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테이블과 의자.
마치 거인국에 온 걸리버가 된 것만 같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철제 접이식 의자인데 5배 가량 커진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보니 건축 구조물 속에 있는 듯 싶다. 어릴 때 책상 밑을 숨어다니면서 놀았던 기억에서부터 거대한 대량생산 체제의 자본주의 시스템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No title (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미국 현대미술작가 로버트 테리엔(1947~2019)의 첫번째 유고전 'at that time(그때는)’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5월 5일까지 열리고 있다. 독립큐레이터인 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이 기획에 참여해 2차원 평면부터 3차원 조각까지 작가의 대표작 50여점을 모아 회고전을 펼쳤다.No title (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특히 전세계에 3점 뿐인 이 거대한 작품 'No title(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2008)이 백미다. 엄청난 크기 때문에 비행기 화물칸에 가까스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전시장 입장을 위해 후문 공사까지 하면서 교체해야 했다. 녹슨 철 재질까지 살릴 정도로 사실적인 작품이지만 그저 확대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관람자 시선과 느낌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사진을 수없이 찍으면서 구조를 수정한 것이다.No title (stacked plates, blue), 2018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변기를 두고 '샘'이라 명명했던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기성품)' 개념을 이처럼 제대로 구현한 작가가 있을까 싶다. 장인정신에 대한 특별한 경의를 표했던 작가는 기존 산업디자인 제품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을 활용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에 평생 매진했다. 관람객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모든 작품의 제목을 'No title(무제)'로 걸고 괄호 속에 별칭을 추가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다. 작가는 소수 예술인들과 교류하면서 평생 독신으로 수행자처럼 살았다고 한다.No title (large wall drop), 2017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전시장 안에서 처음 맞이하는 조각 '눈사람'(2018)은 작가가 타계 1년 전 본인의 자화상처럼 남긴 작품이다. 작가가 시카고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한다. 이 작품은 함께 출품된 눈물 조각 'large wall drop’(2017)처럼 반사되는 소재를 사용해서 관람객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딘 아네스 로버트테리엔재단 디렉터는 "밥(로버트의 애칭)은 평범함(ordernary) 속에서 비범함(extraordinary)을 끄집어 내는 작업을 추구했다"고 전했다.
생전에 작가는 "각각의 사물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기억과 추억을 품고 있다. 나는 내 작업을 통해 이들의 숨겨진 서술적인 구조와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다"고 밝혔다.
No title (stork beak print), 1996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그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작업과 그 과정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고,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를 열어준 것으로 평가받는다.No title (running feet), 2011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전시를 통해 작가가 원래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다양한 연출사진을 제작한 이력을 확인하니 작품세계가 훨씬 더 폭넓게 다가온다. 초기 작업들이 커다란 대상을 작게 만들거나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담았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거대한 스케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각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아주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드로잉을 통해 작가가 탐구를 거듭한 집요함도 보인다. 가짜 수염과 구름은 반복적으로 구현해온 다양한 소재 중 하나다.No title (Disc cart II), 2007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특히 작가의 드로잉은 팝아트적 느낌이 두드러진다. 도널드 덕 같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의 부리만 보여준다든지, 달리는 발만 보여줘 호기심을 자극하고 넓은 여백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종이를 쭈글쭈글 울게 해서 율동감을 더한 것도 재치있다.No title (Dutch door), (2003) [사진 제공 = 로버트 테리엔재단]
대형 조각작품 'Dutch door’(2003)연작도 미국이나 유럽 농가에서 흔한, 위아래가 분리되는 나무 문을 3m높이로 확대한 것이다. 미니멀리즘 조각과 닮은 이 작품은 유년기 추억을 소환하면서 단순한 구조로 시공간 변화를 일으킨다. 특히 두개의 문 중에서 아래는 어린이와 애완동물, 위는 어른용으로 구분되는 구조인데 테이블 연작을 잉태한 것으로 보인다.작가는 미국 LA현대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휴스턴 현대미술관, 가고시안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미국 뉴욕 MoMA, 영국 테이트 모던,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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