 노인은 자신의 인생사를 모두 전해들은 ‘나’를 뒤로 하고 소 푸구이와 콧노래를 부르며 황혼 빛 너머로 사라집니다. 남겨진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푸구이가 흥얼거린 노래는 단조가 아닌 장조로 상상해보고 싶습니다. 푸구이 스스로가 노년에 품게 될 초연함을 아는 이들에게 올해는 대단한 새해 복 없이도 견딜 만할 것입니다.
위화는 추후 자신의 저서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에서 이 소설의 시점을 집필 중간에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면 변경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한때 이것이 그저 글쓰기 기교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린 것이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프롤로그
1992년 발표된 중국 작가 위화의 장편소설 <인생>이 지난 연말 오랜만에 우리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한 판사가 피고인에게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한 후 현금 10만 원과 함께 '이 책'을 건넸다던 미담 기사 덕분입니다.
피고인 A씨는 노숙인. 지난해 9월 새벽 부산의 한 편의점에서 다른 노숙인과 술자리 말다툼을 벌이다 흉기를 꺼내 그를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① 이내 흉기를 스스로 밟아 부러뜨려 실제 공격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② 전과가 없는 데다 ③ 피해자도 처벌을 원치 않던 점이 양형에 참작돼 실형을 면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 전 조사를 통해 A씨가 30대 초반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27년째 노숙 생활을 하며 폐지·고철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왔고, 주민등록이 말소돼 연락하는 가족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합니다. 또 가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는 게 취미란 내용도요.
책과 함께 “나가서 어머니 산소에 꼭 찾아가 보시라”는 위로를 건넨 판사는 분명 선고 전날밤 눈을 감고 A씨가 혼자 지새웠을 수많은 밤 거리의 어둠을 가만히 상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A씨에게 권한 소설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 노인’도 홀로 견뎌내야 했던 모진 운명에 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입니다.
비극 끝 홀로 남겨진 푸구이 노인의 삶…“참 평범했다”
위화의 '인생' (출처=교보문고)
1992년 출간된 <인생>은 작년 중국에서만 80만 부, 그간 총 2000만 부가 팔린 흥행작입니다. 위화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중국의 거장으로 우리나라에는 <허삼관 매혈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장예모 감독의 <인생>은 1994년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늙은 농부 ‘푸구이’와 농촌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나’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푸구이는 ’나‘에게 자신이 지나온 파란만장한 생을 다시 살아보듯 생생하게 전해주는데, 그 내용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하나를 겪을까 말까 한 온갖 비극의 집합체입니다. 몇은 그가 자초했고, 몇은 시대적 배경 또는 악의없는 타인의 실수가 불러왔습니다.
푸구이는 자신을 ‘집안을 망친 놈’이라고 소개합니다. 여유로운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잘나가는 집의 고운 딸 ‘자전’과 결혼도 했지만 이내 여자와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농민 신분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워진 상황 속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까지 지병을 앓으며 푸구이는 잠시 정신을 차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픈 어머니를 의원에 보낼 돈을 동냥하러 다니던 중 국민당에 끌려가 전쟁 포로가 되고, 2년여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난을 겪습니다.
온갖 수모를 겪고 겨우 가족 곁으로 돌아왔지만, 속만 썩여드리던 어머니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밝기만 하던 큰아이 '펑샤'는 큰 열병 이후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가 되어 있고, 뱃속에 있던 아들 ‘유칭’은 아비 없이 5년을 자랐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자식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고 안도했다는 푸구이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후에 나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됐지. 내가 나 자신을 겁줄 필요는 없다고 말일세. 그게 다 운명인 거지. 옛말에 큰 재난을 당하고도 죽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있을 거라 했네. 그래서 난 내 나머지 반평생은 점점 더 나아질 거라 믿기로 했지.
자전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이로 실을 끊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자전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이로 실을 끊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하지만 행복도 잠시, 푸구이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겨우 학교에 보낸 아들 '유칭'은 교장 부인을 도우려는 선의로 나선 헌혈에서 과다 출혈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누군가가 참척 (자식 잃음의 고통)은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라고 했던가요. 삶은 그에게 쉼없이 가혹합니다.
"유칭은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았어.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았어.
그후로도 푸구이는 아내와 딸과 사위, 손자마저 모두 앞다투어 떠나보냅니다. 아내는 구루병으로, 딸은 손자를 낳던 중, 사위는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손자는 배가 고파 삶은 콩을 너무 많이 먹다 어이없이 세상을 등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상실의 터널을 지나 무사히 늙은 노인의 곁에 남은 건 자신의 이름을 본딴 소뿐. 화자인 ‘나’를 마주한 노년의 그는 온전히 혼자입니다.
여기서야 요약해 건조하게 서술했지만 독자들 사이에서는 눈물을 참고 읽기 어려운 소설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하지만 눈시울이 벌개졌을 독자들과 달리 이야기를 전하는 당사자의 목소리는 담담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모든 가족을 잃은 푸구이는 어떻게 이토록 처절한 삶을 '평범했다'고 회고할 수 있었을까요? 작가는 의아할 독자들을 위해 비극적인 설정 속 '새옹지마' 를 곳곳에 숨겨뒀습니다.
노름에 이겨 푸구이의 전 재산을 차지한 '룽얼'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됐지만, 그 후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악덕 지주로 몰려 공개처형됩니다. 전 재산을 잃은 덕분에 푸구이는 죽음을 면한 겁니다. 아들 '유칭'의 목숨을 앗아간 헌혈 덕분에 국공내전을 함께한 전우 '춘성'의 아내는 목숨을 구합니다. 딸 '펑샤'마저 출산중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와 동시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쿠건'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삶을 견디게 했던 건, 극한의 가난과 불운 속에서도 생전 가족들과 서로 의지하며 나눈 온기와 사랑이었습니다. 작가는 비극의 사이사이에 읽는 사람까지 뭉클해질 여러 애틋한 순간들을 끼워뒀습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즐거움으로 가득찼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건 그들이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 처음 소개될 당시의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 작가는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글쓰기 과정에서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순간에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계속 살아가는 것 뿐. 그 과정에선 끝없는 고통도, 영원한 기쁨도 없습니다. 푸구이 역시 그 모든 비극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 고통 역시 삶의 일부임을, 그것아 ‘살아간다는 것’임을 온몸으로 견디며 받아들인 것일 겁니다. 그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는 절대적 비극 속에서도 운명을 긍정하며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모든 불운을 견디고도 “영원히 살자” 말하는 사람들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왼쪽), 리암 갤러거(오른쪽) 형제
아침엔 나른한 기분으로 90년대 영국 락밴드 오아시스의 노래를 자주 듣습니다. 그 목소리가 하루를 더 잘 살고 싶게 해서입니다.
영국의 ‘국가’로 통하는 ‘Don’t look back in anger’ 등 여러 명곡으로 알려진 이 밴드의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는 친형제. 희망적인 멜로디로 흘러가는 곡 대부분의 분위기와 달리 이들의 유년시절은 지독한 가난과 친아버지의 심각한 아동학대로 얼룩져 있습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자식은 없기에 이는 자초한 적 없는 명백한 불운입니다. 하지만 노엘 갤러거는 훗날 자신의 유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네가 한 번 네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아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바닥에 버려지고, 그러고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무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지난 2006년 한 TV쇼에서 이런 환경을 두고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궁금하다"며 극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남긴 답변도 놀랍게도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내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노래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기자들은 항상 ‘상처받지 않았냐, 화나지 않았냐’라고 묻지만 제겐 그저 우리 형제가 성장한 과정일 뿐이에요. 너무 이상하게 들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전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멋진 일이 생길까’하며 즐겁게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들은 과거의 고통을 뒤로 하고 "We see things they’ll never see, You and I are gonna live forever" (우리는 그들이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을 봐. 너와 난 영원히 살거야- 'Live forever' 中)라고 외칩니다. 내일을 기대하는 삶에 유년의 그림자가 들어설 자리는 충분치 않습니다.
<인생>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대해 썼다”고 밝혔습니다.
그들과 작가 위화가 만들어낸 ‘푸구이 노인’은 어쩌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되지 않아도 견뎌낼 새해를 맞으며
새해도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들의 연속일 것입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이 삶의 모퉁이에서 갑자기 우리를 덮칠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비극은 한 개인의 과오에 대한 응징적 성격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이같은 본질적 속성에 대해 작가 위화는 ‘복’은 고통을 비껴나가는 행운이 아니라 예기치 못했던 아픔 후 속으로 혼자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는 듯합니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푸구이 노인은 자신의 인생사를 모두 전해들은 ‘나’를 뒤로 하고 소 푸구이와 콧노래를 부르며 황혼 빛 너머로 사라집니다. 남겨진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푸구이가 흥얼거린 노래는 단조가 아닌 장조로 상상해보고 싶습니다. 푸구이 스스로가 노년에 품게 될 초연함을 아는 이들에게 올해는 대단한 새해 복 없이도 견딜 만할 것입니다.
위화는 추후 자신의 저서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에서 이 소설의 시점을 집필 중간에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면 변경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한때 이것이 그저 글쓰기 기교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린 것이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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