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크루즈 버전
<기생충>의 3단 주택이 크루즈 배 위로 옮겨왔다. 지난해 칸 황금종려상 등 20여 개 전 세계 영화제를 석권한 <슬픔의 삼각형>은 호화 크루즈에 탑승한 이들의 예측 불가 계급 전복 코미디다. 중간에 멀미가 날 만한 장면만 조금 참아내면 기가 막히게 웃기는 풍자극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화 크루즈에 협찬으로 승선한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인 ‘칼’(해리스 디킨슨)과 ‘야야’(故 샬비 딘). 괴짜 부자들과 휴가를 즐기던 사이, 뜻밖의 사건으로 배가 전복되고 8명만이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한다. 이때 화장실 청소를 하던 필리핀 여성 청소부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불을 피우고 먹을거리를 공급하며 섬의 새로운 리더가 된다.
‘슬픔의 삼각형(trouble wrinkle)’은 양쪽 눈썹과 코 사이에 있는 주름을 뜻하는 뷰티 용어이기도 하고 인생에서 겪는 많은 어려움을 뜻하기도 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슬픔의 삼각형>은 젠더, 돈과 아름다움, 사상과 정치, 계급과 계층, 인종 문제까지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룬다. 1부에서는 모델 커플 칼과 야야를 통해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고 2부에는 초호화 크루즈를 배경으로 다양한 부자들의 위선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3부에서는 고급 크루즈 안에서 존재하던 계급이 전복되며, 새로운 장을 맞이한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공개 이후 “<타이타닉>과 <기생충>이 자식을 낳으면 <슬픔의 삼각형>일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슬픔의 삼각형>은 크루즈가 좌초되면서 무인도에 도착한 생존자들 사이 뒤집어진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잘나가는 패션 모델 겸 인플루언서로 당당하고 솔직한 매력을 발산하는 ‘야야’ 역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배우 故 샬비 딘(그녀는 최근 갑작스런 패혈증으로 사망했다)이 맡았다.
영화 스틸컷
찌질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모델 ‘칼’ 역할은 <말레피센트 2><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해리스 디킨슨이, 먹을 것을 쥔 섬의 리더 ‘에비게일’ 역은 필리핀의 전설적인 여배우 돌리 드 레온이 맡았다. 여기에 우디 해럴슨은 호화 크루즈를 이끄는 선장이지만 마르크스 주의자로서 크루즈에 탑승한 부자들을 비판하는 알코올 중독 선장 ‘토마스’로 등장한다.영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이 각 상황에서 겪는 사회적 역할과 계급의 이동, 외모 지상주의, 고정된 성 역할과 빈부 격차가 주는 불편한 상황을 입체적으로 연기해낸다. 요트는 모델 커플, 억만장자, 청소부 등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섬으로 데려갈 수 있는 수단이다. 섬에서 청소부가 낚시와 불을 피울 줄 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존의 위계질서가 뒤집힌다.
영화는 한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유머와 긴장감을 선사하지만, 극장을 나오면서부터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너무나 리얼한 구토 장면과 화장실에서의 모습 때문에 2부를 지켜보기가 좀 힘든 순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말 그대로 모든 현상이 전복되고, 뒤집히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관객을 끝없이 몰고 가는 감독의 솜씨가 느껴지기도 한다.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모델로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칼이 섬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경제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얻고, 전통적 성 역할에 갇힌 야야가 아닌 강인하고 현대적인 애비게일에게 빠져드는 관계가 이 영화가 지닌 풍자극의 구조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시 권력을 뺏길 위기에 처한 애비게일이 보여주는 섬뜩한 눈빛이 긴장감을 폭발시킨다.영화의 열린 결말은 역시 관객들이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만든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집단 하에서 인간 행동의 모순을 다룬 영화들을 주로 만든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슬픔의 삼각형>에서 계층, 젠더, 인종 등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시선에 신랄한 유머 감각까지 더해 사회의 갖가지 요소를 꼬집어 냈다. 올해의 수작이라 할 만하다. 러닝타임 147분.
[글 최재민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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