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벽지도 달리 보이는 때가 있다.
햇빛이 초록 유리창을 거치면서 유리가 비치지 않은 나머지 벽은 보색관계인 붉은 기운이 확 올라온다. 이 찰라를 포착해 그림에 담은 화가가 있다. 빛을 좇는 인상파 화가들처럼.
미국 유학시절 좋아하게 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그려진 달력이 주요 매개가 되어 평범한 일상 공간인 방도 새로운 작품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그저 슬슬 붓질한 것 뿐인데 구도의 균형이 맞고 색깔도 조화롭다. 이목구비 구분도 없는 얼굴에 붓질 하나로도 표정이 읽히는 듯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학교를 떠나며3 Leaving the School3, 2021, Acrylic on canvas, 130.3x193.9cm [사진 제공 = 아트사이드갤러리]
한국 화단에서 40여년여간 고집스레 리얼리즘에 천착해온 화가 최진욱(66)의 '호퍼 달력'연작이다. 4월 23일까지 서촌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학교를 떠나며'에 출품됐다. 서울대 미술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추계예술대학 교수로 봉직하다 지난해 퇴직한 작가의 일상을 전시 주제로 삼았다.최 작가는 "27년간 학교 생활이 한순간에 지난듯 싶은데 허전하다기보다는 내내 긴장하고있다 정리되는 느낌이다"라며 "아카데미즘을 떠너 가능성의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최진욱 작가 개인전 [사진 제공 = 아트사이드갤러리]
이번 전시작에는 지난해 8월 학교를 떠나기 전과 재작년 말까지 가르쳤던 4학년 학생들이 많이 등장했다. 교수가 본인을 그리길 한사코 거부하던 학생들이 그림 속에서 살아났다. 역시나 단순하고 자유로운 붓질로 표현됐지만 본인 작품을 바라보는 학생의 옆모습은 관람객에게 마치 자화상을 엿보는 제3자의 시각을 제시해서 재미가 있다.미술평론가 조은정은 "다른 이의 경험과 시각을 공유하며 시간의 흐름이 기재된 (최진욱의) 화면은 메타버스 공간에서 친구와 함께 플레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그것은 재현의 리얼리즘에 그가 성공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최근 작가는 연작을 통해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단일 그림 틀을 벗어나 그림과 그림이 연결되기도 하고 서로 충돌도 하면서 변증법적 공간을 만들고 회화적 서사를 풀어가는 장치다.
'학교를 떠나며5(2021)' 3부작은 어정쩡하게 자기 작품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의 모습과 학생의 작품이 다르게 표현되는 모습이 흥미롭다. 구상화이지만 살짝 빈틈을 통해 추상화와 비슷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준다. 30여년 전 가족사진을 다시 끄집어 내 '피'를 표현하고 88만원 세대를 소환한 과거 작품을 '땀', KTX승무원의 삭발식 장면을 '눈물'로 재작업한 가로 6m길이의 3연작화 '피 땀 눈물(2021)'도 완성했다. 역시 BTS(방탄소년단)의 노래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피, 땀, 눈물_삼부작 Blood, Sweat, Tears_Triptych, 2021, Acrylic on canvas, 259.1x193.9cmx3pcs [사진 제공 = 아트사이드갤러리]
작가는 "학교와 집만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작품 소재가 제한적이어서 바깥 세상을 그리려 노력해 왔다"며 "불과 5년 전만 해도 눈에 보이는 색깔에 충실하려 했다면 이제 좀더 느낌에 충실해졌다. 장면 자체가 구성적으로 완결성 있으면 그대로 두지만, 새로운 색이나 선을 덧대기도 한다"고 전했다.최 작가는 부인(박강원)과 딸 모두 화가인 미술인 가족이다. 특히 딸 최수인 작가는 개성적인 추상화로 무서운 신예 작가로 치고 올라오고 있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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